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578화 (578/925)

577회

71. 공작님과 성검 (19)

성검펜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서서히 윤곽이 그려졌다.

사람들의 비난을 감내하며, 의지할 사람 하나 없이 혼자서 부정적인 생각을 키워나가고.

자신을 두려워하는 이들의 시선을 두려워하며 상처받고.

그럼에도 그들을 지키며 대륙을 위해 싸워나가는 것 말고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계속해서 싸워나갔겠지···.'

그러다가 큰 상처를 입게 된 후, 부정적인 생각을 고통으로 덮은 것이든.

충동적인 자해 후, 고통을 통해 부정적인 생각을 잠시나마 덮어둘 수 있음을 깨달은 것이든.

성검펜스의 전투 방식은 점차 자기 파괴적으로 변화해 갔을 거다.

'아까 악마 남매와 싸웠을 때처럼.'

오랫동안 치열한 접전을 펼친 것도 아니건만. 그 짧은 시간 만에 녀석의 몰골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가뜩이나 안 좋은 소문이 돌고 있는 와중에 그런 모습을 보았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뻔하디뻔했다.

'···꺼림칙하게 여기며 소름 끼쳐 했겠지.'

그들은 성검펜스가 겁에 질려서, 두려움을 잊고 싶어 고통을 자처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테니까.

그럴수록 성검펜스의 상태는 더욱 악화되어 갔을 거다. 그에 따라 사람들의 시선은 더더욱 싸늘해져 갔을 테고.

'완전한 악순환이네.'

한참 동안 맞은편에 앉은 녀석의 등을 토닥이다 보니 슬슬 팔이 아파져 오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내가 지치는 것보다 성검펜스가 울음을 그치는 게 빨랐다. 가느다란 떨림이 멎는가 싶더니, 녀석이 웅크렸던 몸을 폈다.

붉어진 눈가는 눈물범벅이었고 코끝도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초점 없는 눈동자는 흐리멍덩했다.

상대가 세르펜스였다면 직접 눈가를 닦아줬을 거다. 그리고 코에 손수건을 가져다 대며 '흥! 하세요.'라고 말했겠지.

하지만 성검펜스와는 스스럼없이 코를 풀어줄 만큼 친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성검펜스가 양손으로 얼굴을 덮느라, 옆에 내려놓았던 손수건을 가리키며 말했다.

"닦아요."

성검펜스는 내가 시키는 대로 손수건을 집어 눈가와 뺨에 흐른 눈물을 닦아냈다.

혹여 우울함에 잠식되어 버린 탓에 내 말을 못 듣는 건 아닐까 걱정했으나, 그 정도는 아니었나 보다.

내 존재를 잊지 말라고 열심히 등을 토닥여 준 보람이 있었다.

그렇게 내가 안도하는 사이. 성검펜스가 손수건과 마찬가지로 옆에 놓아두었던 촛대를 다시 손에 들었다.

'그 이후에 일어난 일은 말할 생각이 없어 보이고···. 바로 마차에서 나갈 생각인가?'

아무리 울음은 그쳤다지만, 완전히 진정된 건 아니었다. 녀석에게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해 보였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말을 붙였다.

"사람들이 참 멍청해요. 그렇지 않습니까?"

성검펜스의 시선이 내게로 와 닿았다.

멍한 두 눈동자가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하느냐고 묻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내 멋대로 의미를 부여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녀석에게 말해주고 싶다.

"자신들을 지켜주는 사람이 누군데,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악숭 세력이 퍼트린 소문 따위에 휘둘려 세르펜스를 두려워했잖아요. 사람들은 세르펜스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내 비아냥거림에 성검펜스의 얼굴이 점차 당혹으로 물들어갔다.

아무리 내가 사람들의 행태에 불만을 토로했거니와, 저렇게까지 반응할 필요가 있나 싶다.

그런 의문도 잠시.

"신의, 사자시여···. 갑자기, 그게 무슨···?"

나를 부르는 성검펜스의 호칭을 통해, 그가 어째서 이토록 당혹스러워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다, 나는 신의 사자였던 것이다!

