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6회
69. 공작님과 패륜 왕 (11)
다행히도 공왕은 나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끔찍한 일을 저지른 아비가 부끄러워, 영영 고개를 들지 못할 줄 알았거늘. 생각보다 회복이 빠르구나. 아니지···. 낯짝이 두껍다고 해야 하나?"
공왕은 오만한 시선으로 베일을 바라보며 짙은 미소를 지었다.
자신을 조롱하는 게 명백한 공왕의 태도에도 베일은 이성을 잃지 않았다. 되려 차분한 표정으로 주먹을 꽉 움켜쥐며 입을 열었다.
"부왕이 추악하고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네. 다만 스스로 노예를 자청할 정도일 줄은 몰랐기에, 놀라서 잠시 할 말을 잃었을 뿐이네. 왕족으로서 긍지도 자존심도 없는 자가 그동안 왕위를 차지하고 있었다니···."
베일의 시선이 현 바스툴 왕에게로 향했다. 몹시나 한심하다는 눈빛이다.
그에 현 바스툴 왕의 표정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자신이 저지른 죄는 부끄럽지 않아도, 자신이 버린 아들에게 무시당하는 건 부끄러웠던 걸까?
"네가 감히 짐을 모욕하는 것이냐?!"
현 바스툴 왕이 베일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땐 이미 베일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한 뒤였다.
"부왕의 피를 이었다고 해서, 내가 그자와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내가 그 죄의 무게에 짓눌려 고개를 처박고 아무것도 못 하는 인간이었다면, 나는 애초에 이 자리에 와 있지도 않았겠지."
베일의 말에 공왕은 흐응 콧소리를 흘리며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 행동이 마치 '요것 봐라?'라고 말하는 듯 보였다.
그러고는 고민스럽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턱을 매만졌다.
"이것 참 곤란하게 됐구나. 이 자리에서 너를 당장 죽여 없애야 할 것 같은데, 그러자니 내 목숨이 더 위험해질 것 같고···."
"그게 무슨 소리인가! 악마를 소환하면 다 해결될 거라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사람들에게 작은 희망을 보여준 뒤, 그 불씨를 꺼트리는 것도 괜찮을 것 같구나."
공왕이 현 바스툴 왕의 외침을 한 귀로 흘리며 이어 말했다.
혹시 현 바스툴 왕의 목소리는 내 귀에만 들리는 게 아닐까? 순간 그런 의심이 들 정도로 깔끔한 개무시였다.
"가,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장난치지 말고 어서 악마를 불러다오!"
현 바스툴 왕이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어쩐지 말투가 조금 공손해진 것 같다.
공왕은 그런 현 바스툴 왕을 오시하며 삐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짐이 그동안 널 무시한 건 사과하마. 그러니 마음을 바꾸고, 어서 악마를 소환해 주게나."
"별로 진심이 담긴 것 같진 않은데?"
"그렇게 따지자면 너도 방금 나를 모욕하지 않았나! 짐이 그간 잘못한 것도 있고, 앞으로 함께 할 동료라 생각해서 인내해 주었거늘! 이렇게 배신하는 게 어딨는가!"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현 바스툴 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와중에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알고, 아량을 베푸는 척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같잖아 보였다.
공왕도 그렇게 느꼈는지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하하! 인내? 지금 인내라고 하였느냐? 우습구나, 참으로 우스워! 내가 악마를 소환해 주지 않는다면, 이 자리에서 죽게 생겼으니까. 어쩔 수 없이 모욕을 견뎠던 것 아니더냐? 네놈의 폭정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참고 또 참았듯이 말이다."
"러스티, 네 이년! 짐이 악마와 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하면, 곤란한 건 너 또한 마찬가지일 텐데?"
"네가 악마와 계약하지 않으면 내가 곤란해진다? 실로 놀랍구나. 어떠한 과정을 거치면 그러한 결론이 나올 수 있는 것이더냐?"
공왕이 놀란 눈을 하며 현 바스툴 왕을 쳐다봤다.
마인이 된 공왕의 말에 편들면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지만, 동감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이다.
"짐보다 먼저 마인이 됐다고 아주 기고만장하는구나! 그래봤자 짐이 악마와 계약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네가 맡은 일이지 않은가! 자격지심 때문에 일을 그르치지 말아라! 네가 짐보다 우위에 서고 싶은 그 심정은 안다. 하지만 이렇게 시간을 끌다가, 성검의 주인까지 성에 들이닥친다면 어쩌려고 이러는 것인가?"
