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9회
71. 공작님과 성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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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펜스가 가까이 다가온 남성체 악마를 향해 검을 냅다 집어던졌다.
그 느닷없는 행동에 머릿속이 멍해졌다.
'저런 미친!'
대체 뭐 하는 짓이냐고 소리라도 치고 싶은데, 너무 놀라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녀석은 두 악마를 상대로 반격을 하기는커녕 방어조차 제대로 못 하여 큰 상처를 입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대로 쓰러져 생을 마감했을 치명상이다.
곧장 신성력으로 상처를 치료했다지만, 신성력이 흘린 피까지 보충해주는 건 아니다.
그 짧은 시간에 흘러나온 피의 양은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다.
새하얗던 신관복이 붉게 물들었다. 허리 아래로는 그냥 붉은 옷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다.
반대로 세르펜스의 얼굴은 핏기 없이 새하얗게 질렸다.
검을 들고도 그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세르펜스는 검을 내던졌다.
남성체 악마가 신성력이 가득 담긴 검을 피해냈다.
세르펜스는 자신의 공격이 적중했는지 확인하지 않았다.
적에게 등을 내보인 채, 간절한 표정으로,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쓰러진 휴마누스가 있는 곳으로 달렸다.
'신성력으로 휴마누스를 치료해서 깨울 생각인가? 아니면···.'
무방비하게 드러난 세르펜스의 등을 향해 악마가 손을 내뻗었다.
그렇지 않아도 위협적인 갈고리형 손톱에 마기가 일렁여 섬뜩함을 자아냈다. 금방이라도 세르펜스의 몸에 틀어박혀, 그 안을 헤집어 놓을 것 같다.
아니, 분명 그럴 목적으로 손을 내뻗은 걸 테지.
그리고 세르펜스도 손을 뻗었다.
아니면. 그다음에 떠올렸던 문장이 그대로 눈앞에서 실현되었다.
세르펜스가 성검을 손에 쥐었다.
그와 동시에 성검에서 눈부신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볼타 산맥에서 결계를 형성했을 때 나타났던 오색찬란한 빛이 세상을 밝혔다.
저렇게나 밝은 빛인데도, 어째서인가 똑바로 바라보아도 눈이 아프지 않았다. 되려 편안함과 따스함마저 느껴졌다.
반면에 악마들은 양손으로 눈을 가리며 괴로움에 찬 비명을 질렀다.
거대한 빛이 천천히 작아졌다.
그에 따라 빛에 삼켜졌던 세르펜스의 모습도 점차 드러났다. 마법 시약으로 붉게 염색했던 머리칼이 본래의 색으로 서서히 돌아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작아진 빛이 세르펜스의 손아귀에서 검의 형상을 취했다.
성검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점차 사그라들어, 그렇게 보일 뿐이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어째서인가 빛 그 자체를 검 형태로 빚어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성검의 형태가 변하기 시작했다.
폭이 좁아지고 길이가 길어졌다. 반대로 손잡이는 짧아졌고, 가드 부분이 손등을 뒤덮는 형태로 바뀌었다.
빛이 완전히 사라지고 드러난 성검은 기존의 모습과 완전히 딴판이었다.
디자인적으로는 단순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크레아토가 만든 세르펜스의 검과 매우 흡사했다.
'성검, 저거! 사용자 맞춤이었어?!'
어디선가 '헐···.'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고 자시고, 내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무의식중에 맥빠진 소리를 흘릴 정도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머리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다.
나는 그저 멍할 따름이었으나, 악마들은 경악실색했다.
세르펜스가 성검에 적응을 하기 전에 끝을 보겠다는 듯. 핏발 선 눈을 부라리며 세르펜스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에 대한 세르펜스의 반응은 단순했다.
침착하게 성검을 쥔 손을 앞으로 내밀어, 아주 기초적인 준비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동시에 가까워지는 두 악마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뭔가 이상한데?"
내 혼잣말에 대답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상황 파악이 제대로 안 될뿐더러, 악숭이들과 싸우느라 바쁜 탓이다.
악마들이 세르펜스의 지척에 다다랐다.
남성체 악마는 세르펜스의 목을 노렸고, 여성체 악마는 세르펜스의 심장을 노렸다.
세르펜스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그 공격들을 피했다.
'아니···. 저런 걸 피했다고 표현해도 되는 걸까?'
갈고리처럼 굽어진 손톱 끝이 세르펜스의 목을 할퀴듯 지나가며 살갗을 찢었다.
마기가 넘실거리는 악마의 손톱이 세르펜스의 왼쪽 어깨를 파고들었다.
저 정도면 급소만 아슬아슬하게 비켜 나가도록 몸을 살짝 틀었다고 봐야 했다.
보는 내가 섬뜩함을 느끼며 몸을 웅크렸으나, 정작 세르펜스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세르펜스는 이상하리만치 침착하게 검을 휘둘렀다.
