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536화 (536/925)

536회

69. 공작님과 패륜 왕 (1)

바스툴 왕실에서 온 편지를 무시하기로 한 후, 르웰은 바쁘게 움직였다.

뜻을 함께하기로 한 귀족 가문들에 연락을 보내고 군사를 재정비하는 한편. 연설 일정을 잡았다.

세라투 자작가는 2왕자 베일 바스툴을 지지하겠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다.

그 구체적인 날짜는 왕실 연회가 열리기 5일 전으로, 르웰뿐만이 아니라 다른 귀족 가문 또한 같은 날 연설을 하기로 약속했다.

베일은 베일대로 자신이 관철하고자 하는 정의를 밝히고, 혁명의 시작을 선포하기 위한 선언문을 준비했다.

그리고 연설을 끝낸 뒤.

베일과 르웰을 비롯하여 혁명에 가담한 모든 이들은 곧장 병사들을 이끌고, 바스툴 왕국의 수도인 '레스타'로 향할 예정이다.

베일의 생존은 최대한 오래 숨길수록 좋지만, 병사들과 함께 수도까지 진군하려면 명분이 필요했다.

누가 왕이 될지도 모르는 채로 수도를 향해 진격하라고 할 수는 없다.

억지로 명령을 내린다면 못 할 것도 없지만, 사기는 바닥을 기게 될 것이다.

또한 수도까지 나아가는 길목에 있는 영지의 영주들 또한 성문을 열어 주지 않을 거다.

그렇게 된다면 영지를 거쳐 갈 때마다 공성전을 벌여야만 한다.

전대 세라투 자작이 열심히 군사들을 키워 놓긴 했다지만, 매번 공성전을 벌이다 보면 수도에 도착하기도 전에 병사들이 남아나질 않을 거다.

'사망자도 사망자지만, 탈영병도 상당하겠지.'

베일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병사들에게 희생을 강요하지 않을뿐더러.

어찌어찌 운 좋게 그 방식으로 왕이 된다 한들, 아무도 받아들여 주지 않을 거다.

연설일이 하필이면 연회가 열리기 5일 전인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병사들의 행군 속도를 고려해 봤을 때. 왕실 연회가 열리기 전에 수도까지 도착하려면, 약 5일의 시간이 필요하니까.

"마침내 오늘이네요."

나는 베일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새하얀 성기사 갑옷 대신 아무 문양도 그려지지 않은 평범한 갑옷을 입고 있었다.

이제는 얼굴을 드러내야 할 때가 왔기에 투구 같은 건 쓰지 않았다.

그 대신 푸른 망토를 어깨에 걸친 채, 영주성의 성벽 밑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 성벽 위에서는 르웰의 연설이 한창 진행 중이다.

"네, 드디어 오늘이 왔습니다."

베일은 르웰이 있을 성벽 위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밝은 태양 빛 아래 훤히 드러난 베일의 앳된 얼굴은 긴장감과 고양감이 한데 뒤섞여, 묘한 열의가 느껴졌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마음의 준비는 끝났냐는 질문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베일의 옆. 세라투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갑옷을 입고, 기사로 위장한 세르펜스를 쳐다보았다.

녀석이 저런 차림을 한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최근까지 베일이 그러했듯. 투구로 얼굴을 가리기 위함이다.

입술 근처에 점까지 찍은 세르펜스의 변장은 완벽하다 자부하지만, 그렇다고 독보적인 미모가 어디 가는 건 아니다.

녀석의 얼굴을 확실히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의심해 볼 만했다.

'특히나, 공왕이 그곳에 있다면 무조건 세르펜스의 얼굴을 알아보겠지.'

우리는 베일을 이곳까지 데려왔고, 세라투 가문의 일에 관여했다.

그리고 이제는 바스툴 왕실까지 뒤엎을 예정이다.

악숭 세력도 머리가 있다면, 신의 사자인 나와 세르펜스가 엮여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정도는 떠올릴 수 있으리라.

그런 상황에서 세르펜스와 닮은 신관을 보게 된다면, 의혹은 곧 확신으로 굳어질 거다.

'적어도 베일이 왕좌를 차지하기 전까지 세르펜스의 이름이 튀어나와서는 안 되니까···.'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베일을 지키기 위해서다.

