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542화 (542/925)

542회

69. 공작님과 패륜 왕 (7)

"그런 어쭙잖은 이간질로 사람들을 현혹하려 해도 소용없다!"

베일이 흑마법사 악숭이. 즉, 법숭이를 향해 기세 좋게 소리쳤다.

그 당당한 모습과 달리 코맹맹이 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저 법숭이의 목소리를 어디서 들었는지 떠올리느라, 미처 눈치채지 못했는데···.'

아까 법숭이에게 따질 때도 저런 코맹맹이 소리를 냈던 것 같다.

나는 베일이 대체 왜 저러나 싶어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한 손으로 코를 틀어막고 있었다. 건틀렛을 착용한 손가락 사이로 붉은 피가 언뜻 보였다.

아무래도 윈스톤과 부딪힌 탓에 코피가 터진 모양이다.

'세르펜스가 잘못···한 건가?'

머릿속에서 '그래도 베일을 보호하려고 한 거니까 봐주자.'라는 의견과 '세르펜스라면 베일을 들고 피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잘못한 게 맞다.'라는 의견이 충돌했다.

그렇게 내가 세르펜스를 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동안.

"설마 저 흑마법사는 룩스메아 교단이 저하를 돕는다고 생각해서, 저런 어처구니없는 오해를 한 건가?"

"그러게 말일세. 교단이 베일 저하의 협조를 받는 건데 말이야."

"더군다나 신성 루멘 제국이 아무리 교단의 교리를 따르고 있다지만, 황권과 신권(神權)은 명확히 구분되어 있거늘···."

귀족들은 쑥덕거리며 법숭이의 멍청함을 비난했다.

이간질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듯해서 다행스럽긴 한데, 저들이 대체 뭘 믿고 법숭이의 면전에서 저런 소리를 떠들 수 있는 건지 의문이다.

평범한 대륙인들에게 법숭이는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나?

"그런데 주교님, 결계 범위를 조금만 넓혀 주시면 안 될까요?"

귀족 중 한 명이 세니어의 신성 결계에 똑똑 노크를 하며 말했다.

그들의 믿는 구석이 바로 나였던 모양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세니어의 손잡이를 매만지며, 속으로 '세니어 님! 부디 결계를 넓혀 저들까지 보호해 주세요!' 하고 빌어 보았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예상했던 일이다.

'변명을 하긴 해야 하는데···.'

괜히 목소리를 냈다가, 법숭이에게 정체를 들킬까 봐 걱정스럽다.

그렇게 이도 저도 못하고 고민에 빠져 있는데, 이런 나를 구제해 준 건 뜻밖에도 법숭이였다.

"낄낄낄낄, 그렇게 믿고 싶을 만도 하지···."

법숭이가 꼴에 너그러운 말투를 썼다. 제 딴에는 '나는 너희를 이해한다.'라는 의사를 전달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한다.

그래 봤자 낄낄거리는 기괴한 웃음소리 때문에 거부감만 들었지만.

어쨌거나 말투에는 여유로움이 넘쳤고, 아무런 근거 없이 이간질을 시도한 게 아니라는 느낌을 풍기기에는 충분했다.

'쟤네는 할 수 있는 게 이간질뿐인가?'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법숭이에게 '마왕 이간질리오'의 안부를 묻고 싶었으나, 목소리를 내면 안 되는 처지이기에 꾹 참았다.

저러지 말고 룩스메아 교단처럼 봉사라도 하고 다니면 이미지 세탁에 도움이 될 텐데.

겸사겸사 사람 목숨을 제물로 내놓는 짓도 그만두고, 사람들의 고통을 보며 즐거움을 느끼는 악마들과도 연을 끊는다면 금상첨화다.

'아, 그렇게 되면 더는 악숭이라 부를 수 없겠구나.'

아무튼 이간질리오의 숭배자는 귀족들의 못 미덥다는 시선에도 기죽지 않고, 스태프를 높이 치켜들었다.

"하지만 과연 네놈들이 이것을 보고도 그리 말할 수 있을까?!"

느릿하게 그려지던 마법진이 완성되었다.

대체 무슨 마법일까 긴장하는 순간. 거센 돌풍이 몰아쳤다.

유지스가 잽싸게 몸을 돌려 바람을 등지며, 후드가 벗겨지는 것을 방지했다. 그것만으로는 영 불안해 보였는지 에드나가 유지스의 후드를 붙잡아 주었다.

