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9회
71. 공작님과 성검 (11)
나와 유지스가 자신을 두고 무슨 얘기를 나누든, 성검펜스는 신경 쓰지 않고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식사를 끝마쳤다.
나는 빈 그릇들을 모아 쟁반에 올리고 적당히 한쪽 구석에 치워 놓았다.
그러다가 악숭 세력의 함정에 걸려 오후 3시의 간식 타임을 놓치고 말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세르펜스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상황 자체만 놓고 보자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검펜스가 사탕에 아무런 감흥도 보이지 않았고 식사에도 별 반응이 없었으니.
이제 남은 것은 디저트뿐이다.
"휴마누스가 산 브라우니. 많이 달아요?"
"초콜릿이 들어갔으니까, 아무래도 그렇겠지?"
휴마누스가 디저트에 관해 쥐뿔도 모르는 티를 냈다.
초콜릿이 들어가면 단맛이 나는 게 맞지만, 초콜릿이 들어간 디저트가 무조건 '많이' 단 것은 아니다.
'심한 우울증을 겪는 사람이 입맛을 잃는 건, 미각이 둔해진 영향도 있다던데···.'
그런 점에서 미루어 생각해 봤을 때.
역시 내가 사 둔 디저트를 먹이는 게 최선인 것 같다.
"지금 가져올까?"
"아니요. 오늘은 제가 준비한 걸 먹이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나는 휴마누스의 말에 단호히 반대하며 아공간 주머니를 열었다.
중탕한 초콜릿과 버터에 설탕, 계란, 중력분을 넣어 만든 쫀득한 퍼지 쿠키를 마시멜로 잼으로 샌드한 뒤. 그 위를 초콜릿으로 한 번 더 코팅한.
그 이름을 듣기만 해도 강한 단맛을 낼 것 같은, '초코 퍼지 마시멜로 쿠키 샌드'를 꺼낼 때가 되었다.
'원래는 세르펜스가 기특한 짓을 하면 꺼내 줄 생각이었는데···.'
어지간한 단맛으로는 성검펜스의 반응을 끌어내기 힘들 것 같으니 어쩔 수가 없다.
세르펜스 몫으로 한두 개쯤 남기면 되려나?
아니면 공작저 주방 식구들에게 시식시킨 뒤, 비슷하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 않을까 한다.
나는 머릿속으로 철저한 계산을 끝마치고, 깔끔하게 개별 포장된 쿠키 샌드를 성검펜스에게 건넸다.
"드시죠."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이번에도 성검펜스는 사양의 말부터 꺼냈다.
앞서 먹을 것을 사양했을 때, 내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두 번이나 봤으면서 이러는 이유가 뭘까?
또다시 협박이라는 강수를 둬야 하나 고민하는 그때. 성검펜스가 한발 먼저 입을 열었다.
"신의 사자께서는 어째서 제게 이런 것을 권하시는 겁니까? 식사는 생존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이 행해야 하는 불가결한 요소였기에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나···. 제가 그것을 섭취해야 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눈치챌 수 있었다.
강제로 먹인다는 협박이 유효했던 게 아니라, 성검펜스가 '강한 권유'를 거절하지 못했을 뿐이었다는 사실을.
심지어 그마저도 식사가 생존에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마지못해 받아들인 거였다.
애초에 내가 성검펜스에게 억지로 무언가를 먹인다는 건 성립될 수 없었다. 힘의 차이가 너무 크다.
세르펜스라면 내가 다칠까 봐 저항도 못 하고 당해주겠지만, 성검펜스는 아니었다.
"정신 건강에 좋은 약이라 생각하고 드세요. 음식이 곧 보약이라는 말도 있잖···, 여기는 없나? 아무튼 좋은 겁니다."
"시온이 열성적으로 남을 먹이는 게, 그런 이유였군요. 천계에서는 다들 시온처럼 먹는 것을 중시하나 봐요?"
유지스가 내 말에 관심을 보였다.
내가 천계 출신이 아니라는 걸 밝혀야 할까? 아니면 성검펜스가 간식을 먹도록 설득하는 것에 집중할까?
고민은 짧았다. 오해가 커지기 전에 한 번 짚어주고 가는 게 낫다.
"저는 신 룩스메아와 눈곱만큼도 연관이 없는, 완전히 다른 세상 사람입니다. 이를테면 외국계 용병 같은 거죠."
"아! 이해했어요. 그러니까 신 룩스메아 님께서는 뒤늦게나마 세르펜스의 복지를 챙겨주기 위해, 아동복지학이 발달한 세상의 전문가를 초청한 거로군요!"
유지스가 짝 소리 나게 손뼉을 치며 말했다.
이곳에 비하면 내가 살던 세상의 아동 복지가 훨씬 낫긴 하다.
