533회
68. 공작님과 가주님 (12)
베일이 자신의 아버지를 '현 바스툴 왕'이라고 칭하였다.
이는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혈연으로 이어진 정을 완전히 배제하고, 바스툴 국왕을 공공의 적으로 삼겠다는 뜻이자.
'현재'는 그자가 바스툴의 왕이지만, 머지않아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말겠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귀족들은 베일이 자신의 아버지를 '현 바스툴 왕'이라고 칭하였을 때, 흠칫 어깨를 떨었으며.
악숭 세력을 거론하였을 때는 헛바람을 들이켰다.
"나는 그런 현 바스툴 왕의 통보에 거부 의사를 표했고, 그 결과 목숨을 위협받으며 왕실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네. 그러다가···. 교단의 도움을 받아 죽음을 위장하여, 추적을 끊어낼 수 있게 된 것일세. 왕실에서 내 죽음을 공표한 건 그 이후의 일이네."
베일이 도중에 잠깐 말을 흐리며 우리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는 '교단의 도움'이라 말하긴 했지만, 정말 말하고 싶었던 건 '프라시더스 공작의 도움'이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나를 향한 감사함을 전하고자 이쪽을 봤을 수도 있고?'
그럴 수 있는 게 아니라, 양심이 있으면 베일은 나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그리고 베일은 양심 있는 사람이니까, 분명 나에게 고마워하고 있을 테다.
나는 우리 쪽을 바라보는 베일을 향해 흐뭇하게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베일은 내 미소를 확인하자마자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렇다는 건, 저하께서는 이번 일에 교단의 지원을 받으실 계획입니까?"
글리델 자작이 질문을 꺼내자, 몇몇 귀족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렇다면 안심이라고 말하는 목소리도 들려왔다.
반면에 질문을 꺼낸 글리델 자작을 비롯한, 몇몇 생각 있는 귀족들의 얼굴은 심각해졌다.
자칫 나라의 주권을 외부 세력에 갖다 바치는 꼴이 될까 염려하는 것이다.
"그대들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내가 왜 모르겠나. 현 바스툴 왕국의 실태는 자랑스럽다고 말할 수 없지만, 소중한 조국일세. 이 나라가 나아갈 방향을 정할 수 있는 건 이곳에서 나고 자란 우리들뿐이며, 혁명 또한 우리의 힘으로 이룩할 것이네."
"교단의 생각은 다를 수도 있지 않습니까?"
베일의 대답에 만족했는지, 글리델 자작이 살짝 누그러진 표정으로 재차 질문을 건넸다.
교단의 생각을 묻는 것이니만큼, 이번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건 베일이 아니었다.
"그건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내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입을 열기 무섭게,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다.
30여 쌍의 눈동자가 일제히 나를 향하니 부담감이 장난 아니다.
그냥 막내 신관 역을 맡은 세르펜스에게 떠넘길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그러고 보니, 나 이따가 기도문도 외워야 하잖아?'
이제 와서 없어 보이게 내뺄 수는 없는 노릇이니, 기도문 예행연습이라 생각해야겠다.
"교단이 베일 저하의 죽음을 위장해 주었던 건, 어디까지나 고발자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절차적으로 행한 일에 불과합니다. 그 이상의 도움은 저하께서 거절하셨습니다."
내 대답에 교단의 지원을 바랐던 귀족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나라의 주권이고 뭐고, 일단 현 왕실을 몰아내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한 게 아닐까 한다.
악숭 세력과 손잡은 부패한 왕실의 지배를 받는 것보다, 룩스메아 교단의 참견을 받는 게 훨씬 나을 테니까.
'그게 아니면, 뭐. 혁명을 마치고 나서 협상을 잘하면 되겠거니. 그렇게 낙관적으로 생각한 거려나?'
이곳에 모인 이들의 힘만으로 한 나라를 뒤엎긴 역부족이니.
교단의 지원을 바라는 자들을 비난할 수만은 없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저하께서 성기사 차림을 하고 계신 겁니까?"
이번 질문을 던진 건 안델 남작이었다.
그러잖아도 베일이 성기사 신분을 위장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려던 차였다.
"제보가 들어왔으니, 정말로 현 바스툴 왕실이 악마 숭배 세력과 손을 잡았는지 확인하러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하께서는 그 참고인으로서 저희와 함께하게 된 겁니다. 그런데 저하께서 죽지 않고 살아서 성직자들과 함께 있는 모습이 목격돼 봐요. 바스툴 왕실이 어떻게 행동하겠습니까?"