"자! 저쪽을 보아라! 제국의 프라시더스 공작이 반역을 돕는 것만큼, 2왕자가 제국에 나라를 팔았다는 명확한 증거가 어디 있겠는가!"

이간질리오의 숭배자가 스태프로 가리킨 곳에는 칼립스 이단 심문관이 서 있었다.

후드가 벗겨져 드러난 칼립스 이단 심문관의 얼굴에는 황당함이 가득했다.

"내 비록 프라시더스 공작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소문과 완전 딴판인데···?"

"저 얼굴이 그 천사 같은 얼굴로 유명한 프라시더스 공작이라고? 말도 안 돼, 인정할 수 없어! 내 상상 속의 프라시더스 공작은 저렇게 생기지 않았다고!"

"머리카락 색이야 염색을 통해 바꿀 수 있다지만, 얼굴은···."

"나는 얼마 전에 프라시더스 공작의 초상화를 구매해서 정확히 알고 있네! 초상화 속 얼굴은 저 이단 심문관의 얼굴과 비교도 안 되게 잘생겼네!"

"프라시더스 공작은 분명 20대 중반일 텐데, 저 얼굴은 아무리 젊게 봐도 30대 중반 아닌가···?"

귀족들이 칼립스 이단 심문관의 얼굴을 보며 한마디씩 내뱉었다.

칼립스 이단 심문관 정도면 그런대로 준수한 얼굴인데 다들 너무하다. 그러는 자기들은 얼마나 잘생겼다고.

'게다가 그 초상화 짝퉁이잖아! 내가 봤어! 완전 엉망이라고! 진짜 세르펜스는 그렇게 안 생겼단 말이야!'

별안간 외모 지적을 받은 칼립스 이단 심문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 이상하다? 프라시더스 공작은 저렇게 안 생겼는데···? 하지만 저 무력은···. 아, 아닌가? 진짜 프라시더스 공작은 더 강한···가?"

법숭이도 차마 칼립스 이단 심문관을 세르펜스라 우기지 못하고, 얼떨떨하다는 목소리를 흘렸다.

검을 휘두르는 틈틈이 단검을 던져대는 칼립스 이단 심문관의 모습 때문에, 세르펜스라고 착각한 모양이다.

대외펜스라면 하지 않는 행동이지만, [성검의 주인] 속 타락펜스는 암기를 쓰는 데 주저함이 없었으니까.

마왕이 악숭이들에게 세르펜스와 싸울 땐 비어있는 손을 조심하라고 경고하고도 남는다.

'볼타 산맥의 악마가 암기에 당해 추락한 사고가 있었으니만큼, 강조하고 또 강조했겠지.'

게다가 칼립스 이단 심문관이 긴 쇠사슬을 꺼내기까지 했으니.

성검 일행이 아공간 주머니를 지녔다는 걸 아는 마왕이라면, 현재의 세르펜스에게도 아공간 주머니가 있다는 걸 확신했을 거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 봤을 때.

법숭이가 칼립스 이단 심문관을 세르펜스라 착각한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저는 '프라시더스 공작'이 아닙니다."

칼립스 이단 심문관이 거대 지렁이 마물의 아가리에 창을 박아 넣으며 말했다.

그 창에는 은빛의 신성력이 넘실대고 있었다. 저 신성력의 색 또한, 법숭이가 착각하게 된 원인 중 하나이리라.

칼립스 이단 심문관은 마물의 입천장에 박힌 창을 손에서 놓고, 백 텀블링이라도 하듯이 몸을 뒤로 날렸다.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지렁이 때문에 땅이 흔들렸음에도, 칼립스 이단 심문관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무사히 착지했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자면, 제 나이는 올해 마흔둘입니다. 젊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칼립스 이단 심문관이 다시 검을 빼 들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귀족들의 외모 지적이 마음에 걸렸나 보다.

'그나저나 저 얼굴로 마흔둘이라니···.'

에일리히도 그렇고, 신성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노화가 천천히 오는 게 확실해지는 순간이다.

"러스티, 그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게 아니었어···! 뭐? 이번 반역의 배후에는 프라시더스 공작이 있는 게 틀림없어? 그래서 세라투 가문을 타락시키는 데 실패한 거라고? 제 능력이 부족한 걸 변명하자고,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다니! 마왕님을 향한 충성심도 없는 주제에, 마인이 되었다고 설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법숭이가 이를 으득으득 갈아댔다. 얼마나 분노했는지, 스태프를 쥔 손까지 부들부들 떨렸다.