하지만 그곳 또한 어려운 처지에 놓인 아이들이 많았다.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기에는 양심에 걸렸다.
더군다나 나는 전문가도 아닌 학생이다.
이래저래 유지스의 말에 동의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부정하자니 성검펜스에게 신뢰를 잃을 것 같다.
자고로 보호자는 아이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법.
나는 유지스를 향해 눈을 두어 번 깜빡여 준 후, 하던 일. 그러니까 성검펜스에게 쿠키 샌드 먹이기에 재착수했다.
"전문가인 제가 하는 말입니다. 믿고 드세요."
"···저는 아동이 아닙니다."
"이렇게 약을 안 먹으려고 떼쓰는 거 보면 아이가 맞는 것 같은데요?"
"그동안 저를···, 이런 식으로 다뤄 오셨던 겁니까?"
유지스의 말에 곧장 긍정하지 못하고, 잠시 시간을 끈 탓일까?
성검펜스가 벌써 나를 불신의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두터운 우울감의 벽을 뚫고, 성검펜스가 나를 향해 내비친 첫 감정이 불신이라니. 서운한 감정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먹겠습니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성검펜스가 미간을 찡그리며 내 손에 들린 쿠키 샌드를 가져갔다.
어쨌든 먹을 마음이 생겼다니 다행이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먹어 보고 맛있으면 말씀하세요! 다른 간식들도 많이 있으니까!"
나는 활짝 웃으며 그리 말했다.
성검펜스가 꼼지락거리며 쿠키 샌드 포장지를 벗겨냈다. 아주 중요한 순간이다.
그렇기에 나는 녀석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충 쿠키 샌드를 집어 유지스와 휴마누스에게 나눠 주었다.
이윽고 성검펜스가 '초코 퍼지 마시멜로 쿠키 샌드'를 천천히 입가로 옮겼다.
느릿한 그 동작이 마치 CF 속, 배우가 음식을 먹는 장면을 강조하려고 일부러 저속 재생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나와 유지스가 앉아있는 방향을 힐끔 곁눈질한 뒤, 입을 열어 쿠키 샌드를 베어 물었다.
끄트머리만 살짝궁.
"그렇게 드셔서 어디 맛이 제대로 나겠어요? 더 팍팍 드셔야죠!"
놀랍게도 이건 내가 한 말이 아니었다.
내가 채 입을 열기도 전에 유지스가 소리쳤다.
갑작스러운 유지스의 외침에 성검펜스가 놀랐는지 움찔 몸을 들썩였다. 그러고는 눈을 조금 크게 뜨고 유지스를 쳐다보았다.
"왜,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세요?"
예고도 없이 가해진 성검펜스의 눈빛 공격에 유지스가 귀를 파닥거렸다.
손에 힘이 들어갔는지, 내가 유지스에게 건넸던 쿠키 샌드는 볼품없이 뭉개져 있었다. 그나마 포장지를 뜯기 전이라 다행이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성검펜스는 누나의 마음에 불을 질러 놓고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쿠키 샌드를 깨작거리기 시작했다.
저래서야 마시멜로 잼까지 도달하는 데 한참 걸릴 것 같다.
나는 시선을 돌려 휴마누스를 바라보았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길래 뭐 하는 건가 했더니, 한 입 베어 문 쿠키 샌드를 재포장 중이었다.
"미안, 너무 달아서 못 먹겠더라···."
"한 번 뜯었으면 끝까지 드셔야죠. 애가 보고 따라 배우면 어쩌시려고요?"
내 대답을 들은 휴마누스가 성검펜스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포장지를 도로 벗겨냈다.
성검펜스에게 달다구리를 먹이기 위한 내 계획에 동참해 주기로 한 거다.
"그런데 너는 안 먹어?"
"현재의 세르펜스가 돌아오면 먹을 것을 남겨 놔야 하니까요."
"그럼 나랑 나눠 먹자! 내가 절반 나눠 줄게!"
휴마누스가 몹시나 반가워하며 쿠키 샌드를 반으로 잘라 내게 건넸다.
이건 눈새 짓일까? 아니면 나도 당해보라는 심보일까?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거절한다면 성검펜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는 불 보듯 뻔했다.
성검펜스에게 본인도 먹지 못할 음식을 남에게 준 사람이라는 인식을 남기고 싶지 않다.
"와, 아···! 기뻐라! 그렇지 않아도 이 초코 퍼지 마시멜로 쿠키 샌드를 꼭 먹어보고 싶었는데!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그럼 절반으로는 아쉽겠네요. 제 것도 조금 드릴게요."
어느새 진정한 유지스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뭉개진 쿠키 샌드를 잘라서 내게 건넸다.
휴마누스와 유지스. 두 사람 모두 나에게 큰 조각을 양보한 탓에, 나는 졸지에 이 다디단 쿠키 샌드를 1.25개나 먹게 생겼다.