"반란을 경계하여 군대를 수도에 집중시키는 한편, 저하를 암살하려 할 겁니다. 아니면 저하께서 악마···를 숭배했다는 거짓 증거를 조작하여 대중에게 공표하거나···."
"잘 아시네."
내가 슬쩍 비웃음을 머금은 채 비꼬듯 말하자, 안델 남작이 무안해졌는지 크게 헛기침을 했다.
나는 그런 안델 남작에게서 신경을 끄고 하던 말을 마저 끝냈다.
"어쨌거나 본 교단은 바스툴 왕국의 집안싸움에 관여할 생각이 없습니다. 하지만 현 바스툴 왕실이 악마 숭배 세력과 손을 잡은 정황이 밝혀진다면, 여러분께 협조를 구할 수는 있습니다."
"그것이 교단의 입장입니까?"
글리델 자작이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협조를 구한다는 말은 곧, 교단 또한 현 바스툴 왕실을 적으로 규정하고 함께 싸우되. 베일이 왕위에 올랐을 때 권리를 주장하지 않겠다는 뜻이니까.
"한 나라의 기득권 따위에 관심을 가질 만큼, 본 교단이 탐욕적으로 보입니까? 교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악마 숭배자들이 더 이상 날뛰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그리하여 이 대륙에 평화가 찾아오면, 그것만으로 족합니다."
나는 일부러 불쾌하다는 티를 팍팍 내며, 인상을 와락 구겼다.
이 정도에서 멈춰도 사람들은 내 말을 믿어 주겠지. 하지만 어쩐지 2%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정치하는 놈들이 고작 말 몇 마디에 '앗, 그래? 고마워.' 하고 순진하게 넘어갈 리가 없다.
나는 귀족들이 한 입 가지고 두말하려는 것 아니냐고 의심하기 전에 선수 치기로 했다.
"대륙을 널리 이롭게 하려는 교단의 뜻을 이리도 몰라주다니! 오호통재라···!"
내가 이마를 짚으며 비통하여 견딜 수 없다는 듯 탄식하자, 귀족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네가 교단을 의심했냐?'라고 추궁하는 눈빛을 주고받는 모습이 시야에 담겼다.
'설마하니 귀족들을 싸움 붙였다고 베일이 뭐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불안이 현실로 반영되기라도 한 듯, 나를 바라보는 베일의 눈초리가 그리 고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이럴 수밖에 없었다는 걸 이해했는지, 이내 그 시선을 거두었다.
"오오, 그런 깊은 뜻이 있었군요! 과연 룩스메아 교단입니다!"
귀족들이 느닷없이 룩스메아 교단을 칭송하기 시작했다. 개중 몇몇은 기도하는 체하며 '자애로우신 룩스메아 님'을 찾기도 했다.
자기네들 사이에서 교단을 의심한 작자를 찾아내는 것보다, 룩스메아 교단의 고결한 뜻을 찬양하는 게 생산적이란 결론을 내렸나 보다.
도떼기시장 같은 난장판이 벌어지기 전에, 베일이 목소리를 높였다.
"너무 안심하지 말게나! 교단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악마 숭배자들을 처단하는 것이네. 그 이후의 일은 책임지지 않는다는 걸 명심하게. 그대들이 바라는 것이 단순히 현 왕실을 몰아내는 것뿐인가? 이 나라를 바꾸고 싶은 게 아니었나?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주축이 되어 움직여야 하네."
자칫하면 힘 있는 중앙 귀족들에게만 좋은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경고였다.
그 말에 다들 아차 싶었는지, 귀족들의 얼굴에 경각심이 어렸다.
베일이 진짜가 맞는지 미심쩍어할 땐 언제고.
귀족들은 어느새 혁명 이후를 걱정하며, 베일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글리델 자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것도 그때였다.
그 돌발 행동에 베일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글리델 자작을 쳐다보았다.
"무슨 이견이라도 있는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하께서 하신 말씀에는 틀린 점이 하나도 없으니, 반박할 의견 같은 건 없습니다. 다만···."
글리델 자작이 베일을 향해 살짝 고개 숙여 대답한 뒤, 자리에 앉아있는 귀족들을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아주 천천히 말을 이었다.
"군주께서 서 계시는데, 신하된 자로서 어찌 의자에 편히 앉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귀족들이 눈치 게임이라도 하듯 벌떡벌떡 일어났다.
드르륵, 의자 끄는 소리가 연회장 안을 가득 채웠다.
