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2회
69. 공작님과 패륜 왕 (17)
"아까 주교님께서 제게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사람들이 전부 식탁 앞에 둘러앉기 무섭게 베일이 내게 질문을 던졌다.
오랜만에 먹는 제대로 된 식사를 눈앞에 두고 무엇이 저리도 급한지 모르겠다.
"일단 배부터 채우고 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빵을 집어 들어 한입 크기로 찢으며 용건을 뒤로 미뤘다.
떠난다고 말하고 나서 둘러앉아 밥을 먹는 것도 그림이 이상하니까. 그렇다고 송별회를 열 만한 상황도 안 된다.
"이번에는 대체 무슨 얘기를 하시려고···."
베일이 수상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룩스메아에 대고 맹세코, 저런 눈빛을 받을만한 짓은 한 적이 없다. 하늘에 대고 맹세하라면 조금 고민해 보겠지만.
아무튼 내 양심은 당당하고 떳떳했다. 그래서 베일의 눈빛을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자기가 노려본다고 해서 내가 입을 열 것 같지 않다고 느낀 걸까?
베일도 식사하고자 포크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실제로 식사를 시작하진 않았다.
"아! 그러고 보니 전하께서 부탁하셨던 일에 대해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베일이 불현듯 무언가 떠올랐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말을 듣고 났더니 두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첫 번째 생각은 '일 얘기도 먹고 나서 하면 어디 덧나나?'이며, 두 번째는.
"전하가 두 명이 되니까 헷갈리는데요? 앞에 이름을 붙이든 국적을 붙이든, 뭐라도 붙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사람 이름을 제대로 외우지 못하는 분께서 하실 말씀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의견을 제시하자, 르웰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매우 옳은 말이다.
나는 들어 올렸던 손을 내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빵을 입에 욱여넣었다.
르웰이 뒤늦게 아차 싶은 표정으로 자신의 입을 가렸다.
그리고 베일은 그런 르웰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를 무안하게 한 르웰이 아주 자랑스럽다는 눈빛이다.
정작 르웰은 자신의 왕이 왜 저러시나 영문을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제가 부탁한 거라면, 악마 숭배자가 왕성에 반입한 물건에 관한 일입니까?"
눈치 없는 휴마누스가 이상하게 흘러가는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하고 제 할 말을 했다.
그제야 이럴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는지, 베일이 퍼뜩 정신을 차리며 표정을 굳혔다.
"그렇습니다. 현재 상황을 보면 아시겠지만···. 성 밖으로 물건을 옮길 수 있는 사람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고, 실제로도 성을 빠져나간 사람은 없습니다. 아니, 있다면 오직 한 사람. 마인 러스티뿐입니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결과다.
성 안의 물건을 빼돌리려면 혼란을 틈타, 도망치는 사람들 사이에 숨어들어 은근슬쩍 옮기는 게 최선이다.
하지만 성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그러니 그러한 수법이 통할 리가 없다.
"혹시 성안은 수색해 보셨습니까?"
"예. 하지만 수상한 물건은 그 어떤 것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는 건···. 역시 마인이 마물을 이용해서 옮긴 건가?"
휴마누스가 끙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혼잣말했다.
현재로서는 그렇게 볼 수밖에 없다.
공왕이 타고 간 마물의 몸에 실어 놓았거나, 지렁이 마물처럼 땅속을 자유롭게 오가는 마물을 이용했거나.
악숭 세력이 마물은 완벽하게 조종할 수 있게 된 지금.
그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아무도 모르게 무언가를 옮기는 건 쉬운 일이다.
'주사기를 우리가 찾아내서 폐기해 봤자, 놈들은 다시 만들어내겠지만···.'
흑마력은 둘째 치더라도 핵심 재료는 악마의 피다. 하루에 만들 수 있는 양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을 터.
악숭 세력이 주사기를 회수해 간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리라.
'그렇게 홀라당 가져가 버릴 거면 가져올 때도 몰래 숨겨서 할 것이지!'
마치 줄 것처럼 슬쩍 보여 줬다가, 냉큼 가져가 버리니 괜히 약만 올랐다.
그냥 얘기만 전해 들은 내 기분도 이렇게 나빴으니. 실제로 주사기를 발견한 장본인들은 더 할 거다.
푸로르가 숟가락을 쥔 손에 힘을 꽉 주며 분통을 터트렸다.
숟가락이 그녀의 악력을 버티지 못하고 휘어버린 것도 그때였다.
