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544화 (544/925)

544회

69. 공작님과 패륜 왕 (9)

시녀는 눈물을 훔쳐내며 불쌍한 척을 했지만, 베일은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그는 기습을 당하더라도 피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를 두고 또다시 질문을 던졌다.

"사람들이 끌려간 건 언제인가?"

"어제저녁 즈음인데···, 흐윽! 저하께서 수도에 도착하셨다는 소식이 퍼지고, 다들 동요하니까···."

시녀가 우물쭈물하며 베일의 눈치를 살폈다.

상황 파악을 우선시하느라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지. 아니면 자신을 의심하고 있는 건지. 헷갈린다는 표정이다.

베일은 왕성에서 도망쳐 나올 때. 시종의 거짓말에 속아서 안 해도 될 생고생을 다 하고 다녔다.

'그랬던 베일이 지금은 불쌍한 약자인 척하는 시녀를 의심하며 떠보기까지 하다니!'

순진하디 순진했던 왕자님의 변화가 놀랍기까지 하다.

베일은 이제 왕이 되어 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 그러니 동정심에 휘둘리지 않고 냉정한 판단을 내리는 건 좋은 변화다.

그 성장이 기특하게 느껴지는 한편. 안타까웠다.

현 바스툴 국왕이 비겁하고 이기적인 자만 아니었어도. 그리고 악숭이들이 난동을 부리지 않는 평화로운 시기였다면.

베일은 이런 고난을 겪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상처 없이 성장할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저 정도면 아직 순박하다고 생각해도 되는 수준이려나?'

세르펜스였다면 베일처럼 티 나게 행동하지 않았을 거다.

너무나도 미안한 나머지, 가까이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죄스럽다는 듯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겠지.

그리고 끌려간 사람들이 아직 살아있을 거라 희망하며. 그들을 구하고 싶으니 제발 협조해 달라며 절박하게 말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베일이 그런 고도의 연기를 펼칠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자신을 바라보는 베일의 눈빛 속에서 의심을 읽어낸 걸까?

시녀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더니, 돌연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기습을 할 생각인가?'

그래봤자 베일과 시녀 사이에는 충분한 거리가 확보된 상황이다. 기습 따위에 당할 리가 없다.

세르펜스가 베일의 앞을 막아섰고, 기사들이 시녀를 향해 달려드는 그 순간.

"마왕님께서 세상을 지배하는 그날, 너희는 오늘 일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시녀가 저주의 말을 외치며, 품에서 꺼낸 무언가를 자신의 몸에 꽂아 넣었다.

그러고는 교단의 성직자들이 무언가 조치를 하기도 전에 절명했다.

보랏빛으로 물든 피부가 딱 봐도 극독에 당했음을 알 수 있었다.

"심문을 당할 것이 두려워, 자결한 듯합니다."

그 정도는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건만.

칼립스 이단 심문관은 굳이 설명하며, 앞으로 고꾸라진 시녀의 시체를 뒤집었다.

복부를 파고든 단검 주변으로 검붉은 피가 번져 나가며, 하얀 앞치마를 물들였다.

보라색으로 질린 얼굴에는 검은 실핏줄이 선명하게 도드라졌고, 눈동자는 뒤로 까뒤집힌 채였다.

호러 영화 속 귀신이나 좀비를 연상케 하는 그 모습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오늘 밤, 잠 다 잤네.'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귀족들은 저 광경을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지, 베일에게 괜찮냐며 물어보기에 바빴다.

정작 시녀는 베일의 근처에 다가가지도 못했는데 말이다. 그냥 자신의 충심을 어필하려는 걸 테지.

"걱정하지 말게나. 나는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으니. 그보다 문제는 저자가 말한 내용일세."

베일이 귀족들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사람들을 끌고 가기 시작한 시간대는 굳이 속일 필요가 없다지만. 그들을 끌고 간 장소는 거짓말일 가능성이 크다.

알현실은 함정이니 가면 안 된다. 그래도 가 봐야 한다.

두 개의 의견이 귀족들 입에 오르내렸다.

"아마도 현 왕은 알현실에 있을 것이네. 그러니 함정일지라도, 나는 그곳으로 가야만 하네."

베일의 말에 모두가 침묵했다.