그것도 무려, 신이 직접 다른 세상에서 초청하여 세르펜스를 돌보라고 대륙에 내려보낸!

'이런 내가 사람들이 멍청하니 어쩌니 하며 대륙의 존재들을 싸잡아 비난했으니···.'

그저 위로받고 싶어서 하소연을 조금 했더니, 신의 사자가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악감정을 품었다.

성검펜스가 그런 식으로 받아들였대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나는 서둘러 양손을 내저었다.

"아! 오해하지 마세요. 그렇다고 제가 대륙을 어쩌겠다는 건 아니니까. 그럴 힘도 없고."

"······."

"있어도 안 합니다. 수많은 아동이 고통받게 될 테니까. 제 전공 기억하시죠? 아동 복지."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세르펜스라면 그런 의문을 품지 않았을까 해서 선수 친 겁니다."

"······."

"아, 하하···."

나는 밀려드는 뻘쭘함에 어색하게 웃었다. 괜히 변명했다가 분위기만 이상해졌다.

잠시 끊긴 얘기를 이어나가기에 앞서, 대륙을 적대할 생각이 없음을 적극적으로 어필할 필요성을 느꼈다.

"크흠! 뭐, 그들도 나름대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죠. 직접 세르펜스에게 접근하여 알아가기에는 악숭이들의 표적이 될까 두려웠을 테니. 그들이라고 별수 있었겠습니까?"

내 입으로 이렇게 말하긴 했지만, 세르펜스의 보호자로서 반감이 치솟았다.

"아니, 근데! 사람들이 잘못하긴 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사람에게 그러면 안 되지!"

"······."

"자꾸 오락가락하며 헷갈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진짜, 상황은 이해하겠는데 해도 너무하잖아요?"

"······."

"흠, 흠! 어쨌거나 그들이 세르펜스에 관해 잘 몰라서, 그런 헛소문을 믿게 된 거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세르펜스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지껄이는 얘기들에 더는 상처받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서요."

"······."

뭐라도 말을 해 주면 좋으련만.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며 떠들고 있노라니,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일까 싶어졌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나는 대놓고 삐딱선을 타기로 했다.

"솔직하게 말해봐요. 세르펜스도 그들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었을 거 아닙니까? 배은망덕한 놈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럴···리가 없지 않습니까."

"왜 없어요? 있어야지."

내가 척하니 팔짱을 끼고 다리를 쩍 벌려 거만한 자세로 건들건들 말하자, 성검펜스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위험에서 구해줬더니 감사를 표하기는커녕, 그것을 제 권리처럼 구는 이들에게 화도 안 나요?"

"그들은 보호 대상이고, 저는 그들을 지키고 구해야 할 책임이···."

"없습니다, 그딴 거. 설령 있다고 치더라도 필수는 아닙니다."

내 발언에 성검펜스가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혼란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성검의 주인이 해야 할 일은 대륙에 닥쳐올 재앙과 맞서 싸워, 그것을 물리치는 겁니다. 왜 그런 짓을 해야 하냐? 아주 간단합니다. 재앙을 내버려 두면 자신이 살아가는 터전이 망가지고, 소중한 존재들이 죽게 될 테니까. 대륙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건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과정에 불과합니다. 대륙이 멀쩡해야, 재앙을 물리치고 원래의 삶으로 무사히 되돌아올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

성검펜스가 반박조차 제대로 못 하고 멍한 얼굴로 눈만 깜박거렸다. 아주 만족스러운 반응이다.

신이 초청한 전문가님께서 그렇다고 말씀하시면, 당연히 '그러시구나.' 해야지. 안 그러면 자기가 뭐 어쩌겠는가.

"세르펜스도 사람들도. 전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겁니다."

"······."

"물론 책임감을 느껴서 나쁠 거야 없죠. 사람들을 지킬 힘을 가졌으니, 사람들을 지킨다. 아주 멋지고 훌륭한 생각입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걸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

여전히 성검펜스는 입을 닫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귀는 열고 있었다. 그 증거로 성검펜스의 눈은 나를 똑바로 직시하고 있었다.