서걱 하는 소리와 함께 악마의 팔이 잘려 나갔다.
"캬아악-!!"
여성체 악마의 높다란 비명이 고막을 찢을 듯 쨍쨍하게 울려 퍼졌다.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도 날개를 펄럭여 하늘로 도망친 건 본능이었을까? 날아오르는 악마의 팔뚝에서 검은 피가 후두둑 떨어졌다.
세르펜스는 잠시 성검을 왼손으로 바꿔 들고, 어깨에 박힌 악마의 잘린 팔을 뽑아냈다. 살이 뜯기며 피가 왈칵 쏟아졌다.
그런데도 녀석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어째서 그렇게 지겹다는 듯이···.'
녀석의 얼굴은 굉장히 지쳐 보였고, 한없이 우울해 보였다.
나는 저런 표정을 한 세르펜스는 알지 못한다. 혼란스럽다. 이건 무언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
'룩스메아는 이런 상황을 예견했던 걸까? 그래서 시온을 통해 세르펜스가 성검에 접촉하지 못하게 하라는 전언을 보냈던 걸까?'
그 의문에 대답해 줄 수 있는 존재는 오늘도 묵묵부답이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상처라도 빨리 치료하면 안 되나?'
세르펜스의 목과 어깨에서는 여전히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제 녀석이 입고 있는 옷에서 흰 부분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아직 움직일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상처 입은 녀석을 향해 남성체 악마가 원반 모양의 마기를 쏘아냈다. 세르펜스는 잘린 악마의 팔을 던지는 것으로 그것을 간단하게 막아냈다.
"아아악! 레이아의 팔이!!"
이미 주인의 어깨에서 잘려 나간 팔이건만.
그것이 다시 한번 토막이 나자, 남성체 악마가 자신의 팔이라도 잘린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그사이 세르펜스는 검을 다시 오른손으로 옮겨 쥐고 남성체 악마를 향해 내질렀다.
위기에 처한 남성체 악마를 구하기 위함인지, 여성체 악마가 하나 남은 손으로 허공을 할퀴었다.
칼날처럼 예리하게 벼려진 마기가 세르펜스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찰나에 가까운 매우 짧은 시간에 불과했지만, 세르펜스의 움직임이 잠시 멈췄다.
여성체 악마의 공격을 맞아도 움직이는 데 지장이 없을지 가늠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째서 그렇게 느껴졌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저 지긋지긋한 표정 탓이려나? 아니면 의욕을 찾아볼 수 없는 눈 때문인가?'
잠시 고민하던 세르펜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위기를 모면한 남성체 악마가 바늘 형태의 마기를 다발로 흩뿌리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놈의 얼굴에는 비통함이 가득했다. 참 알아보기 쉬웠다.
반면에 세르펜스의 생각은 조금도 알아볼 수 없었다.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훤히 읽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녀석이 우울해한다는 것 말고는 하나도 모르겠다.
세르펜스는 가볍게 성검을 휘둘러 급소로 날아오는 공격만 걷어냈다.
살갗을 찢고 피부를 파고드는 마기를 무시하며 자세를 낮추고, 땅을 박차 솟구치듯 뛰어올랐다.
그리고 성검을 휘둘렀다.
하늘은 날개가 있는 자들을 위한 전장이다.
악마들은 날개를 한 번 펄럭인 것만으로 손쉽게 세르펜스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났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악마들은 재차 날개를 퍼덕거렸다.
두 악마는 하늘에 곡선을 그리듯 크게 선회하여, 세르펜스의 양 측면에서 합공을 펼쳤다.
발 디딜 곳 하나 없는 허공이다.
이제 추락할 일만 남은 세르펜스에게 놈들의 공격을 피할 길이란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그때 녀석의 몸에서 은빛 신성력이 흘러나왔다.
'이제서야 치료를 하려는 건가? 아니면 결계를 펼치려고?'
내 예상은 모두 빗나갔다.
신성력은 세르펜스의 등 뒤에 모여 날개의 형상을 갖추었다.
겉모양만 그러한 게 아니라 기능 또한 갖추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활짝 펼쳐진 은빛 날개가 크게 펄럭이자, 세르펜스의 몸이 추락하는 대신 더욱더 높은 곳으로 상승했다.
'천사.'
그 단어가 머릿속을 지배했다.
피로 물든 붉은 옷을 걸치고 있음에도 그 모습이 더없이 신성해 보였다.
가볍게 나부끼는 청은 빛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음울한 표정조차도. 지상의 가련한 이들을 내려다보는 고고함으로 비추어졌다.
그런 세르펜스의 아래, 두 악마는 서로를 마주 보고 손톱을 겨눈 채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있던 세르펜스가 갑자기 날개를 꺼내어 더 높은 곳으로 날아오른 탓이다.
졸지에 같은 편끼리 목숨을 위협하는 상황이 펼쳐졌다. 당황한 악마들이 몸과 날개를 억지로 비틀었다.