상황을 모르고 들으면 왕을 구하러 가자는 뜻으로 착각할 만큼. 결의에 찬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건, 반드시 제 손으로 왕을 죽이겠다는 의지다.

"현 왕은 너무 많은 죄를 저질렀네. 그리고 그 죄 하나하나가 터무니없이 무거워서, 죄 없는 백성들이 고통받았고···. 이제는 수많은 이들이 희생되었네. 나는 그들에게 사죄해야만 하네. 그리고 '부왕'이 저질렀던 잘못들을 책임져야만 해. 현 바스툴 국왕. 그자를 내 손으로 죽이는 건, 그 첫걸음일세."

베일이 참담한 현실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 모습이 마치 맹세라도 하는 듯하다.

알현실은 함정이니 가면 안 된다고 주장하던 귀족 중, 그 누구도 반대 의견을 꺼내지 않았다.

목적지도 정해졌으니 이제 다시 나아갈 차례다.

나는 걸음을 옮기며, 베일이 방금 한 말을 되새겼다.

'그나저나 베일이 현 바스툴 국왕을 부왕이라 칭한 건 처음 있는 일인데···.'

현 왕을 적으로 돌리긴 했지만, 그가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까지 부정한 건 아닌 모양이다.

베일은 자신이 나아가기 위해. 많은 이들을 구하고자. 죄책감을 떨쳐내려, 당당하게 검을 들었다.

현실로부터 도피하며 스스로를 합리화한 끝에.

전대 프라시더스 공작 부부를 살해하고, 죄악감에 시달렸던 세르펜스와는 다르다.

'그 시절의 세르펜스에게도 저런 용기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알현실까지 가는 길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시녀와 함께 등장한 근위병은 미끼에 불과했다는 듯. 이제는 근위병뿐 아니라 근위기사들까지 나타나 베일의 앞길을 막아섰다.

앞서 근위병들을 마주했을 땐 슬픈 기색을 띠었던 베일의 얼굴이. 이번에는 온전한 분노로 물들었다.

"오랜만입니다, 저하. 살아 계셨군요."

"그날 나를 살리기 위해 죽어간 기사들 때문에라도···. 나는 죽을 수 없네."

베일이 이를 악물었다.

왕성에서 도망쳐 나오던 날. 그를 지키려던 기사들을 죽인 게, 눈앞의 근위기사들인가 보다.

"용서는 빌지 않겠습니다."

"용서해 줄 생각도 없네."

"···그럴 것 같았습니다."

대답한 근위기사가 베일을 향해 달려들며 검을 휘둘렀다. 베일도 앞으로 달려나가며 검을 들어 올렸다.

오러가 깃든 검과 검이 맞부딪히며 '챙-!' 하고 맑은소리가 울려 퍼졌고.

이내 난전이 시작됐다.

'여차하면 세르펜스가 구해 주긴 하겠지만···. 근위기사면 실력이 상당할 텐데, 베일이 상대할 수 있으려나?'

그런 내 걱정이 무색하게도.

베일은 근위기사와 거의 대등하게 검을 겨뤘다. 상대의 검을 막아내며, 틈틈이 반격까지 해내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감탄해 버렸다.

"왕자 저하 실력이 제법이네? 어느 정도 실력이 있을 거라 생각은 했는데, 그게 전문 기사와 맞먹을 정도인 줄이야···."

"좀 더 자세히 보십시오. 저건 상대가 봐주고 있는 겁니다."

윈스톤이 내 혼잣말에 끼어들었다.

어쩐지 '주군께 검을 배웠으면서, 그 정도도 못 알아보는 거요?' 하고 혼내는 것처럼 들렸다.

"에인젤 주교님께서는 검사가 아니시니,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최근 주교님께서는 호신을 위해 검술을 시작하셨습니다."

칼립스 이단 심문관이 내 편을 들어주려 하자, 윈스톤이 내 허리춤에 매달린 세니어를 가리켰다.

그제야 세니어를 발견한 것인지, 칼립스 이단 심문관이 '오오!' 하고 감탄사를 터트렸다.

"과연! 이것 덕분에···."

법숭이가 등장했을 때. 내가 결계를 만들어 낸 것처럼 보일 수 있었던 게, 세니어 덕분이라는 걸 알아챘나 보다.

