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541화 (541/925)

541회

69. 공작님과 패륜 왕 (6)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자,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세니어가 또 버프를 걸어준 거다.

'나는 싸우지도 않는데···.'

그저 싸우지 않는 수준이 아니라, 내 발로 서 있지도 않았다.

거대 지렁이의 머리는 칼립스 이단 심문관과 싸우고 있었지만, 꼬리는 그렇지 않았던 탓이다.

이리저리 무차별적으로 휘둘러지는 꼬리는 매우 빠르고 파괴적이었다.

그 결과. 나는 작작 들려 다녀야겠다고 결심한 지 불과 몇 분 만에, 윈스톤에게 들려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그래도 오늘은 들려 다니는 동료들이 많아서 위안이 된다.

베일은 세르펜스에게 들려 다녔고, 에드나는 유지스에게, 르웰을 비롯한 여러 귀족은 각자의 호위 기사에게.

심지어는 두 명의 신관들 또한 성기사에게 들려졌다.

"장담하건대 이런 난장판은 혁명에 가담한 사람 중,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거야···."

"이런 상황에서 꼭 그런 감상을 내뱉어야겠습니까?"

윈스톤이 한 팔로 검을 휘둘러, 튀어 오른 석재 타일 조각을 쳐내며 말했다.

나도 지금 이게 심각한 상황이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아쉬운 걸 어쩌겠는가.

'오늘은 베일이 타락한 왕실을 척결하고, 왕위에 오르는 역사적인 날이 되어야 하는데···.'

지금 그는 세르펜스의 옆구리에 낀 상태로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그 상황이 부끄러운지, 베일은 양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세르펜스에게 다른 자세로 들 수는 없었냐고 따지고 싶지만, 어떤 자세든 체면을 구기는 건 변함이 없으리라.

'그나마 다행인 건, 귀족들도 다 같이 들려 다닌다는 것뿐인가···?'

몇몇 업혀 다니는 귀족도 보였으나, 모양 빠지는 건 매한가지였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거대 지렁이 마물을 노려보았다.

마핵의 기운이 스며든 새까만 몸체 곳곳에 반짝이는 은빛 단검이 꽂혀 있었다.

'칼립스' 성을 이어받는 이단 심문관은 모든 무기 사용에 능통하다더니. 단검 투척술에도 일가견이 있는가 보다.

칼립스 이단 심문관은 지렁이 특유의 분열 특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 마물이 반 토막 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베어 내거나 검을 꽂아 넣는 등.

피해를 누적시키는 방향으로 거대 지렁이 마물을 상대하고 있었다.

성기사들도 칼립스 이단 심문관과 비슷하게, 지렁이 마물의 몸통에 달라붙어 검을 찔러 넣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진짜 크네···. 저딴 걸 그냥 거대 지렁이라 부른다고?'

일반적인 판타지 소설이었다면, '그레이트 웜' 내지는 '자이언트 웜' 같은 명칭으로 불리고도 남았을 외형이다.

하지만 [성검의 주인]에서는 그냥 거대 지렁이 마물이라고 불렸다.

이유는 별거 없다.

성검 일행은 비록 고전하긴 했지만, 거대 지렁이 마물을 처음 맞닥뜨렸을 때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성검 일행 중, 처치한 적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취향을 가진 자는 없었다.

"주교님, 괜찮으십니까?"

세르펜스가 혼란을 틈타,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당연히 그에게 들려 있는 베일 또한 가까워졌다. 부끄러움은 가셨는지, 병사들이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어째서 그렇게 태연할 수 있느냐고 묻는 듯한 눈이다.

나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하는 것으로 그 시선에 화답해 준 뒤, 세르펜스의 물음에 대답했다.

"괜찮긴 한데···. 막내 신관님은 나서지 않을 생각입니까?"

"예.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만, 현재의 전력이라면 별문제 없이 마물을 처치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마물이 이 자리에 있다는 건, 마인도 있다는 뜻이잖습니까?"

괜히 나섰다가 공왕의 눈에 띄면 애로 사항이 생기니, 그냥 얌전히 있겠다는 선언이다.

녀석의 말대로 거대 지렁이 마물은 다굴에는 장사 없다는 명언을 몸소 증명하고 있었다.

머리와 몸통이야 칼립스 이단 심문관과 성기사들이 적극적으로 밀어붙이는 중이고.

이리저리 휘둘러지던 꼬리에도 귀족 가문의 기사들이 달라붙은 덕분에, 움직임이 상당히 둔해져 있었다.

