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572화 (572/925)

571회

71. 공작님과 성검 (13)

* * *

처음 성검펜스가 '이론'을 언급했을 당시. 신성력으로 날개를 만들어 내는데, 이론 공부가 굳이 필요한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기껏 해봐야 '신성력을 이렇게 저렇게 움직여서 요리조리 여차여차 한다.' 정도의 설명만 늘어놓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게 웬걸. 성검펜스의 강의는 고작 그런 내용이 아니었다.

다양한 조류의 날개 구조와 비행 시 깃털 하나하나의 역할. 상승과 하강, 활상 비행과 정지 비행 시 날개의 움직임. 기타 등등.

무슨 조류학자가 따로 없었다.

'마치 조류학 강의를 청강하는 기분이었어···.'

실제로 청강해 본 적은 없지만, 듣고 싶었던 적도 없는 강의를 판타지 세상에 와서 듣게 될 줄이야.

이런 이론을 배우게 될 거라고 상상조차 못 한 건 휴마누스도 마찬가지로 보였다.

휴마누스는 '어, 어?' 소리만 연발하며 멍하니 앉아있었고, 내가 종이와 펜을 건네주자 미친 듯이 필기하기 시작했다.

성검펜스도 종이와 펜을 받아다가 디테일하게 날개와 깃털을 그리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 덕분에 강의의 질이 수직 상승했다.

'세르펜스는 대체 못 하는 게 뭐지?'

나는 혀를 내두르며 아공간 주머니에서 초를 하나 꺼냈다.

그리고 반쯤 녹은 초에 붙은 불을 새로운 초로 옮긴 뒤, 기존의 것은 불어서 꺼뜨렸다.

"이제 잘 건데 뭐하러 촛불을 새로 붙여?"

휴마누스가 침대에 몸을 눕히며 질문했다.

항상 침대를 소지하고 다니는 우리 일행과 달리, 성검 일행은 야영을 자주 하면서 침대도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참 준비성도 없다.

그런 이유로 휴마누스가 몸을 눕힌 침대는 내 것이다.

세르펜스의 넓은 침대는 유지스, 푸로르, 리에나. 세 명이 쓰기 위해 가져갔고, 성검펜스는 유지스의 1인용 침대에 자리를 잡았다.

아니마는 에드나의 침대를 함께 쓴다는 것 같고, 윈스톤이야 덩치가 산만 하니 혼자 잘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퍼즐 맞추기도 아니고···.'

덧붙여 나는 휴마누스와 함께 자기로 했다.

내 침대는 1인용이긴 하나, 슈퍼 싱글 사이즈라서 옆으로 누우면 어떻게든 낑겨서 잘 수 있으리라.

사실 체격으로 따져 보자면, 휴마누스가 따로 자는 게 맞다.

세르펜스가 한 어깨 하긴 해도 휴마누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호리호리한 편이니까.

하지만 성검펜스가 격렬하게 반대하며 땅바닥에서 자겠다고 우겨댄 탓에, 이러한 결과가 나오게 된 거다.

"화장실 가려고 일어났다가 넘어지면 큰일이잖습니까? 저는 휴마누스랑 다르게 평범한 사람의 시야를 가지고 있어서, 어두워지면 앞이 잘 안 보이거든요."

"그럴 수도 있겠네."

휴마눈새가 한 치의 의심 없이 내 변명을 믿어주었다. 평소에는 눈치가 없어서 답답했지만, 이럴 땐 참 편하구나 싶다.

나는 휴마눈새에게 구석으로 가라는 손짓을 하며 질문을 하나 던졌다.

"그런데 휴마누스는 잠버릇 심해요?"

"아니. 그러는 넌?"

휴마누스가 대답과 동시에 반문했다.

내 잠버릇은 굉장히 활동적이다.

자고 일어나면 머리와 발 위치가 바뀌어 있는 건 기본이요, 옆 사람 몸에 팔다리를 올리는 건 물론이거니와 발로 차기도 한다.

하지만.

"오늘은 얌전해져 볼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오늘은 자지 않을 거니까. 잠버릇 또한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세르펜스는 피곤할 때면 악몽을 꾸었다. 그런데 현재 세르펜스의 몸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다.

그러니 성검펜스가 오늘 악몽을 꾸는 건 기정사실이나 다름없다.

어쩌면 성검펜스는 피곤하지 않아도 악몽에 시달릴 가능성이 있다.

자기 직전에 초를 새것으로 바꾼 것도 그 때문이다.

