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4회
71. 공작님과 성검 (6)
"신의 사자께서는, 제가···. 으음, 저에 대해 알지 못하시는지. 그것을 물으려 했습니다."
성검펜스가 도중에 말을 고쳤으나 모르는 척해 주기로 했다.
녀석이 너무 우울한 표정으로, 겁먹은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 탓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맞아요. 제가 아는 정보는 바로 전 회차에 해당하는 내용뿐입니다. 그 이전. 그러니까 성검펜스의 존재는 저도 지금 안 겁니다."
나는 속으로 룩스메아를 욕하며 대답했다.
하지만 [성검의 주인]이 소설 형식을 빌려 그 정보가 전달되었음을 떠올려 본다면,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내가 [성검의 주인]을 끝까지 몰입하며 읽을 수 있었던 건, 그래도 희망이 보였기 때문이다.
주인공 휴마누스가 동료들과 힘을 모아 마왕을 쓰러트리고 평화를 되찾을 수 있을 거란 희망.
그런 희망이 있었기에 다 같이 행복하게 살았다는 결말을 그려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보기 위해 계속 글을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하지만 성검펜스의 이야기는···.'
살짝 엿본 것만으로 피폐함의 끝을 보여줬다.
주인공이 첫 번째 시련부터 실패해 버리질 않나, 여주인공으로 추정되는 엘프가 죽질 않나.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는 주인공의 정신은 오락가락하고, 신성력을 쓸 수 있으면서도 상처를 방치하고, 일부러 다치고.
그러다 끝내는 죽어버리는.
'그딴 소설을 대체 누가 읽겠어?'
거기에서 끝나면 차라리 다행이다.
내가 읽은 [성검의 주인]에 해당하는 내용이 아직 남아 있으니까.
성검펜스의 이야기가 끝나고, 휴마누스의 이야기가 2부로 이어졌다면? 1부에서 구르고 굴렀던 주인공 성검펜스가 악역으로 등장하여, 새로운 주인공 휴마누스와 대립하고 고통받는 모습을 본다면?
상상만으로도 욕이 절로 나왔다.
"다른 사람이 성검의 주인으로 선택되었는데, 어째서 저는 성검을 쥐려 한 겁니까?"
성검펜스가 또다시 질문했다.
성검의 주인이 아닌 사람은 성검을 쥘 수 없다. 이는 대륙의 상식이다. 그런데 어째서 세르펜스는 성검을 쥘 생각을 했느냐는 뜻이다.
언뜻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대화를 시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정 반대다.
녀석은 자신의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아서 말을 돌리는 것뿐이다.
그래도 막무가내로 우리를 적대시하던 것에 비하면 대화가 잘 통하는 편이긴 하다. 적당히 대답해 주면서, 넌지시 질문을 던져보는 것도 나쁘진 않다.
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일단 주변 정리부터 하고, 자리 잡고 앉아서 편하게 얘기 나눕시다! 상처도 치료하고요."
"······."
누가 성검펜스 입에 지퍼라도 달아 놓았나. 녀석의 입이 다물려서 열릴 생각을 안 한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유지스를 바라보았다.
유지스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믿음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세르펜스, 아프지 않아요? 피도 많이 흘렸고 안색도 나빠 보이는데, 빨리 치료해야 하지 않을까요?"
걱정 가득한 유지스의 말에 성검펜스가 우물쭈물하다가 신성력으로 자신을 치료했다.
스스로 치료할 수 있는 상처를 일부러 방치하고 있었다는 걸 확인하게 된 순간이다.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눈으로 보고 났더니 입안이 쓰다 못해 떫다.
'그리고 유지스가 말을 꺼내자마자 상처를 치료한 거로 보아, 녀석이 저렇게 상처를 방치하기 시작한 건 유지스가 죽고 난 이후···. 라고 봐야 하나?'