현 바스툴 왕이 훈계조로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저딴 소리를 지껄이는 건지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설마하니 악숭 세력의 인력난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걸까?
'그래도 현 바스툴 왕은 줘도 안 가질 것 같은데? 나라 하나를 통째로 먹는 거라면 모를까···.'
나라도, 군대도 없는.
일개 개인으로서의 현 바스툴 왕은 악숭 세력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다.
악마와 계약을 시켜 줄 테니 제물을 바치란 이야기도 전부 거짓일 거다.
'그 증거로 이 자리에는 흑마법사가 없잖아?'
공왕은 악마와 계약한 마인일 뿐이다. 그러니 악마를 소환해 내는 건 불가능하다.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이 악마 소환진일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99.9%의 확률로 혈옥 제작을 위한 마법진일 게 분명하다.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아무래도 내가 오해하게 만든 것 같구나. 나는 악마를 소환하려면 제물이 필요하다고 말했을 뿐, 계약하려면 악마를 소환해야 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는데."
공왕이 짐짓 안타깝다는 듯 눈썹을 팔(八)자로 휘면서 말했다. 그래 봤자 입은 활짝 웃고 있었지만.
공왕의 말대로, 악마와 계약해서 그 힘을 빌려오는 것뿐이라면 굳이 악마를 대륙에 소환할 필요가 없다.
그냥 흑마법사가 중개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좀 더 시간이 흘러 마계가 가까워지면 흑마법사의 중개마저도 필요 없다.
정신에 틈이 있다면, 마계에 있는 악마가 직접 말을 거는 것도 가능해지니까.
악마를 소환하거나 계약하는 방법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여기까지는 그러려니 치자. 현 바스툴 왕이 착각할 만했다.
하지만 한 가지. 그가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위험하게 계약을 왜 여기서 하겠어? 어디 안전한 곳에 가서 조용히 해결해야지.'
즉, 현 바스툴 왕은 헛짓거리를 한 거다.
"그, 그게 무슨 말인가?!"
명확한 답이 나왔음에도 현 바스툴 왕은 현실을 외면하며, 확인사살 당하길 자처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공왕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더욱더 짙어졌다.
"네놈의 영혼은 가치가 없으니, 다른 제물을 추가로 바쳐야 악마도 계약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텐데. 그러자니 네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서, 제물만 낭비될 뿐이지 않으냐?"
"그 말은···!"
"왕성에서 일하던 사람들과 네 가족들은 훨씬 더 효율적으로 사용해 줄 테니, 안심하거라."
"러스티이─!!"
생긋 웃으며 말하는 공왕의 행동에 현 바스툴 왕이 격노하여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마인은 두려움의 대상인 까닭일까? 현 바스툴 왕은 분노로 부들부들 떨면서도 공왕에게 달려들지 못했다.
공왕의 높다란 웃음소리가 알현실 내부에 울려 퍼졌다.
"제발, 제발 짐을 살려주게나. 그러려고 아직 이곳에 남아있는 것 아닌가?"
현 바스툴 왕은 결국 마지막 남은 자존심까지 내버렸다.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분노를 꾹꾹 억누르며, 자신을 속인 공왕에게 애원했다.
"착각이 심하구나? 나는 그저 에인젤 주교···, 풋! 저 사람을 직접 만나보고 싶었을 뿐. 너 따위를 살리기 위해 남은 게 아니야."
공왕이 내 정체를 알고 있다는 걸 티 내며 말했다.
알면 아는 거지, 왜 비웃고 난리인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나를 보고 싶었던 것뿐이라면, 정체를 까발릴 생각은 없···다고 봐도 되는 건가?'
추측하건대.
이곳 어딘가에 숨어있을 세르펜스가 자신을 공격한다면, 우리의 정체를 이곳에 모인 귀족들에게 알리겠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면 너희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조용히 물러나겠다.
대충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닐까 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휴마누스와 함께 왕성으로 들어올 걸···. 아니다, 그랬으면 될 대로 되라며 나와 세르펜스의 정체를 까발렸으려나?'