그가 혁명의 중심인 만큼 왕실은 집요하게 베일을 죽이려 들 거다.

행여라도 베일이 죽기라도 한다면, 모든 일은 허사로 돌아간다.

'현 바스툴 왕실이 악숭 세력과 연관되었다는 게 밝혀진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야.'

그들을 대신할 베일의 존재가 없다면, 나라 하나가 공중분해 되며 혼란이 생겨날 뿐이다.

그러니 악숭 세력 또한 베일을 집중적으로 노릴 테다.

"왕자님 잘 지켜요."

"···부디 주교님을 잘 부탁드립니다."

세르펜스가 내 말을 무시하고, 유지스와 윈스톤을 향해 말했다.

아무래도 베일과 다르게 이쪽은 마음의 준비가 덜 되었나 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주교님은 저희가 지키겠습니다."

"네,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윈스톤과 유지스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세르펜스는 제 손에 들린 투구를 뒤집어썼다.

여차하면 본 실력을 다 하겠다고 얘기해 두긴 했지만, 내심 불안한 건 어쩔 수 없는가 보다.

"···그동안 현 왕은 책임과 윤리를 배반한 부패한 영주들이 힘없는 백성들을 착취하는 것을 눈감아 주었다.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자에게 왕의 자격이 있는가? 나는 그에 의문을 표하는 바이다. 현 왕은 부패한 자들의 정점이며, 그 시작점이다!"

르웰의 연설이 거의 막바지에 다다랐다.

"그렇기에 나 르웰 세라투는 현 바스툴 국왕을 군주로 받아들일 수 없음을 이 자리에서 밝히는 바이다! 내가 바라는 군주는 제 욕심을 채우는 자가 아닌, 백성들의 걱정을 덜어 주는 자이다. 그리하여 나는 내 영지민들이, 더 나아가 이 땅의 모든 이들이 마음 놓고 살아갈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 줄! 그런 군주를 따르기로 했다!"

소리를 증폭시켜 주는 마법 도구를 통해, 르웰의 다부진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느닷없는 반역 선언에 다들 놀랐는지 성벽 너머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혼란스러운 그 웅성거림이 부름처럼 여겨진 것일까?

결의에 찬 표정을 한 베일이 보무당당히 성벽 위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푸른 망토 자락이 바람에 나부껴 깃발처럼 펄럭였다.

그런 베일의 뒤를 세르펜스가 따랐다.

내키지 않아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내팽개칠 생각은 없는가 보다.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자에게 왕의 자격이 있는가? 그 의문의 답은 모두의 머릿속에 자리하고 있을 것이며, 나 또한 그러하네."

베일이 성벽 위에 올라 가장 먼저 한 건, 르웰이 던진 의문에 대답하는 일이었다.

분노하며 언성을 높인 것도, 격정에 타올라 강렬하게 부르짖는 것도 아닌.

평범하게 대화하는 듯한 잔잔한 말투였다.

그렇지만 마법 도구를 통해 증폭된 목소리는 웅성거림을 뚫고, 혼란스러워하는 이들의 귀에 다다르기에 충분했다.

"왕의 권력이 무엇을 위한 것이겠는가. 한 나라를. 그리고 그 땅을 밟고 살아가는 이들을 책임지기 위함이 아니던가? 외부의 적으로부터 백성들을 지키고, 욕심에 눈이 먼 귀족들이 선을 넘지 않도록 제재하기 위함이 아니던가?"

자신의 정체도 밝히지 않은 채. '왕이라면 마땅히 짊어져야 할 책임'부터 입에 담는 그의 모습에 호기심이라도 느낀 것일까?

다들 베일의 이어질 말에 집중하고 있는지, 웅성거림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한데 현 왕은 어떠한가? 제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하여, 귀족들이 영지민들을 착취하도록 사주하고 있으니···. 어떻게든 올바른 길로 나아가려는 자들은 탄압받고, 결국에는 다른 자들과 마찬가지로 부패의 길에 발을 들이게 되지. 이 모든 것을 부추기는 자가 바로 현 바스툴 국왕이네. 그자는 왕이라 불릴 자격도 없네."

잠시 숨을 고르는 것인지, 베일의 목소리가 잠시 끊겼다.