'꾀부리지 말고 그냥 한 개 꺼내 먹을걸···.'
나는 쿠키 샌드를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정말 미친 듯이 달았다. 이럴 거면 초콜릿에 설탕을 버무려 먹지, 뭐 하러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성검펜스는 느리지만 꾸준하게 쿠키 샌드를 먹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맛을 음미하는 것처럼 보였다.
역시 성검펜스도 세르펜스는 세르펜스라서 단것을 좋아하는 건 똑같은 모양이다.
"참. 그런데 휴마누스, 아까 세르펜스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나는 휴마누스에게 질문했다.
사래라도 들렸는지 휴마누스가 쿨럭거리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물이라도 떠다 줄 텐데. 애석하게도 내 양손에는 쿠키 샌드가 들려있었다.
"그 얘기는 조금 이따가 하면 안 될까?"
"지금이 저녁인데, 이따 언제요?"
"······."
휴마누스는 내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곤란하다는 시선이 내게 닿았다.
나는 그 시선을 못 본 척하며, 휴마누스가 내게 떠넘긴 쿠키 샌드를 크게 한 입 베어 먹었다.
쿠키 샌드의 원한 때문에 내가 이러는 건 절대 아니다.
내가 떠밀어주지 않으면 휴마누스가 끝까지 말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별건 아니고···."
저런 식으로 운을 띄우는 경우, 십중팔구 '별것'이 맞더라.
"나는 뭘 했던 걸까 싶어서···?"
문맥을 전당포에 맡겼나 싶을 정도로, 맥락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휴마누스가 무슨 뜻으로 저런 말을 했는지 이해 못 할 사람은 이 천막 안에 없다. 있다면 휴마눈새 뿐이다.
"전하께서는 황제가 되어 제국을 통치하셨습니다."
성검펜스가 매우 당연한 대답을 했다.
물론 휴마누스가 바라던 대답은 아니었다.
"그런 게 아니라, 내가 널 도왔다면 어떻게 도왔는지. 아니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는지. 그걸 묻고 싶었어."
"전하께서는 황제로서 해야 할 도리를 다하셨습니다. 선대 황제께서 돌아가신 뒤 흔들리는 제국의 정세를 바로잡으셨고, 술렁이는 민심을 다독였으며, 국가의 치안에 힘쓰셨습니다."
성검펜스가 무미건조하게 대답한 뒤 쿠키 샌드를 야금야금 베어 물었다.
맛있나 보다. 휴마누스를 생각하면 이러면 안 된다는 건 알지만, 뿌듯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래. 그것들은 한 나라의 통치자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 하지만 네 친구로서의 나는?"
"······."
성검펜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눈을 깜박거렸다.
휴마누스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성검의 선택을 받고 혼란스러웠을 때, 네가 해 준 말이 정말 큰 힘이 되었어. 그리고 동시에···, 부끄러웠어."
나는 선택의 날, 세르펜스를 통해 전해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세르펜스는 그에게 '아직'이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휴마누스는 '불가항력'이라 대답했다.
그 후에는···.
'부끄러울 만도 하지.'
나였으면 그 자리에서 수치사했을지도 모르겠다.
휴마누스의 그 거시기한 논란은 한동안 제국 제일의 이슈였고, 황실에는 '그것'에 좋다는 선물들이 대량으로 보내졌다.
그런데도 휴마누스는 힘이 되었다고 말했다.
'잠깐만, 그렇다는 건···?'
정말로 휴마누스는 거시기한 문제로 고민했고, 귀족들이 합심하여 보내준 선물들이 그곳의 활기를 되찾아 준 걸까?
"제가···, 무슨 말을 했습니까?"
성검펜스가 휴마누스의 말에 관심을 보였다.
정말 휴마누스는 그것을 말할 셈인가? 자신의 입으로 직접? 하필이면 이런 상황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휴마누스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어. 자신들이 살아가는 대륙의 운명을 단 한 명에게 떠넘기는 건 무책임하다고 말했어."
"아, 그거."
나는 휴마누스의 이어진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휴우 하고 숨을 내뱉으며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자니, 휴마누스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너 방금 뭘 떠올린 거야?"
"방금 휴마누스가 떠올린 그거요."
"내 물건은 건강해!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휴마누스의 그쪽 안부는 알고 싶지 않습니다! 게다가 여기 유지스도 있는데, 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내 합당한 의견에 휴마누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쿠키 샌드가 들려있지 않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유지스, 미안해."
"괜찮아요. 그러니까, 저기···. 힘내세요!"
선택의 날. 그를 응원하던 수많은 목소리가 떠오른 것일까?
휴마누스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날 '그 발언'을 한 사람은 세르펜스였는데, 어째서 죄 없는 나한테 저러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