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549화 (549/925)

549회

69. 공작님과 패륜 왕 (14)

"주교님, 다 됐습니다."

세르펜스가 내게 세니어를 돌려주었다. 충전이 끝났나 보다.

넘겨받은 세니어는 막 손질을 끝낸 것처럼 반짝반짝 광택이 났다. 검을 만들 때, 금속과 함께 녹여낸 신성석 가루들이 신성력을 한껏 머금은 덕분이다.

누구네 아이가 만든 호로록 주머니를 보고 난 후라서 그런가.

세니어는 항상 훌륭했지만, 오늘따라 유독 훌륭함을 넘어 완벽해 보였다.

역시 우리 애가 만든 게 최고다.

"오오! 제 평생 보아온 신성석 중, 이렇게나 순수한 빛을 띠는 건 없었습니다! 과연 프···레이 님이십니다. 그 명성은 익히 들어왔지만, 이 정도이실 줄이야!"

칼립스 이단 심문관이 세니어를 보며 연신 감탄을 터트렸다.

익히 들어온 명성이 어쩌고 하는 건 '프라시더스 공작'에 관한 거겠지.

아무래도 칼립스 이단 심문관은 이름만 프레이라고 바꿔 부르면 되는 줄 아는가 보다.

저런 안일한 생각은 설정극에 대한 모욕이나 다름없다.

일루미나티 소속이었다면 당장 반성문이라도 써 오라고 했을 텐데.

"에인젤 주교님을 지키기 위한 물건이니, 성의를 다하여 제작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세르펜스가 도도한 표정으로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칼립스 이단 심문관이 익히 들었던 '프라시더스 공작'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다. 그 때문인지 칼립스 이단 심문관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떠올랐다.

"공작님께서는 현재 정체를 완벽하게 감추기 위해, 본 모습과는 정반대로 오만하고 도도한 성격을 연기하고 계신 겁니다."

"아! 그래서 마인 러스티가 '고작 젤리 따위에 연연할 정도로 유치한 데다가, 자기주장이란 게 없는 아첨꾼'이라고 말한 거였군요! 이해했습니다."

내 부연 설명에 칼립스 이단 심문관이 큰 깨달음을 얻은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건 그렇고 아까 막내 신관님이 돌아올 때까지만 계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

"세니어 좀 구경하다 가실래요?"

"그 검의 이름이 세니어입니까? 생긴 것처럼 우아하고 멋진 이름입니다."

칼립스 이단 심문관이 황홀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내 작명 센스를 이해하다니. 뭘 좀 아는 사람이다.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세니어를 칼립스 이단 심문관을 향해 내밀었다.

그리고 칼립스 이단 심문관은 세니어에는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직접 몸을 움직여가며 다각도에서 세니어를 관찰했다.

대체 뭐 하는 짓인가 싶다.

그런데 세르펜스는 그 이상한 행동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칼립스 이단 심문관을 바라보는 녀석의 눈빛에 조금 부드러운 기색이 깃들었다.

하지만 검을 들고 있는 나는 이 상황이 굉장히 불편했다. 팔도 아프고 칼립스 이단 심문관도 너무 부담스럽다.

나는 세니어를 든 손을 내 몸 쪽으로 당겼고, 칼립스 이단 심문관이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혹시 세니어는 칼립스 시의 크레아토 장인님께서 제작하신 검입니까?"

"어, 어떻게 아셨어요?"

"제 무기들도 그분께서 만드신 겁니다."

신의 사자인 나와 같은 브랜드의 물건을 가졌다는 게 영광스러웠는지, 칼립스 이단 심문관이 뿌듯해하며 말했다.

그나저나 교단 제일의 강자가 크레아토의 단골일 줄이야.

역시 내 안목은 탁월했다.

"그럼 저는 이만 신전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나는 손을 흔들어 가며 떠나는 칼립스 이단 심문관을 배웅해 주었다.

그런데 나가는 듯했던 칼립스 이단 심문관이 갑자기 멈춰 섰다.

무언가 깜박한 일이라도 있는 건지, 그는 뒤를 돌아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급한 일들이 끝나고 대륙에 평화가 찾아오면, 제가 만나 뵈러 찾아가도 되겠습니까?"

"당연히 되죠."

"감사합니다. 에인젤 님을 다시 만나, 교리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그날을 기대하겠습니다."

칼립스 이단 심문관이 정중하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러고는 후드를 눌러쓴 후, 이번에야말로 진짜 방을 나갔다.

교리에 관한 얘기라니. 괜히 된다고 했나 후회가 막심하다.