고작 촛불 하나로 악몽을 몰아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빛이 있다면 성검펜스가 악몽을 꾸는지 확인하고, 그를 깨우러 갈 수는 있다.

"얌전해져 볼 생각이라니···?"

"자, 그럼 어서 잡시다! 모두 안녕히 주무세요!"

휴마누스가 상체를 일으켜 세우며 불안하다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나는 그에 대답하는 대신, 천막 안의 모두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건네고 이불을 덮었다.

그 뒤로도 휴마누스는 몇 번인가 나를 흔들며 그게 무슨 뜻이냐며 질문했다.

내가 입을 꾹 다물고 무시로 일관하자, 휴마누스는 포기했는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고는 내게 등을 보이며 누웠다.

그리고 1분 만에 다시 일어나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시온, 저쪽 보고 자면 안 돼?"

내가 자신 쪽을 보며 누워 있는 게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그럴 만도 하다.

나도 마음 같아서는 돌아눕고 싶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잠들지 않으려면 눈을 뜨고 있어야 하는데, 반대쪽을 보면 성검펜스와 눈이 마주칠 테니까.

"저는 항상 왼쪽을 보면서 잡니다. 반대쪽으로 누우면 잠이 안 와요."

"그럼 나랑 자리 바꿀까?"

"아니요. 저는 잘 때 항상 왼쪽으로 굴러서요. 제가 떨어지지 않도록 휴마누스가 벽이 되어 주셔야겠습니다."

내 대답에 휴마누스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휴마누스는 그렇게 10초가량 고민하다가 윈스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윈스톤 경, 나와 자리를 바꿔 주지 않겠나?"

"왜 죄 없는 우리 후배를 괴롭히고 그래요?"

"나는 괴롭혀도 괜찮고?"

"원래 후배는 아껴줘야 하는 법입니다."

"친구도 아껴줘!"

"안 그래도 세르펜스와 유지스는 충분히 아껴주고 있습니다."

"······."

휴마누스가 불퉁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다가 말없이 등 돌려 누웠다.

아무래도 삐졌나 보다. 내일 아침에 사과하며 달래줘야겠다.

촛불이 일렁거리니 휴마누스의 머리칼도 노을빛으로 반짝였다. 빨간색 같기도 하고, 주황색 같기도 하고, 어떨 땐 또 황금색 같다.

그동안 금붕어 색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보니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연상되었다.

모닥불 앞에서 불멍하는 캠핑족이 되었다고 생각하며, 휴마누스의 뒤통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차! 잠들 뻔했네!'

나는 몽롱해지려는 정신을 붙잡고 눈꺼풀에 힘을 줬다.

휴마누스의 어깨가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거로 보아 꽤 깊이 잠들었나 보다. 작은 뒤척임은 있었지만, 그의 잠버릇은 정말로 얌전했다.

평소 행동만 보면, 팔다리를 큰 대(大) 자로 뻗어서 옆 사람을 다 밀어내며 잘 것 같은데.

새삼 휴마누스가 곱게 자란 도련님처럼 느껴졌다.

'그건 그렇고 조용하네?'

이제 슬슬 성검펜스가 악몽에 시달리며 낑낑댈 때도 되었건만. 어째서인가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청각에 신경을 집중해 보았으나 들리는 소리라고 해봐야, 가까이서 자는 휴마누스의 숨소리뿐이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결단을 내리기로 했다.

나는 괜스레 으으음 하는 소리를 흘리며, 뒤척거리다가 몸을 돌려 누웠다.

천막 내부는 여전히 조용했다.

'혹시 눈을 뜨자마자 성검펜스와 눈이 마주치는. 그런 호러 영화 단골 장면이 펼쳐지는 건 아니겠지?'

눈을 뜨기에 앞서, 나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 어떤 서스펜스적 상황이 내게 닥쳐와도 소리를 지르지 않으리라. 그렇게 충분히 마음의 준비를 한 뒤, 슬쩍 실눈을 떴다.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도 나를 반겨주는 건 이불 뭉치였다. 성검펜스의 녹색 눈동자가 아니라.

녀석이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잘 줄 알았으면 그냥 이쪽을 보고 있을 걸 그랬다.

일시적으로 이불펜스가 된 성검펜스는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불 속에 베개라도 넣어 놓고 자리를 비운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하지만 베개는 이불 밖으로 나와 있었다.

베개도 안 베고 몸을 한껏 웅크리고 있는 걸 테다.

등 뒤에서 휴마누스가 잠결에 입맛 다시는 소리를 흘리며 뒤척였다.