그리고 두 명의 신관이 기사들을 신성력으로 지원해 주었다.

덧붙여, 병사들은 거대 지렁이 마물과 적당히 떨어진 곳에서 방어 대형을 갖추고 있었다. 쉽게 말해,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근무 태만을 지적할 수는 없다.

거대 지렁이 마물은 무려 100여 년이나 마핵의 기운을 흡수해 왔다.

당연히 그에 걸맞게 두텁고 질긴 피부를 자랑한다. 오러나 신성력이 깃들지 않은 평범한 무기가 파고들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무튼 지금 상황에 피해라고 할 만한 건, 베일의 구겨진 체면과 망가져 가는 바스툴 왕성의 정원뿐이다.

- 쿠르르릉!

거대 지렁이 마물이 거대한 몸체를 뒤틀자 땅이 요동쳤다.

하늘을 향해 거대한 입을 한껏 벌리는 게, 마치 괴로움에 비명이라도 지르는 모양새다. 그래봤자 발성 기관이 없어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이대로라면 [성검의 주인] 때보다 수월하게 잡겠는걸?'

상당한 강자인 칼립스 이단 심문관뿐 아니라, 성기사들과 일반 기사들까지 달라붙으니. 거대 지렁이 마수도 맥을 못 추고 빌빌거렸다.

하기야 100년 동안 마핵의 기운을 흡수했다고 한들. 지렁이라는 종족의 한계를 벗어난 무언가가 되는 건 아니니까.

거대한 덩치와 질긴 피부. 그리고 분열한다는 특성만 제외하면 두려워해야 할 적은 아니다.

그때 칼립스 이단 심문관이 긴 쇠사슬을 꺼내 드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고는 쇠사슬의 한쪽 끝을 잡은 채, 거대 지렁이 마물에 박힌 단검들을 밟으며 한 바퀴 빙 돌았다.

'뭐야, 저렇게 기다란 쇠사슬이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다양한 무기를 사용하는 만큼. '칼립스' 성을 지닌 이단 심문관에게는 특전으로 아공간 주머니라도 제공되나 보다.

그리고 쇠사슬은 대(對) 마물용으로 들고 다니는 거려나?

성기사들이 쇠사슬의 한쪽 끝을 잡아당겼다.

반대쪽 끝은 놀고 있던 병사들에게 전달되었다. 쇠사슬을 잡을 수 있는 자는 쇠사슬을. 그렇지 못한 자는 동료 병사를 붙잡았다.

거대 지렁이 마물을 한 바퀴 감은 채로 줄다리기 아닌 줄다리기가 한판 벌어졌다.

미끈한 몸이 무색하게도 거대 지렁이 마물은 쉽사리 쇠사슬을 벗어나지 못했다. 쇠사슬이 몸에 박힌 단검들에 걸린 탓이다.

수백에 달하는 장정들이 달라붙자, 거대 지렁이 마물이 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저하! 괜찮으십니까?!"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귀족들이 호위 기사와 함께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제 발로 뛰어오는 거로 보아, 거대 지렁이 마물이 쓰러지자 안전을 확신하고 내려 달라고 한 모양이다.

"크흠! 이젠 내려 주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베일도 세르펜스에게 내려 달라고 요구했다.

세르펜스는 군말 없이 베일을 내려놓았으나, 윈스톤은 꿋꿋하게 나를 들고 있었다.

내가 내려 달라고 말해 봤자 세르펜스의 허락이 없다면 내려주지 않을 게 뻔하다.

하지만 밑져야 본전이니 말이라도 꺼내 봐야겠다.

"저도 내려주세요."

"아직 안전이 확보된 건 아닙니다."

윈스톤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거대 지렁이 마물이 갓 잡은 생선처럼 몸을 펄떡였다.

그에 따라 몸통에 박혀 있던 단검들이 부러지며, 거대 지렁이가 쇠사슬을 빠져나왔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흔들린 건 덤이다.

베일은 나름 단련된 검사라고 균형을 잡긴 했으나, 우리를 향해 뛰어오던 귀족 몇이 넘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어우, 되게 아파 보이네."

"그러니 얌전히 들려 계십시오."

딱딱한 갑옷 때문에 몸이 좀 배기는 것만 제외하면 크게 불편한 것도 없으니, 나는 윈스톤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저하, 괜찮으십니까?"

우여곡절 끝에 우리가 있는 곳까지 도착한 귀족들이 다시 한번 베일의 안부를 물었다.