하기야. 유지스가 곁에 있었다면 성검펜스의 자학적인 행동을 두고 봤을 리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또 하나 궁금증이 떠올랐다.
'유지스를 떠나보낸 후. 성검펜스는 얼마나 혼자 지내왔던 걸까?'
나는 떠오른 질문을 억누르고, 괜스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기왕이면 천막을 쳐서 옷도 좀 갈아입고 싶은데···."
"천막을···, 가지고 다니시나요?"
이런 내 혼잣말에 대답해 준 건 리에나였다.
그렇게 말하는 리에나의 목소리에서 의아함보다 반가움이 더 크게 느껴졌다.
"어디 천막뿐이겠습니까?"
"그럼 주변 정리는 저희가 알아서 할 테니, 시온 님과 유지스 님께서는 저분과 휴마누스 님을 데리고 천막에서 쉬고 계세요."
권유가 아닌 지령에 가까운 말투였다. 이럴 때 리에나의 말을 꺾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성검의 주인]을 통해 충분한 간접 경험을 쌓아온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어, 어?! 아, 아냐! 난 괜찮아! 같이 도울게!"
이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휴마누스가 화들짝 놀라 소리치듯 말했다. 아직 직접 경험이 덜 쌓였나 보다.
리에나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나는 휴마누스에게 심심한 애도를 표하며, 리에나의 잔소리를 BGM 삼아 아공간 주머니에서 천막을 꺼냈다.
아니마와 에드나가 마법으로 땅을 반반하게 고르고, 윈스톤과 푸로르가 천막을 쳤다.
유지스는 세르펜스의 옆을 지키는 와중에도 정령을 불러 천막 치는 작업을 도왔다.
나도 거들 생각으로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섰으나 곧바로 윈스톤에게 저지당했다. 방해만 될 거라나 뭐라나?
'이래 봬도 군 복무를 마친, 어엿한 예비군인데···.'
나는 구태여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정체를 들켰으니 말해도 상관은 없지만, 내가 군대를 다녀왔음을 윈스톤이 알게 된다면 체력 단련의 강도만 강해질 뿐이다.
그런고로 나는 적당히 성검펜스와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빨리 천막이 완성되길 기다렸다.
그 뻘쭘한 시간은 길지 않았다.
적들과 싸우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공터에 순식간에 천막 두 개가 세워졌다.
"그럼 저도 옷 갈아입고 그쪽 천막으로 넘어갈게요."
유지스가 성검펜스를 나에게 양도하며 말했다.
나를 믿고 있는 건지, 성검펜스를 떼어 놓으면서도 유지스는 불안감을 내비치지 않았다.
실로 바람직한 보호자의 자세다.
"어, 음···. 그럼 들어갈까요?"
"······."
다행히도 성검펜스는 순순히 나를 따라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휴마누스도 리에나의 잔소리에서 벗어나 천막에 들어와 한숨을 돌렸다.
윈스톤도 천막에 들어와 성기사 갑옷을 벗고, 평범한 여행자 복장으로 갈아입은 후 밖으로 나갔다.
"너희 둘은 옷 안 갈아입어?"
바닥을 나뒹굴면서 흙먼지를 뒤집어쓴 게 찝찝했는지, 휴마누스가 굳이 옷을 갈아입으며 나와 성검펜스를 향해 질문했다.
그의 말대로 나와 성검펜스는 아직 옷을 갈아입지 않았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내가 성검펜스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탓에, 성검펜스가 내 눈치를 보느라 옷을 갈아입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게 된 거지만.
"옷을 갈아입으려면 성검을 몸에서 떨어뜨려야 할 텐데, 그럼 어떻게 되는 걸까 해서···?"
"그래서 옷을 갈아입자는 말을 꺼내셨던 겁니까?"
성검펜스가 진작 말하지 그랬냐는 듯한 어투로 말하며, 성검이 매인 검대를 풀어냈다.