그래도 이불펜스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어째 느낌이 싸하다.

살아있는 생명체라면 숨을 쉬는 게 당연하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이불이 들썩여야 정상이다.

'이 자식, 설마···?'

나는 불안감으로 요동치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신발을 대충 구겨 신고 조심스럽게 다가가 성검펜스가 뒤집어쓴 이불을 조심히 들춰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이불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여태껏 미동조차 안 하던 이불이 이제서야 큰 폭으로 오르내리며 들썩거렸다. 가쁜 숨소리도 들려왔다.

성검펜스는 분명히 이 안에 있다.

'이 자식이 진짜···!'

나는 울컥 치밀어 오르는 화를 애써 억눌렀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이불 뭉치에 가까이 대고, 그 속에 있을 성검펜스를 향해 작은 목소리로 협박했다.

"놓으세요. 소란을 피워서 모두를 깨우고 싶은 게 아니시라면."

반대쪽에서 잡아당기던 힘이 갑자기 사라진 탓에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넘어지거나 소리를 지르지 않은 내가 다 기특하다.

그렇게 속으로 나 자신을 칭찬해준 뒤 시선을 내렸다.

몸을 웅크린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 있는 대로 목을 움츠린 성검펜스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성검펜스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녀석의 턱을 붙잡고 살짝 들어 올렸다. 소란을 피울 거라는 협박이 유효했는지 저항은 없었다.

일렁대는 촛불이 성검펜스의 가느다란 목을 비추었다. 하얗고 깨끗해야 할 목선에 보기 흉한 얼룩이 자리하고 있었다.

손 모양으로 난 멍 자국이다.

나도 모르게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소리를 내뱉기 직전.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하아···."

목소리를 담아내지 못한 한숨이 목구멍을 빠져나왔다.

나는 성검펜스의 턱을 놓아주고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다른 손에 들린 이불도 대충 침대 위로 내던졌다.

"나가죠. 잠도 안 오는 것 같은데, 저랑 얘기나 합시다."

"······."

성검펜스가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촛대를 들고 천막 밖으로 나왔다. 성검펜스도 내 뒤를 따라 나왔다.

불침번은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누군가 일정 거리 안으로 들어오면 알림이 울리는 마법진이 설치되었고, 유지스의 정령까지 대기시켜두었다.

그러니 모두 안심하고 깊이 잠들어 있겠지.

'이대로 대화를 나눠도 괜찮겠지만···.'

혹시 모르니 완벽함을 도모하기로 했다.

성검펜스에게 촛대를 맡긴 후. 임시 보관하고 있는 세르펜스의 아공간 주머니에서 마차를 꺼냈다.

말이 없었기에 달릴 수는 없지만, 남몰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밀실로는 제격이다.

나는 먼저 마차에 올라타 내부에 달린 마법등을 켰다. 그리고 성검펜스에게 올라오라고 손짓했다.

녀석이 촛불을 불어 끄고 마차에 올라타 문을 닫았다.

그 모습을 확인한 후, 나는 내 아공간 주머니에서 방음 스크롤을 하나 꺼내어 찢었다.

"대체 남의 몸으로 뭐 하는···!"

"죽을 생각은 없었습니다."

성검펜스가 내 말을 끊었다.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나왔다.

목을 졸라 놓고 죽을 생각은 없었다?

'그래, 그렇겠지.'

호흡곤란을 일으킬 정도로 제 목을 졸라서 자살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 전에 기절해버리고 말 테니까.

녀석이 정말 죽을 작정이었다면, 단번에 제 목을 부러트렸을 거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악력이 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이번만은 설명을 꼭 들어야겠습니다. 대체 왜 그러셨습니까?"

"······."

"그 몸은 세르펜스의 것이지만, '당신'의 몸이 아니잖아요?"

"죄송···, 합니다."

성검펜스가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그 모습을 봤더니 마음이 조금 약해지기는 개뿔. 죄송할 짓을 왜 하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참아냈다.

눈앞의 녀석은 내가 애지중지 키운 아이를 다치게 했지만, 상처 입은 어린아이이기도 했다.

유지스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어갔으나, 그 마음의 문이 완전히 열리기도 전에 그녀를 잃었고. 휴마누스와 끝내 화해하지 못한 세르펜스였다.

그리고 나를 만나지 못한 세르펜스였다.

내가 처음 만난 세르펜스보다 연약하고, 더 많은 상처를 입은 세르펜스였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참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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