그들 가운데는 르웰도 있었다. 넘어져서 흙먼지를 뒤집어쓴 것 말고는 무탈해 보였다. 다행한 일이다.

"나는 괜찮네. 그대들은 괜찮은가?"

베일의 물음에 귀족들이 중구난방으로 자신의 건재함을 알렸다.

그리고 에드나를 안아 든 유지스도 우리 쪽으로 조용히 합류했다. 아까는 저런 자세가 아니었는데, 도중에 불편해서 바꿨나 보다.

"주교님은 그 자세로도 괜찮으세요? 저는 내장이 입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는데···."

에드나가 과격한 표현으로 자세를 바꾼 이유를 설명했다.

듣고 보니 윈스톤에게 들린 채로 이리저리 뛰어다닌 것치고는 몸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아마도 세니어가 걸어준 버프 덕분이겠지.

'아까 뭐하러 버프를 걸어주냐고 속으로 툴툴거렸었는데···.'

갑자기 고마운 마음이 솟구쳐 세니어의 손잡이를 매만졌다.

그때 갑자기 세니어가 신성력을 내뿜더니 결계가 만들어졌다. 세르펜스가 베일을 윈스톤에게 떠민 것도 그 순간이다.

윈스톤이 나를 들고 있기 때문일까?

세니어의 결계가 평소보다 더 넓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세르펜스가 떠민 베일까지 결계의 영향력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베일이 윈스톤의 갑옷에 코를 박으며 '악!' 하고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 콰앙!!

결계에 새카만 창이 날아와 부딪혔다.

기마용 랜스에 가까운 크기와 모양새를 갖춘 창은 신성 결계를 한바탕 뒤흔든 후,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역시 주교님이십니다. 이 짧은 순간에 왕자 저하를 노리는 흑마법을 감지하고, 신성 결계를 펼치시다니!"

잠깐 사이에 저만치 멀어졌던 세르펜스가 다시 가까이 다가오며 호들갑을 떨었다.

결계를 펼친 게 내가 아닌 세니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녀석의 목소리에 경외심이 가득 묻어나서, 순간 나도 모르게 '어, 내가 그랬나?' 하는 생각이 떠오를 정도였다.

'세르펜스는 흑마법이 베일을 노렸다고 말했지만···.'

창의 크기로 봤을 때, 나와 베일을 함께 노렸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룩스메아 교단의 주교와 베일이 바짝 붙어있는 데다가, 성기사로 위장한 윈스톤은 나를 들고 있느라 한쪽 팔을 쓸 수 없으니.

이게 웬 떡인가 싶었겠지.

"이런! 성기사에게 들려 다니며 보호받길래, 별 볼 일 없는 놈인 줄 알았더니···. 주교는 주교다, 이건가?"

쯧쯧 혀 차는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올려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쳐다보자,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흑마법사가 공중에 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유지스가 품에 든 에드나를 보호하듯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에드나를 양손으로 안고 있어서, 활을 쏠 수 없다는 간접적인 의사 표현이다.

"그나저나 바스툴 왕국도 참 안됐어. 왕을 비롯한 왕실은 우리에게 이용당하는 신세고, 그나마 왕실에 반기를 든 2왕자는 신성 루멘 제국에 나라를 팔아먹으려 하다니!"

흑마법사가 허공에 마법진을 그려내며 느릿한 말투로 헛소리를 떠들어댔다.

묘하게 소름 돋는 목소리가 신경에 거슬렸다.

'그보다 비행 마법을 사용한 상태로 마법진을 또 만든다는 건···.'

더블 캐스팅이 가능한 실력자라는 뜻이다.

나는 거대 지렁이 마물 쪽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칼립스 이단 심문관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성기사들도 마물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내가 제국에 나라를 팔아먹으려 한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킬킬킬킬! 나라뿐 아니라 양심까지 팔아먹었구나!"

아, 기억났다.

저 기분 나쁜 웃음소리는 분명, 은퇴한 사용인들이 대거 납치당했을 때 나타났던 흑마법사의 것이다.

'···잠깐만? 아까 날 보고 주교는 주교라고 그러지 않았나? 설마 나를 못 알아본 거야?'

그 당시 곁에 있던 세르펜스와 유지스의 미모 때문에 묻힌 걸 수도 있고, 시온의 얼굴이 워낙 무난해서 인상에 남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변장이 아니었다면 분명 알아봤을 테지. 역시나 얼굴에 점을 두 개나 찍은 보람이 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조용히 있자. 목소리와 말투 때문에 들킬지도 몰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실수로라도 말을 하지 않도록 이를 악물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