자신이 멍청해서 엉뚱한 칼립스 이단 심문관을 세르펜스라 착각한 주제에.

공왕이 떠먹여 준 것도 못 받아먹고, 남 탓만 해대는 모습이 참으로 한심하다.

"이간질을 하려면 똑바로 해라! 이래서야 어디 속아주겠냐?!"

"악마 숭배자가 하는 짓이 다 그렇지."

"푸훗-!"

귀족들이 법숭이를 마구 비웃어댔다.

저러다 법숭이가 흑마법을 난사해대면 대체 어쩌려고 저러는지 모르겠다.

'내가 악숭이를 도발할 때, 세르펜스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래도 난 세르펜스를 믿고 설친 건데···.'

베일도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는지, 나를 힐끔거렸다.

그렇게 쳐다봐도 세니어의 능력은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결계가 발동되기 전에 다 같이 얼싸안고 있었다면 어떻게든 되지 않았을까?'

잠깐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결계가 커진다면 세니어에 저장된 신성력 소모량도 늘어날 테고, 결계의 내구성도 크게 하락할 게 뻔했다.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길길이 날뛰는 법숭이 등 뒤로, 예리하게 벼려진 은빛 신성력이 반짝였다.

법숭이가 분노로 이성이 마비된 틈을 타, 칼립스 이단 심문관이 기습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도움닫기를 통해 높이 뛰어올라 신성력 가득한 검을 휘두르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악숭이가 나타나면 알아서 처치해 준다며, 호언장담하더니!'

칼립스 이단 심문관은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뒤늦게 법숭이가 반응하며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마법사의 반응 속도로 칼립스 이단 심문관의 공격을 피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커, 헉···! 러스티이이···!!! 네가 모든 걸 망쳤, 구나···."

법숭이가 죽어가는 그 순간에도 공왕에게 모든 잘못을 떠넘겼다.

방심한 자신은 잘못이 없고, 거대 지렁이 마물로 칼립스 이단 심문관을 묶어놓지 못한 공왕이 잘못했다.

대충 그런 논리가 아닐까 한다.

- 쿠르르르릉···!

그때 갑자기 거대 지렁이 마물이 땅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성기사와 일반 기사들이 막타를 노리고 전력을 쏟아부었지만, 지렁이 마물은 검은 진액을 흘리면서도 땅을 파고 들어가길 멈추지 않았다.

"이런!"

칼립스 이단 심문관이 서둘러 거대 지렁이 마물이 파고든 땅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거대 지렁이 마물의 분변토로 이미 구멍이 메꿔진 후였기에, 애꿎은 땅만 파헤친 꼴이 되었다.

"······."

"······."

거대 지렁이 마물이 언제 어디에서 튀어나올지 모른다.

그런 염려 속에 모두가 숨을 죽이고 주변을 경계했다.

"으아악! 저게 뭐야!"

"거대 지렁이다!!"

세니어의 버프로 한껏 예민해진 청각을 통해, 성벽 너머의 비명이 들려왔다.

거대 지렁이 마물의 목표가 성 밖에서 대기 중인 병사들로 바뀐 거다.

나는 속으로 아뿔싸 하고 탄식했다.

정황상 커다란 덩치와 질긴 생명력이 전부인 거대 지렁이 마물이 등장한 건, 정체를 숨긴 세르펜스를 끌어내기 위함일 거다.

'계획이 엎어진 데다가 흑마법사도 죽었으니, 지렁이 마물이 일방적으로 몰매 맞는 걸 내버려 둘 리가 없는데!'

아무 성과도 없이 연달아 계획이 실패했으니.

공왕이 성과를 내기 위해, 거대 지렁이 마물로 하여금 병사들을 공격하라 명할 것을 예상했어야 했다.

'지렁이 마물이 많이 다친 데다가, 밖에는 성검 일행도 있긴 하지만···.'

성검 일행은 고작 네 명뿐이다. 거대 지렁이 마물이 날뛰지 못하게 묶어 두기에는 역부족이다.

귀족들이 데려온 기사 중 밖에 남아있는 자의 수가 얼마나 될까, 머리를 열심히 굴리는 그때.

갑자기 성벽 너머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그리고···.

"으아악, 이게 뭐야!!"

적막을 뚫고 휴마누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채 파악하기도 전에, '와아아! 성검의 주인 만세!' 하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마물의 기척이 사라졌습니다."

한참이나 거대 지렁이 마물과 치고받고 싸웠던, 칼립스 이단 심문관이 허망하다는 듯 말했다.

대체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하나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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