멀찍이서 목소리만 듣고 있는 게 아쉽고 사람들의 반응도 궁금해서, '이럴 줄 알았으면 성벽에 올라가 있을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반대로 역시 그러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 무대의 주인공은 베일이며, 지금 이 자리는 앞으로 그가 혼자서 나아가야 할 길의 시작점이다.

르웰을 비롯하여 베일을 돕는 이들은 많겠지만, 그들이 왕관의 무게까지 함께 들어줄 수 있는 건 아니다.

백성들의 일은 영지를 가진 귀족들이 함께 책임져야 할 일이나, 왕은 그런 귀족들까지 책임져야만 한다.

그 외에도 오롯이 왕 혼자서 책임져야 하는 결정은 수도 없이 많다.

그럴 때 함께 있어 줄 수도 없으면서, 고작 아쉽고 궁금하다는 이유로 저 자리에 함께 설 수는 없다.

"이 세라투 령을 조금만 벗어나면, 제대로 먹지 못하여 굶는 이들이. 그리고 온갖 범죄에 노출되어 두려움에 밤잠을 설치는 자들이 넘쳐나고 있네. 현재 바스툴 왕국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내부가 썩어 문드러졌고, 이는 왕이라 불릴 자격이 없는 자가 왕이 된 결과일세."

베일의 말은 곧 현재의 왕을 내버려 둔다면, 이 세라투 령 또한 언젠가 굶주림과 두려움에 시달리게 될지 모른다는 경고였다.

그와 동시에 자신은 그러한 왕이 되지 않겠노라, 표명을 거듭하는 일이었다.

"내가 이 자리에 선 까닭은 책임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지 않아서일세. 나는 더 이상 고통받는 백성들을 지켜보고 싶지 않네. 그리고 내가 나고 자란 나의···. 아니, 우리의 고향이 이대로 쇠퇴하는 것을 막고 싶기 때문이네."

사실 베일이 민심을 얻는 건 매우 쉬운 일이다.

지금처럼 구구절절하게 '나는 이러이러한 점이 현 왕과 다르며, 나는 어째서 왕이 되고자 결심하게 되었고, 내가 왕위에 오른다면 어떤 왕이 될 것이다.'라고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그저 '현 바스툴 왕실은 전부 악마 숭배자다! 그래서 내가 너희를 구원하러 나섰다!'라는 짧은 말이면 충분하다.

'그런데도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걸 뒤로 미루면서까지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일종의 다짐이라고 봐야 하나?'

베일은 정말 좋은 왕이 될 거다.

그리고 [성검의 주인]에서 '세라투 후작'에게 휘둘렸던 것과 달리, 자기 자신을 믿으며 스스로의 선택으로 나아가게 되겠지.

"나 바스툴 왕국의 2왕자, 베일 바스툴은 왕실의 피를 이어받은 자로서 이 자리에서 맹세하노라! 현 왕을 끌어내리고 그자가 회피한 책임을 대신 짊어질 것을! 그리하여 그동안 고통받아온 백성들에게 사죄하고, 모두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겠노라!"

드디어 베일이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그리고 사람들이 죽은 2왕자가 어떻게 살아 있는지 의문을 떠올리기도 전에.

"또한 이 자리에 모인 모두에게 약속하겠네. 이 대륙의 모두에게 우리의 나라가 이토록 자랑스럽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도록, 이 나라를 바꾸어 나가겠노라고!"

그는 미래를 약속했다.

베일이 진짜인지 아닌지. 죽었다던 그가 어떻게 살아 있을 수 있는지.

이곳에 모인 이들에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다.

'어차피 그가 진짜 2왕자인지는 귀족들이 알아서 밝혀 줄 테니까.'

굳이 귀족이 아니더라도, 수도에 가면 베일의 얼굴을 본 적 있는 평민들이 꽤 있을 거다.

그렇기에 이들에게 중요한 건 오직, '지금 연설을 하는 베일이 어떤 사람인가.' 그게 전부다.

"와아아!!"

우레와 같은 함성이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2왕자 저하' 또는 '베일 바스툴 저하'를 연호하는 목소리를 드높였다. 간간이 만세를 외치는 자들도 있었다.

얼마 전 르웰의 축하연에서 들었던 귀족들의 만세 소리와는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매우 열성적이며 간절한 외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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