미간이 살짝 찌푸려진 거로 보아, 온갖 생각들이 복잡하게 뒤엉킨 탓에 두통을 일으킨 게 아닐까 한다.

"세르펜스는 성검의 주인으로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건, 자신이 부족한 탓이라 생각하겠죠."

"아닙···, 니까?"

"네, 아닙니다. 세르펜스가···. 아니, '세계'가 실패한 건. 그 시기를 살아가던 모든 이들의 잘못입니다. 한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긴 주제에, 그 사람이 겪는 괴로움은 외면했으니까. 자신의 안위는 그토록 소중히 생각하면서, 그 안위를 지켜주는 사람의 안위는 무시했으니까. 그 한 사람. 즉 세르펜스가 지쳐 쓰러지는 건 피할 수 없는 결과입니다."

"아···."

성검펜스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그 사이로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러고 나서도 더 할 말이 남았는지, 녀석의 입술이 작게 달싹였다. 그래봤자 '아···, 아.' 하는 소리를 낸 게 전부였지만.

아직 생각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모양이다.

"세르펜스는 누구보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세르펜스에게 책임을 떠넘겨 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세르펜스는 그들을 탓할 자격이 있어요. 아! 물론 가장 큰 잘못은 악숭이들이 했지만, 일단 그건 논외로 두죠."

"정말, 신의 사자께서는···. 제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시기를 살아가던 이들 중, 완전히 무고한 이가 있다면 오직 갓난아기들뿐일 겁니다. 그다음이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들과 세르펜스입니다."

내 대답에 성검펜스가 울적한 표정을 지었다.

그다음이라는 말인즉, 완전히 무고한 건 아니라는 뜻이니까.

하마터면 무심코 성검펜스의 머리를 쓰다듬을 뻔했다.

가뜩이나 세르펜스와 똑같은 얼굴인데, 시무룩하게 어깨를 축 늘어뜨리기까지 하니. 그 모습이 세르펜스와 겹쳐 보인 탓이다.

팔짱을 끼고 있어서 다행이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성검펜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는 것에 '세르펜스 몫으로 남겨 둔, 초코 퍼지 마시멜로 쿠키 샌드'도 걸 수 있다.

"세르펜스에게 잘못이 있다면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을 아끼지 않은 거요. 그렇기에 부당한 책임을 짊어지고도 그것이 부당하다 주장하지 못했고, 그것이 사람들의 태만을 부추겼죠. 하지만 그마저도 온전히 세르펜스의 탓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르펜스는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세르펜스에게 자신을 탓하고 미흡하게 여기는 방법만 가르친, 전대 프라시더스 부부의 '죄'입니다."

사람들이 악숭이의 이간질에 놀아난 건 어디까지나 '잘못'일 뿐이다.

하지만 아동 학대는 명실상부한 범죄 행위다.

기억해두자. 아동 학대 신고는 국번 없이 112, 전화 및 문자 상담은 182.

"자! 그런 의미에서, 이제 제 말을 따라 하세요!"

"예···? '그런 의미'라는 건 대체 무슨···?"

"세상 한번 잘 망했다! 다들 그딴 식으로 구니까 망하지!"

"그, 그건 좀···."

성검펜스가 난감한 기색을 표했다.

세르펜스라면 군말 없이 따라 해 주었을 텐데. 그런 아쉬움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이들을 비교하면 안 되지만, 이건 그리워하는 거니까 괜찮겠지.

"빨리 따라 해 보세요. 세상 한번 잘 망했다!"

"······."

성검펜스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고작 그 정도로는 내 의지를 꺾지 못한다.

울멍울멍한 눈을 빠르게 깜박이며, '꼭 해야만 하는 건가? 나 하기 싫은데, 안 하면 안 돼?' 하고 간청해도 부족할 판에.

그런 어중간한 태도로 내가 물러날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건 오산을 넘어선 오만이다.

"아, 어서요! 세상 한번!"

"세, 세상 한번···."