나도 모르게 잇새로 끄응 하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공왕의 시선이 내 쪽을 향했다.
"신 룩스메아를 배신하고, 마왕님의 편에 설 생각은 없는 것이냐?"
"사이비 종교 권유는 사양입니다. 안 믿고, 안 사고, 치성 같은 것도 안 올려요. 그럴 돈과 시간이 있으면 맛있는 케이크를 사서 신 룩스메아께 기도를 올린 후, 막내 신관님과 티타임을 즐길 겁니다."
"무언가를 팔 생각은 없으니 안심하거라."
공왕이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살던 세상의 사이비들과는 다르게, 악숭 세력에서는 부적 같은 건 억지로 팔지 않는가 보다.
비슷한 종이 쪼가리로 된 스크롤이 있으니 팔지 않을까 했는데.
앞으로 사이비 거절 멘트에서 안 산다는 말은 빼야겠다.
"러스티, 부디 짐을 살려다오···, 제발···! 원한다면 무릎까지 꿇으마!"
현 바스툴 왕은 아직도 애걸복걸하고 있었다.
공왕이 하찮은 것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현 바스툴 왕을 쳐다보는 그 순간.
- 탓!
가볍게 발 구르는 소리와 함께 새하얀 무언가가 휙 하고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 정체는 새하얀 옷을 입은 칼립스 이단 심문관이다.
칼립스 이단 심문관은 공왕을 향해 달려나가는 동시에 단검을 쏘아내듯 던졌다.
"이런!"
공왕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뒤로 젖혔다. 그리고 그대로 창문 너머로 떨어져 버렸다.
목표물이 사라지자, 칼립스 이단 심문관이 던진 단검은 허망하게 허공을 가르며 저 멀리 점이 되어 사라졌다.
"작별 인사는 제대로 해 두고 싶었는데, 아쉽게 되었구나! 그럼 나중에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도록 하지."
그대로 추락한 줄 알았던 공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대한 무언가가 창문 바로 앞을 휙 하고 지나간 것도 그때였다.
'역시나 도망칠 수단을 준비해 뒀을 줄 알았어.'
처음부터 자신의 목숨이 위험해진다면 창문에 몸을 던져, 밑에서 대기하던 비행형 마물을 타고 달아날 작정이었던 게 분명하다.
칼립스 이단 심문관은 이를 예상했다는 듯. 창문 너머로 몸을 반쯤 내민 채, 어느새 꺼내든 석궁으로 화살을 쏘아댔다.
퉁, 퉁, 퉁. 묵직한 소리를 내며 날아간 화살은 총 열 발이었다.
사람을 태울 정도로 큰 마물이니, 추락했다면 큰 소리가 났을 텐데.
세니어의 버프로 청각이 향상되었음에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유감스러운 일이다.
"기껏 주교님께서 방심을 유도해 주셨는데···. 면목이 없습니다."
칼립스 이단 심문관이 창밖으로 내밀었던 몸을 되돌리며 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공왕의 관심을 끈 건 내가 아닌 현 바스툴 왕이었던 것 같지만, 그딴 놈에게 공을 주고 싶진 않다.
내가 그랬다 치자.
"됐습니다. 공왕은 처음부터 도망갈 생각으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니 놓치는 것도 어쩔 수 없죠."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칼립스 이단 심문관은 상심한 얼굴로 그리 대답하며, 터덜터덜 걸어서 제 자리로 돌아왔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나도 모르게 칼립스 이단 심문관의 등을 토닥여주고 말았다.
세르펜스가 울적해 하면 위로해 주던 게 버릇이 된 탓이다.
나는 뒤늦게 아차 하며 칼립스 이단 심문관의 표정을 살폈다. 다행히도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감동한 듯한 눈치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은 건, 칼립스 이단 심문관이 아닌 일반 신관들 쪽이었다.
성기사들은 투구를 쓰고 있어서 모르겠다.
'이래서 광신도들이란···.'
교황이 쓰다듬 받는 세르펜스를 부럽다는 눈으로 쳐다봤을 때 알아봤어야 했다.
나는 무의식중에 혀를 차지 않도록 노력하며, 칼립스 이단 심문관의 등에서 손을 떼어냈다.
- 털썩.
어디선가 들려온 소리에 자동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무릎을 꿇은 채, 멍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는 현 바스툴 왕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