그 소리가 멎어 들었을 때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은 우리 일행뿐이었다.
'이래서 연륜은 무시할 수 없다니까?'
베일에게 싹수가 보이자마자, 르웰에 이어 '두 번째 신하' 자리를 선점하다니.
글리델 자작의 놀라운 순발력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그에 질세라. 르웰은 이곳이 자신의 홈그라운드라는 걸 이용하여, 시종을 불러 베일이 앉을 의자를 가져오게 했다.
그녀는 '글리델 자작이 날고 기어 봤자, 저하의 오른팔은 나'라고 주장이라도 하듯. 의자에 앉은 베일의 오른쪽에 서서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다들 앉게나."
베일의 허락을 받고 나서야, 귀족들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어찌나 말을 잘 듣는지, 나도 모르는 새에 다들 베일에게 충성 서약이라도 바친 줄 알았다.
'그래도 군주가 서 있는데 어쩌고 하는 말에 다들 자리에서 일어났으니, 암묵적으로 충성을 약속한 거라고 봐도 무방하려나?'
하긴 지금 이 자리에서 서른여 명의 충성 서약을 일일이 받는 것도, 참 할 짓 없는 일이긴 하다.
"저···. 외람되오나, 앞으로의 계획이 어떻게 되는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안델 남작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올리며, 베일에게 질문했다.
어쩌다 보니 분위기에 휩쓸려 남들을 따라 일어났다가 다시 앉긴 했지만. 정작 혁명을 어떻게 진행해 나갈지, 구체적인 방안은 하나도 듣지 못했으니.
불안한 것도 당연한 일이고, 그것을 가라앉히는 건 베일의 몫이다.
사실 베일과 르웰이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건 나 또한 마찬가지다.
몇 가지 안건을 추려내고 나면 세르펜스에게 상담하러 올 줄 알았건만.
베일은 최대한 자신과 자기를 따르는 이들의 힘만으로 해내고 싶다며, 당분간은 지켜봐 달라고 말했다.
'그런 베일이 못 미더웠는지, 세르펜스가 몰래 나가려는 걸 붙잡느라···.'
애를 먹었다고 말하고 싶지만, 나가지 말랬더니 곧장 알았다고 대답해서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여하튼 나는 기대심을 가득 안고 베일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내가 기차 사고로 죽은 게 아니라는 걸, 알릴 생각일세."
"예?! 하지만 저하께서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왕실이 알게 된다면···."
"나의 생존까지 알릴 생각은 없네. 말 그대로 내가 그곳에서 죽었다는 걸 부정하여, 그런 거짓 발표를 한 왕실의 행동에 의문을 품게 할 생각이네."
안델 남작이 화들짝 놀라서 우려를 표하자, 베일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 말인즉. '베일 왕자는 기차 사고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 사망하였고, 바스툴 왕실은 그것을 숨기고 싶어 한다.'라는 소문을 내겠다는 뜻이다.
그러더니 돌연 멋쩍다는 표정으로 헛기침을 해댔다.
"크흠! 그리고 다들 알다시피···, 세간에 알려진 내 평가는 그럭저럭 좋은 편이지 않은가?"
"예, 그렇고 말고요! 저희끼리만 해도, '왕실의 마지막 양심'이라 불렀으니···."
안델 남작의 아부인지 진실인지 모를 대답에 베일의 얼굴이 붉어졌다.
오늘 하루 제법 근엄한 모습을 보이는 듯하더니. 낯빛이 쉽게 변하는 건, 고칠 수 없는 체질인가 보다.
"어, 어쨌거나···. 사람들은 왕실 측에서 평소 이념이 맞지 않던 2왕자를 살해한 건 아닐까, 의심하게 되겠지. 그리고 그때쯤, 새로운 소문을 하나 끼워 넣는 걸세. '현 바스툴 왕실이 악마 숭배 세력과 손을 잡으려고, 그에 반대하는 2왕자를 죽여 사고사로 위장한 걸지도 모른다.'라는 내용을 말이네."
처음부터 악숭이와 관련된 소문이 퍼진다면 사람들이 왕실의 눈치를 보느라 쉬쉬할 테니.
우선 자신의 죽음에 관한 의문을 던져 놓고, 현 왕실에 대한 불신으로 번지게 한 뒤. 악숭이와 엮어서 완전히 보내 버리겠다는 작전인가 보다.
순도 100% 진실만 담은 이야기라서 그런가, 말의 앞뒤가 딱딱 들어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