"잘 망했다!"

"······."

"쓰읍! 잘 망했다!"

"자, 잘···, 망했···다?"

"다들 그딴 식으로 구니까 망하지!"

"다들···. 그딴 식으로, 구니까, 망하지···."

성검펜스가 난생처음으로 남 탓에 성공했다!

비록 내가 시켜서 한 행동이지만. 그래도 일단 한번 해 봤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자 한다.

"아주 잘하셨습니다. 상으로 복숭아 맛 젤리를 하나 드리겠습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아공간 주머니에서 복숭아 맛 젤리를 하나 꺼냈다. 푸딩 컵 모양의 포장 용기에 담긴, 워터 젤리다.

성검펜스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손수건과 촛대를 내려놓고 양손으로 젤리를 받아들었다.

참으로 공손하기 그지없는 태도다.

"드세요."

"아···, 네···."

성검펜스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젤리 포장을 뜯은 후,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퍼먹을 숟가락을 달라는 뜻이겠지.

그냥 호로록 마시듯 먹어도 될 텐데.

'자신은 우아한 귀족이라서, 그런 품위 없는 행동은 못 하겠다. 이건가?'

나는 녀석에게 작은 디저트 스푼을 건넸고 성검펜스는 그것으로 젤리를 떠먹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흡족한 미소가 절로 입가에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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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공작님과 성검 (20)

"나가기 전에 눈가부터 치료하세요."

나는 성검펜스가 먹고 난 젤리의 포장 용기를 아공간 주머니에 대충 집어넣으며 말했다.

성검펜스가 울어서 붉어진 눈가를 신성력으로 치료했다.

그 고분고분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처구니가 없다.

'아까 악마와 싸우다 다쳤을 때도 이렇게 두말없이 치료했으면 얼마나 좋아?'

불편해진 속내를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나는 문을 열고 마차에서 내렸다.

뒤이어 성검펜스가 손수건과 촛대를 챙겨 들고 마차에서 내려 땅에 발을 디뎠다.

마법등을 켠 마차 내부와 비할 바는 못 되지만, 바깥은 상당히 밝았다.

완연한 밤이 끝나고 새벽이 찾아온 것이다.

대화를 나누고 성검펜스가 울음을 그치는 걸 기다려주고 어쩌고 하다 보니, 꽤 오랜 시간이 흘렀나 보다.

"대화는 잘 나눴어?"

이 목소리의 주인은 휴마누스다.

고개를 돌려보니, 휴마누스와 리에나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두 사람은 나무 그루터기와 비슷하게 생긴, 땅에서 솟아난 듯한 낮은 의자에 걸터앉아 있었다.

모닥불을 피웠던 흔적을 중심으로, 똑같이 생긴 의자들이 빙 둘러 솟아 있었다.

아니마나 에드나가 마법으로 만들어 낸 임시 의자일 테다.

'아까는 어둡기도 하고 주변을 살펴볼 겨를이 없어서 못 봤는데···'

나와 성검펜스, 유지스, 휴마누스가 천막에 모여 대화를 나누는 동안. 일행들이 저곳에서 저녁을 준비하고 식사도 해결한 모양이다.

"그럭저럭? 그런데 두 분···. 아니, 세 분은 뭐 이리 일찍 일어나셨어요? 피곤하실 텐데 더 주무시지 않고."

나는 공터 한구석에서 홀로 검을 휘두르는 윈스톤까지 한데 묶어 질문했다.

같은 질문을 던질 거라면 한꺼번에 하는 게 효율적이니까.

"아예 안 잔 사람이 할 질문은 아니지 않아?"

"조금 잤는데요?"

"거짓말 하지 마. 내 뒤통수를 한참 동안 노려보다가, 세르펜스 데리고 나갔잖아."

"···안 주무시고 계셨어요?"

"그런 척한 거지. 시선이 느껴지는데 신경 쓰여서 어떻게 자겠어?"

휴마누스가 불만스레 툴툴거렸다.