"역시 그 물건을 발견했을 때, 바로 공격해서 빼앗아야 했어!"
"그때 감이 안 좋으니 건들지 말자고 한 건 너잖아?"
"휴마누스, 너도 국제 관계가 어쩌고 하면서 일단은 두고 보자고 그랬지."
"그래도 어찌 보면 잘된 일 아닐까? 모두의 눈을 피해 그 물건을 운반하는 방법이 있으면서, 일부러 보란 듯이 짐 마차를 이용했잖아."
"알아, 분명 함정이었겠지. 그냥 농락당한 기분이 들어서 울컥했을 뿐이야."
푸로르는 한숨을 푹 내쉬며 구부러진 숟가락을 도로 펼쳐서 양송이 수프를 떠먹었다.
[성검의 주인]에서도 푸로르는 종종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저런 식으로 분노를 표출하곤 했다.
'드루이드 술법의 부작용이라고 했던가···?'
[성검의 주인] 속 푸로르의 말에 따르자면, 그 부작용을 다스리는 것과 드루이드의 힘을 통제하는 것.
그 두 가지가 서로 연관되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푸로르는 불쑥불쑥 찾아오는 충동과 분노를 억누르려 노력했고, 일행들에게도 도움을 구했다.
그러한 노력 덕분일까?
[성검의 주인] 후반부에 가면 저런 행동이 거의 사라지긴 했다.
완벽하게 고치진 못했지만.
"맞아요. 악마 숭배 세력이 그 물건을 왕성에 보낸 건, 연회 초대장을 보낸 이후. 즉, 당시 왕자 저하셨던 베일 님께서 생존을 알리기 전이었죠. 만약 그때 휴마누스 님께서 나서셨다면, 일이 더 복잡해졌을 거랍니다."
유지스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음모론을 제기하기 위해 판을 깔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좌중을 한 번 돌아보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가령 악마 숭배 세력이 제국과 바스툴 왕국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성에 들어오는 짐 마차에 흑마법 관련 물품을 숨긴 것 같다며 잡아뗀다거나···."
"'제국의 황태자'인 내가 '성검의 주인'이라는 이름을 앞세워 모함하려 한다고 우겼겠지. 공국이 사라진 자리를 대체하고자, 또 다른 속국을 만들려는 수작일지도 모른다며 사람들을 선동했을 수도 있고."
나와 유지스가 고개를 돌려 세르펜스를 바라보았다.
세르펜스는 입안에 든 음식물을 씹으며 고개를 도리질 쳤다. 방금 말을 한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는 건···.
"어째서 그런 눈으로 저를 쳐다보시는 겁니까?"
휴마누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눈치가 없어서 그렇지, 머리가 없는 건 아니라는 걸 아는데.
[성검의 주인]에서도 주인공답게 제법 똘똘한 말을 많이 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휴마누스가 황태자다운 발언을 할 때마다 새롭게 느껴지는 건 어째서일까.
'역시, 실제로 본 눈새 이미지가 강해져서 그런 거겠지?'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리며, 이 생각이 정답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만약 세르펜스가 [성검의 주인]에서 그러했듯. 사악하게 웃는다거나 무감각한 표정으로 누군가를 해친다고 상상해 보자.
굉장한 괴리감이 느껴졌다.
이제 내 안의 세르펜스는 [성검의 주인] 속 타락한 모습이 아니라, 단호박 에그 슬럿이 든 접시를 내 쪽으로 가져다 놓는 기특한 녀석이니까.
나는 세르펜스가 한입 크기로 잘라놓은 단호박 에그 슬럿을 포크로 콕 찍어서 입에 넣었다.
푹 익어 달짝지근하면서도 부드러운 단호박과 고소한 치즈. 그리고 몽글몽글한 계란과 짭짤한 베이컨이 입안에서 하모니를 이뤘다.
"주교님께서는 그냥 쳐다보신 것뿐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
"마테리아 님의 시선도 주교님과 똑같이 움직였던 것 같은데···."
"제가 후드를 깊게 눌러쓴 탓에 휴마누스 님께서 착각하신 거랍니다."
유지스의 태연한 대답에 휴마누스는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그런가?' 하고 중얼거렸다.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으니. 모처럼 이상한 점을 눈치채 놓고도 확신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안타까움에 혀를 찼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설명해 줄 수 없다.