"그 검은 주교님의 몸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잖습니까? 그런 물건을 함부로 남에게 건네려 하지 마십시오."

칼립스 이단 심문관이 떠나고 일이 분 정도 흘렀을 때. 갑자기 세르펜스가 나를 혼냈다.

세니어의 능력을 의심하며 반쯤 없는 것처럼 취급할 땐 언제고.

슬슬 자신이 만든 신성석의 기능에 신뢰가 생기기 시작했는가 보다.

"지금은 옆에 막내 신관님이 계셨잖아요?"

"제가 없을 때도 그럴까 봐, 미리 말씀드리는 겁니다."

단호하게 말하는 세르펜스의 표정에서 '잘못은 발견한 즉시, 그 자리에서 고친다!'라는 의지가 느껴졌다.

나도 세르펜스의 잘못을 발견하면 즉각 즉각 혼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그러지 못할 때가 더러 있다.

'그런 어려운 일을 세르펜스가 해내다니!'

장차 크게 될 아이다. 몹시 흡족하다.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다시는 그러지 않겠노라 세르펜스와 약속했다.

"그런데 너희는 언제까지 여기에 머무를 생각이야?"

휴마누스가 우리의 일정에 관해 물었다.

나는 미리 생각해 두었던 계획을 입에 올렸다.

"될 수 있으면 빨리 떠나야죠. 가능하면 내일 당장?"

"네에?! 그렇게나 빨리요?"

그동안 베일과 정이라도 든 걸까? 유지스가 크게 아쉬워하며 반문했다.

아쉬운 건 나도 마찬가지다. 나라고 베일이 즉위식을 치르는 걸 안 보고 싶을까?

하지만 우리가 이곳에 오래 머물러서 좋을 건 없다.

'자칫 잘못하면 내가 기도 의식을 주관하게 되는 일이 생길지도 몰라···. 그것도 약식이 아닌 정식으로.'

그것 말고도 문제는 더 있다.

어떤 측면에서는 내가 즉위식에서 기도문을 외는 것보다, 이쪽이 더 큰 문젯거리다.

법숭이가 '프라시더스 공작'을 들먹거렸으며, 공왕이 나와 '신관 프레이'를 언급했다.

그리고 신관 프레이는 암암리에 퍼진 '프라시더스 공작의 불법 초상화'보다도 잘 생겼다.

누군가의 머릿속에 '설마' 하는 생각이 떠오른 순간.

그것은 소문이 되고, 소문은 와전되어 진실인 것처럼 사람들의 입을 오르내리겠지.

'물론 이 경우는 진실이 맞지만.'

될 수 있는 한 우리는 빨리 빠져 주는 게 좋다.

어차피 이곳에 머물러 봤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그렇다고 편히 쉬는 것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 왕성에는 식사를 준비해 줄 사람이 없으니까. 아니, 그냥 아무도 없다.

더군다나 시국이 시국이다. 급해도 아무나 고용할 수 없으니, 한동안은 불편함의 연속일 것이다.

'그러면 베일이 얼마나 미안해하겠어?'

오래 있어 봤자 아쉬움만 커질 뿐이다.

차라리 베일이 바쁘고 정신없을 때 떠나는 게 낫다.

나는 이러한 생각들을 일행에게 설명했다.

세르펜스야 쌍수 들고 환영했고, 유지스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에드나는 아니마와 대화를 나누느라 내 얘기 자체를 대충 흘려들은 듯했다.

두 사람은 종이에 무언가를 적으면서 작게 소곤거렸는데, 마법 문자와 마법진. 그리고 의미 불명의 숫자가 멋대로 뒤엉켜, 흰 종이가 점점 까매졌다.

'호로록 주머니에 관한 얘기를 하는 건가?'

나는 아무것도 못 본 거로 치고, 윈스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우리 일행 중 베일과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사람은 윈스톤이다.

"큰 성기사님은 어떻게 생각해요?"

"저도 주교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윈스톤이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투구를 벗고 있어서 드러난 얼굴 또한 덤덤하긴 매한가지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 생각을 안 하고 대답만 하는 건지 분간이 안 간다.

"주교님도 이제 슬슬 제대로 된 생활 방식을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째서일까? 윈스톤의 저 말이 다이어트를 시작하자는 말로 번역되어 들리는 까닭은.

그리고 그것이 내 착각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그의 시선이 내 배를 향하고 있었다.

윈스톤은 자신의 본분이 헬스장 트레이너가 아닌 기사라는 걸 기억하고 있긴 할까?

나는 양팔을 교차하여 배를 가렸다. 그래도 윈스톤의 눈매는 여전히 사나웠다.