두 악마가 아슬아슬하게 서로를 스치며 지나쳤다.
그런 그들의 머리 위에서 세르펜스가 성검을 휘둘렀다.
가느다란 세검의 형태로 변화한 성검이 휴마누스의 금빛 신성력이 아닌, 세르펜스의 은빛 신성력을 길게 뿜어냈다.
성검은 남성체 악마의 날개 하나를 완전히 잘라내고, 다른 한쪽 날개까지 반쯤 베었다.
"크헉!"
남성체 악마가 속절없이 땅으로 추락했다.
놈이 지면에 부딪히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땅이 흔들렸다.
"으윽···."
그 충격 때문인지 기절했던 휴마누스가 깨어났다.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세우며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그러다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허억 헛바람을 들이켰다.
"세르펜스! 괜찮···, 어? 성검이 어디 갔지?"
휴마누스가 허공에서 펼쳐지는 싸움을 눈치채지 못하고, 고개를 좌우로만 두리번거리며 세르펜스와 성검을 찾았다.
막 기절했다 깨어나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가 보다.
뒤늦게 악마와 싸우는 세르펜스의 기척을 잡아낸 휴마누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천사···. 아니, 세르펜스?!"
휴마누스가 경악했다.
세르펜스의 손에 들린 것이 성검이라는 건 눈치채지 못했는지, 변화한 성검의 모습에 관한 감상은 없었다.
추락한 남성체 악마가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꽤 높은 곳에서 떨어졌으나, 악마의 튼튼한 육체를 망가트릴 정도의 충격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날개가 잘린 건 치명적인 손상으로 보였다.
남성체 악마가 제대로 균형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이제 하나뿐인. 그마저도 성치 않은 날개를 파드닥거리며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악마 특유의 타고난 신체 능력 덕분에 놈은 제법 높은 곳까지 도약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늘은 넓었다. 시시각각 움직이는 전장은 날개 없는 자의 입장을 허락하지 않았다.
남성체 악마가 다시금 발을 구르고 날개를 퍼덕였다.
그렇게 날아오르려 발악하는 놈의 바로 옆에.
- 쾅!!
여성체 악마가 곤두박질쳤다.
남성체 악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장난기 하나 없는 목소리로 '레이아?' 하고, 자신과 닮은 악마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여성체 악마는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으아아아!!"
남성체 악마가 괴성을 내지르며 땅을 박차 하늘 높이 솟구쳤다. 한 손에 집중된 마기가 거칠게 요동쳤다.
세르펜스는 이번에도 그 공격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뒤늦게 날개를 움직여 악마가 펼친 필사의 공격을 허무할 정도로 간단히 회피했다.
그러고는 성검을 내질러 단번에 악마의 심장을 꿰뚫었다.
남성체 악마가 또 한 번 쿵 소리를 내며 추락했다.
일대에 적막이 찾아왔다.
어느새 악숭이들을 모두 처치한 일행들이 멍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세르펜스가 사뿐히 땅에 착지했다.
은빛 날개가 녀석의 몸에 흡수되듯 사라졌다.
녀석이 땅에 내려왔지만, 나는 쉽사리 말을 붙일 수 없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방금 세르펜스가 보인 위용에 압도된 탓도 있었지만, 본질적인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지금의 그는 어딘가 이상했다.
잠깐 [성검의 주인] 속 타락펜스가 떠올랐다. 하지만 근본적인 무언가가 달랐다.
직접 타락펜스를 두 눈으로 본 것은 아니었으나 확신할 수 있다.
저 세르펜스는 절대 타락펜스가 아니다.
신성력으로 이루어진 날개를 펼쳐 하늘을 나는 건 둘째 치더라도.
'···타락펜스는 일부러 적의 공격에 당하는 정신 나간 짓은 하지 않았어.'
성검을 익숙하게 다루는 모습으로 미루어 봤을 때. 떠올릴 수 있는 답은 하나다.
내가 소설을 통해 읽은 [성검의 주인] 이전에 하나의 시간대가 더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때 성검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 바로 눈앞의 세르펜스라는 것.
'[성검의 주인]의 세르펜스가 아니라, 성검의 주인인 세르펜스라고···?'
내가 떠올린 추론이었으나 순순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되려 혼란만 가중되었다.
"어, 세르펜스? 방금 그 날개는 뭐야?"
오늘도 눈치 없는 휴마누스가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어리둥절하다 못해 어벙한 표정으로 세르펜스에게 말을 붙였다.
일단 닥치고 상황을 좀 지켜보라는 말이 목구멍에서 겨우 멈췄다.
놀랍게도 세르펜스의 표정에 미미한 변화가 생긴 까닭이다.
"폐하께서, 어떻게 이런 곳에···?"
세르펜스가 그제야 휴마누스를 인식한 듯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말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의심의 여지없이, 저 세르펜스는 성검펜스가 확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