평소 성검의 주인을 한심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웬일로 똑똑한 말을 해서 깜짝 놀랐다고 말하는 건 교단의 성직자가 할 짓이 아니다.
"어쨌거나 지금은 함정을 무사히 피한 것에 만족하며, 식사나 합시다! 그 물건이야 우리가 가져와 봤자 쓸모도 없고, 놈들이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거. 다들 알잖아요?"
"그런데 도대체 '그 물건'이라는 건 어떤 물건이지요?"
르웰이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아무래도 방금 한 말을 정정해야겠다. 모르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는 걸 깜박했다.
슬쩍 눈동자만 굴려 베일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 물건'이라는 게 주사기를 뜻하는 것임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는 듯하다.
자세한 건 기밀이라서 알려줄 수 없다고 말하려는 찰나.
"그건 '레펠로'를 가공하여 만든 원통형의 물체인데, 그 안에는 흑마력으로 조제한 극독이 들어있답니다. 어지간한 실력자도 순식간에 중독되어 사망할 정도로 아주 지독한 독이죠."
유지스가 '진실의 종족'이라는 종족값을 못하고, 거짓 설명을 늘어놓았다.
비슷한 효과를 내긴 하니까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긴 한데, 저 말이 사실이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저을 법한. 그런 모호한 설명이다.
"잘못 건드리면 내용물이 흘러나올 수도 있으니, 발견 즉시 가까운 신전에 신고하세요."
그러고는 공익 광고 마무리 멘트 같은 소리를 입에 담았다.
르웰은 유지스의 말을 철석같이 믿으며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어휴, 이제야 가벼운 분위기 속에서 식사다운 식사를 할 수 있겠네!'
···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일상적인 대화가 나오는가 싶더니, 화제는 어느새 '비어버린 왕성의 사람들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로 흘러갔다.
"쳐내야 할 가문의 작위를 박탈하고 재산과 땅을 몰수하여, 땅은 혁명을 도와준 이들에게 나눠주고 그곳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기용할까 합니다."
베일이 비프 스튜 속 감자를 포크로 찌르며 말했다.
세르펜스는 막내 신관님 설정 때문에 조언해 줄 수 없는 처지였으니.
꿩 대신 닭으로 제국의 황태자인 휴마누스에게서 각종 팁을 뜯어갈 심산인가 보다.
"무턱대고 그들을 기용하기 전에, 그들이 작성한 서류나 장부를 미리 확인해 보길 추천해 드립니다. 그것만으로는 인성을 판단할 수 없으나, 적어도 비리를 저지르는 자인지 정도는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어차피 몰수한 재산을 파악하려면 장부 확인은 필수이니, 겸사겸사 처리하면 될 것 같군요."
누군가에게 조언해 주는 황태자 휴마누스가 어색하기만 한 나와는 다르게, 베일은 진중한 표정으로 휴마누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 베일의 의욕적인 모습이 보기 좋았던 걸까?
휴마누스는 먼저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그런데 본보기로 삼을 가문은 에인젤 주교님께 뇌물을 바친 가문들뿐 아닙니까? 그들 모두 중앙 진출을 하지 못한 가문이라 들었습니다. 그곳의 행정관 중. 인수인계 없이 한 나라의 행정 업무를 알아서 파악하고, 진두지휘할 만큼 유능한 자가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그거라면 문제 될 것 없습니다. 쳐내야 할 가문 중에는 제 모친의 가문인 레몰리 후작가도 있으니 말입니다."
베일이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모습에 휴마누스가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현 레몰리 후작가의 가주는 갑작스러운 전대 레몰리 후작의 사망 이후, 가주직에 오른 사람입니다. 그리고 제 모친께서 사망하셨을 때. 독살이라는 증거가 명확한데도, 그 진위를 밝히는 것을 반대하고 나선 자입니다. 제가 폐위시킨 부왕과 모종의 계약을 맺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 자가 제 혈육이라는 이유로 권력을 취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무언가 사연이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은 몰랐다.
내가 착잡함을 느끼는 이 순간에도. 베일은 당당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누군가는 아버지를 죽인 것도 모자라, 어머니의 가문까지 없애려 한다고 손가락질하겠지만. 어차피 저는 '패륜 왕'이지 않습니까?"
[성검의 주인]에서는 베일을 끊임없이 주눅 들게 하고, 자신을 불신케 했던 그 단어가.
이제는 굳건한 지지대가 되어 그가 흔들리지 않도록 잡아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