어쩐지 내가 성검펜스를 쫓아내려던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요! 그냥 신관복이 지겹기도 하고, 피투성이가 된 세르펜스의 모습이 신경 쓰이기도 하고. 그래서 그런 겁니다!"
나도 모르게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소리쳤다.
말을 내뱉고 나서 괜히 말렸나 하는 생각이 잠시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이내 가라앉았다.
빨리 세르펜스가 돌아와 주었으면 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성검펜스 또한 신경 쓰였다.
"그러지 말고 조금 기다려 줬으면 좋겠어. 세르펜스, 네게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
휴마누스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성검펜스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시선을 받은 휴마누스는 어색한 표정으로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네가 그 애칭···을 싫어한다길래 이름을 부르기로 했는데. 혹시 기분 나빠?"
"···아닙니다."
고민 끝에 성검펜스는 한쪽 발로 성검을 밟은 채 옷을 갈아입었다.
특정 업계에서는 저런 걸 포상으로 여긴다던데. 시발검 따위에게 너무 과분한 대우다.
나는 내 눈치를 살피는 성검펜스에게 실컷 밟아도 상관없다고 말해 준 뒤,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고 나서 부지런히 아공간 주머니에서 이것저것 꺼냈다.
우선 대야와 물. 그리고 수건을 성검펜스에게 건네 피를 닦아내게 했고, 세르펜스와 내 아공간 주머니에서 침대를 꺼냈다.
의자도 하나 꺼내어 휴마누스에게 자리를 권했다.
"진짜 별걸 다 가지고 다니는구나?"
"아공간 주머니 뒀다 뭐 합니까? 활용해야지."
아직 호로록 주머니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했는지, 휴마누스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어버렸다.
"들어가도 되나요?"
"넵!"
내 대답이 떨어지자, 유지스가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내부를 둘러보는 유지스에게 성검펜스의 옆자리를 권했다.
나는 내 침대에 앉아 있고, 성검펜스와 유지스는 세르펜스의 침대에 앉았으니. 휴마누스만 혼자 의자에 앉게 된 셈이다.
"어째 나만 따돌려지는 느낌인데···?"
"아주 잘하고 계시네요. 그렇게 눈치를 키워나가면, 휴마누스도 언젠가 일반인의 수준에 오를 수 있을 겁니다."
휴마누스가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는 금방 회복할 테니 내버려 두자.
그보다 급한 문제도 있고.
성검펜스는 피를 닦아낸 물이 든 대야와 수건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나는 그런 녀석에게 사과 맛 사탕을 하나 건넸다.
마음 같아서는 핫초코를 타주고 싶지만, 성검펜스에게 뜨거운 액체를 건네도 괜찮을지 확신이 안 선다.
아까처럼 발작이라도 하다가 핫초코를 쏟아 화상이라도 입으면 큰일이다.
"드세요. 세르펜스가 가장 좋아하는 사과 맛 사탕입니다."
내가 설명을 덧붙였지만, 성검펜스는 멀뚱히 사탕을 바라만 보았다.
딱히 경계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문제는 사탕을 먹을 의사도 없어 보였다.
"유자 사탕은 어때요? 아니면 유자 에이드라도 한 잔 드릴까요?"
"초코칩 쿠키도 있습니다! 마카롱, 타르트, 케이크. 뭐든 말만 해요!"
"그러고 보니 아니마에게 맡겨 놓은 브라우니가 있는데, 지금 받아 올까?"
우리는 전투적으로 성검펜스에게 각종 디저트를 권했다.
하지만 성검펜스는 뭐 어쩌란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만 깜빡거릴 뿐이었다.
"세르펜스는 단 음식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
"일단 한 번 드셔 보세요. 아! 그냥 다 같이 사탕 하나씩 입에 물고 대화할까요?"
내가 사탕을 통째로 꺼내며 말하기 무섭게 유지스는 곧장 행동에 들어갔다.