어서 말을 돌려야지 안 되겠다.

"그리고 돌아갈 땐 아르케 숲을 거쳐서 갈 생각인데. 어때요?"

"정말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지스가 언제 아쉬워했느냐는 듯, 들뜬 목소리를 냈다.

아르케 왕국에 가려는 이유를 알면 저렇게 기뻐하지 못할 텐데.

저렇게 좋아하는 유지스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다. 자세한 얘기를 하긴 해야겠지만, 그게 꼭 지금일 필요는 없겠지.

"네. 철로가 망가졌으니, 굳이 펠로 왕국을 거쳐서 갈 필요가 없죠."

"간 김에 각종 과일과 과실주 등을 잔뜩 사 놓아야겠어요!"

유지스가 의욕적으로 눈을 빛냈다.

외국에서 일하는 직장인들이 휴가를 받아 고향에 방문하면, 각종 소스를 비롯한 식자재 등을 그렇게나 많이 사 간다던데.

이 세계도 크게 다를 바 없는 모양이다.

"그럼 우리랑 같이 가면 되겠네."

휴마누스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마치 우연히 목적지가 겹쳤다는 것처럼 들렸지만, 휴마누스는 우리가 아르케 왕국으로 향할 예정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성검의 주인께서 거긴 왜요?"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그 설정은 언제까지 유지할 생각이야?"

휴마누스가 질문에 대답은 안 하고 주제에서 벗어난 질문을 던졌다.

사실 나도 그게 고민이다.

한 가지 컨셉으로 설정 놀이를 너무 오래 하다 보니 슬슬 지겨워진 데다가, 성직자 신분은 제약이 너무 많다.

문제가 닥칠 때마다 신성력이 없다는 걸 들킬까 봐 조마조마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그만두고 싶지만···. 일단 국경을 벗어날 때까진 이 신분을 유지해야 하려나?"

"그렇다면 펠로 왕국 쪽으로 출국하여, 그대로 국경 지대를 따라 아르케 숲으로 이동하는 건 어떻습니까?"

내 혼잣말에 세르펜스가 손을 들어 올리며 의견을 냈다.

아르케 왕을 만나려면 유지스의 정체를 드러내야 할 테니.

'바스툴 왕국의 혁명을 함께 한 성직자 일행'은 펠로 왕국으로 향한 것으로 해 두는 편이 좋다.

"그럼 신분 문제는 해결됐고."

나는 다시 휴마누스를 쳐다보았다.

휴마누스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어째서인지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미간에 주름까지 잡힌 거로 보아, 단순히 우리랑 같이 여행 다니는 기분을 내려고 같이 가자고 한 건 아닌 모양이다.

"내가 아르케 왕국으로 가려는 건, 세계수 때문이야."

"네? 세계수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휴마누스가 무겁게 입을 열자, 유지스의 목소리에 불안감이 깃들었다.

설마하니 악숭 세력이 세계수를 해치는 계획을 세웠고, 그걸 휴마누스가 주워듣기라도 한 걸까?

"그런 건 아니고, 조금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어서 그래."

휴마누스가 양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조금' 마음에 걸리는 수준치고는 얼굴에 근심이 엿보였다.

성검 일행에겐 이미 말을 해 두었는지, 그들의 표정도 어딘가 모르게 떨떠름했다.

나와 유지스. 그리고 세르펜스까지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나서야 휴마누스가 자세한 사정을 털어놓았다.

"사실 폴드 공국과의 전투가 끝나고 나서, 제국을 통과하는 김에 대신전에 들러 역대 성검의 주인이 쓴 일지들을 대여해 왔거든. 원래 대신전 밖으로 가지고 나가면 안 되지만, 나는 일지를 읽을 시간이 없었고 마침 아공간 주머니도 있으니까. 사정사정해서 빌려올 수 있었어."

"그래서요?"

"내가 정말 시간 나는 대로 열심히 읽으려 했거든? 그런데 성검을 다루는 수련도 해야 하고, 일지도 써야 하고. 그 밖에도 이래저래 바쁜 일들이 많아서···."

"갑자기 왜 변명을 하시는 겁니까?"

"···세계수가 나오는 부분을 최근에 읽게 됐어."

성검의 주인이 쓴 일지에서 '세계수'가 나올만한 부분이라면, 세 번째 시련을 받을 때다.

그 말인즉. 휴마누스는 이제서야 겨우 초반부를 넘겼다는 소리다.

덧붙여 말하자면 공국 전쟁이 끝난 건 6월 말이었고, 지금은 9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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