칼립스 이단 심문관은 혼자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런 검이 생겼다면, 검술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도 합니다. 나중에 여유가 된다면 제가 대련이라도 하며 검술을 봐 드리고 싶습니다."

검술을 봐주고 싶은 게 아니라, 검을 자세히 보고 싶은 거겠지.

평상시라면 제작자인 크레아토가 얼마나 뛰어난 안목을 가진 드워프 장인인지 설명하며, 세니어의 아름다운 디자인을 찬송했을 거다.

그리고 신성석을 만들어낸 세르펜스의 기특한 마음씨도 칭찬해 주었겠지.

하지만 지금 그런 짓을 한다면, 이 자리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이들에게 실례다.

나는 칼립스 이단 심문관이 세니어를 자세히 보지 못하도록 등 뒤로 숨겼다.

칼립스 이단 심문관이 아차 싶은 표정을 지으며, 눈앞에서 벌어지는 전투로 시선을 옮겼다.

이단 심문관의 정신까지 쏙 빼놓다니. 역시 세니어가 대단하긴 대단한가 보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베일과 이름 모를 근위기사의 결투는 끝나지 않았다.

윈스톤의 조언에 따라, 눈살을 좁혀가며 근위기사의 움직임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도무지 봐주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이를 악문 채, 분노로 얼굴을 붉히며 검을 휘두르는 베일의 표정을 보면···.'

근위기사의 실력이 우세하다는 것쯤은 때려 맞출 수 있었다.

그런데도 승패가 갈리지 않는다는 건, 윈스톤의 말대로 근위기사가 베일을 봐주고 있기 때문이겠지.

"어째서 내가 수도에 도착하기 전에 도망치지 않았는가!"

"도망가려던 이들은 전부 땅속에서 튀어나온 마물에게 잡아먹혔습니다. 그리고 전하의 명을 거스른 자는···."

근위기사가 말끝을 흐리며, 이전보다 더 거세게 검을 휘둘렀다.

- 카앙!!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베일이 두어 발짝 뒤로 밀려났다.

그 모습을 보니 근위기사가 베일을 봐주고 있었다는 게 실감이 났다.

직접 검을 맞댄 베일은 나보다 더 뼈저리게 그 실력 차를 느꼈을 텐데도, 다시 근위기사에게 달려들길 주저하지 않았다.

근위기사는 생략된 뒷말을 잇지 않았다.

결투의 승자는 베일이었다.

베일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근위기사의 목에 찔러 넣은 검을 뽑았다.

그때쯤 전투도 마무리되었다.

쉴 틈도 없이 베일과 혁명군은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알현실에 도착했다. 문은 굳게 닫힌 채였다.

- 쾅!

혹시 모를 함정을 대비한 것일까?

어느 가문 소속인지 모를 기사 한 명이 앞으로 나서서 문을 걷어찼다.

기사는 왕자 앞에서 왕의 알현실 문을 걷어차 봤다는 위대한 업적을 세우자마자, 곧장 전투태세를 갖추며 열린 문 너머를 노려보았다.

"······."

놀랍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흑마법은커녕 화살조차 날아오지 않자, 문을 연 기사는 머쓱해졌는지 슬금슬금 물러나 다른 기사들 틈으로 섞여 들어갔다.

베일은 그런 기사에게 눈길도 주지 않으며 알현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도 그를 따라 알현실 안으로 들어가, 내부를 둘러보았다.

왕좌까지 이어져 있어야 할 붉은 융단은 아무렇게나 구겨져서 구석에 처박혀 있었고, 바닥에는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무슨 용도의 마법진인지는 모르겠지만, 빛이 나지 않는 거로 보아 비활성 상태인 듯하다.

그리고 왕좌에는 현 바스툴 국왕으로 추정되는 자가 앉아 있었다.

성격은 얼굴에 고스란히 반영된다더니. 베일과 닮은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야비해 보이는 인상이다.

현 왕은 불안한 표정으로 왕좌의 손잡이를 매만지며, 눈동자를 굴려 어딘가를 쳐다보았다.

그 시선이 향한 곳에는 한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승마복처럼 보이는 검은색 옷을 입고 웨이브 진 붉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창문에 걸터앉아 우리를 바라보았다.

하얀색이어야 할 흰자위가 검게 변한 탓에, 붉은 눈동자가 더욱 새빨갛고 섬뜩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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