사탕 통에서 유자 맛 사탕을 골라 자신의 입에 쏙 넣은 후, 사과 맛 사탕을 집어 성검펜스의 입가에 들이밀었다.
그런 유지스의 행동에 성검펜스는 몸을 뒤로 젖히며 손으로 사탕을 잡아챘다.
'이름이 아닌 성으로 부를 때 눈치챘지만, 서로 사탕을 먹여줄 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나 보네.'
그래도 성검펜스는 사탕을 입에 넣긴 했다. 자신이 사탕을 먹는 결말을 피할 수 없음을 직감한 모양이다.
그러나 성검펜스가 사탕의 단맛에 놀라 눈을 번쩍 뜨더니, 발을 동동 구르며 좋아하는 일은 없었다.
나는 포도 맛 사탕을 꺼내 휴마누스에게 건네준 후, 계피 맛 사탕을 입에 물었다.
오늘따라 계피 맛 사탕이 너무 맛이 없다. 물렸나 보다.
"그래서 세 번째 시련은 어째서 받지 못한 겁니까?"
내 물음에 성검펜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너무 다짜고짜 본론으로 돌아왔나 싶은 감이 없잖아 있지만, 성검펜스가 말을 돌리기 전에 선수 치려면 이럴 수밖에 없다.
"혹시 세계수가 시련을 안 내려주겠다며 인성질 했어요?"
"그런 일이 자주 있습니까?"
"했네, 했어. 인성질 했어. 그 망할 놈의 인성 나무가···!"
"인성질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세계수께서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내가 사탕을 한쪽 볼에 밀어 넣고 이를 으득으득 갈면서 화를 표출하자, 성검펜스가 세계수를 감쌌다.
그러면서 모든 게 자신의 잘못이라는 듯 시선을 피했다.
이렇게 착하고 상처를 잘 받는 여린 아이에게 세계수는 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마왕도 울고 갈 세계수의 인성질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런 인성 나무가 엘프들에게 오냐오냐 떠받들어지니까, 이 대륙에 망조가 든 게 틀림없다.
"잘못이 없긴 무슨 잘못이 없습니까?! 세계수 역할이 성검의 주인에게 조언해 주는 거라면서요! 그런데 조언은커녕 시련조차 안 내려줘? 그거 근무 태만입니다! 다른 세상 출신인 저도 이렇게 대륙을 위해 분골쇄신하며 노력하고 있는데!"
"부정할 수가 없네요. 이번에는 세계수 님께서 잘못하셨어요. 그런 분이실 줄은 몰랐는데···."
급기야 엘프인 유지스마저 세계수를 손절하기에 이르렀다.
"난 두 번 연속으로 세계수와 대화 한 마디 못 나눠 봤어. 그래서 세계수가 말할 수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는걸? 아! 그중 한 번은 꿈을 통해서 본 거지만···. 어쨌거나 네가 잘못한 건 절대 아니야!"
세계수 인성질 피해자 동료인 휴마누스가 짠하다는 눈으로 성검펜스를 바라보며, 그를 위로했다.
이런 우리의 반응에 성검펜스는 멍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거렸다.
"세계수께서는 정말로 아무런 잘못이···."
"그렇게 마음 써 주시지 않아도 저는 괜찮아요. 그러니 세계수 님을 감싸느라, 자신을 탓하는 행동은 하지 말아 주세요."
유지스가 성검펜스의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성검펜스의 표정에 우울함이 아닌 새로운 감정이 떠올랐다. 그 감정의 이름은 당혹이었다.
"저희가 아르케 왕국에서 다시 만났을 때. 위리디아 님께서 저를 알아보실 수 있었던 건, 세계수께서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
"······."
"······."
세계수를 열심히 욕했던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자신 때문에 세계수를 감쌀 필요 없다며 오버했던 유지스는 얼굴을 붉혔으며, 휴마누스는 그냥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천막 안은 달각달각, 사탕 굴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