말하는 거로 봐서 진짜로 깨어 있었던 모양이다. 공연히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 사람 뒤통수를 모닥불 삼아 쳐다보며 멍 때리는 건 자제해야겠다.

'그래도 뒤돌아 있었으니, 성검펜스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제 목을 졸랐던 건 모르겠···지?'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이 휴마눈새뿐이었다면 살짝 떠봤을 텐데. 애석하게도 정상적인 눈치를 갖춘 리에나와 윈스톤도 함께였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이 문제는 덮어둬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머리에 떠오른 의문이 아닌 다른 물음을 던졌다.

"잠은 잘 주무셨어요?"

"안 잤어.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윈스톤 경도."

"전 자다가 도중에 깬 겁니다."

윈스톤이 검을 휘두르던 동작을 멈추고 휴마누스의 말을 정정했다.

어느 타이밍에 깼는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나와 성검펜스가 이불을 잡고 줄다리기할 때. 혹은 우리가 천막에서 나올 때 깬 거겠지.

어쨌거나 결론은 두 사람 모두, 내가 성검펜스와 마차에서 대화를 나누는 내내 깨어 있었다는 거다.

"저는 푹 자고 일찍 일어난 거예요. 매일 새벽 기도를 올리는 습관이 있거든요."

리에나가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성검의 주인]을 읽어서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 그녀의 무릎 위에는 웬 종이 뭉치가 잔뜩 올려져 있었다. 손에도 몇 장 들려 있었다.

어제 휴마누스가 열심히 필기했던 종이다.

저게 성서였다면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며 넘겼을 텐데. 어딜 어떻게 봐도 기도와는 동떨어진 모습이다.

"윈스톤이야 수련 중이었을 테고···. 두 분은 뭐 하고 계셨던 겁니까?"

"나는 예습 중."

휴마누스가 허공에 떠 있는 황금색 빛덩이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가만 보니 신성력 덩어리는 동그란 구체가 아니라 독특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굉장히 특이하면서도 묘하게 눈에 익은 모양이다. 신성력을 저런 모양으로 만든 건 처음 보는데, 이상하게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 생각났다! 비파형 동검!'

색은 다르지만 휴마누스가 신성력으로 만들어 낸 건, 교과서에서 사진으로 지긋지긋하게 봤던 비파형 동검이 분명했다.

'휴마누스가 어떻게 비파형 동검을 알고 있지? 저걸로 무협지에 나오는 이기어검 같은 기술을 쓰는 건가?'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는 것도 잠시.

내가 신성력 덩어리를 자세히 살피며 고찰에 들어가자, 휴마누스가 쑥스럽다는 표정으로 내 의문을 해소해 주었다.

"일단 깃털 모양을 만들어 보려고 했는데, 세부적인 디테일을 잘 못 잡겠네. 하하!"

"아, 저게 깃털이었구나···."

듣고 보니 그렇게 보이는 것도 같다. 어린아이가 찰흙으로 깃털을 만들면 딱 저렇게 생기지 않을까 싶다.

나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깃펜 세트를 꺼내 휴마누스에게 건네주었다.

몇 개는 세르펜스가 가짜 젤리 도둑에게 던져버린 탓에 비어있었지만, 남은 것만으로도 참고하기에 충분하리라.

"···고마워.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

휴마누스가 깃펜 세트가 담긴 고급스러운 상자를 열어보더니, 떨떠름하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리에나가 그런 휴마누스를 슬쩍 쳐다보고는 성검펜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도 같이 배울 수 있을까요?"

"예, 상관없습니다."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서 있던 성검펜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잠깐 신경을 못 쓰고 있었는데 절전 모드가 되지 않다니.

그동안 내가 과민하게 걱정하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이곳에는 자신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일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이제 저는 자러 갈 건데, 세르펜스는 어쩔 겁니까?"

"주무십시오."

세르펜스어 해석기는 성검펜스를 상대로도 훌륭하게 작동했다.

자신은 이곳에 남아 휴마누스와 리에나를 상대로 2:1 과외를 시작할 생각이니, 나 혼자 가서 자라는 뜻이다.

"잠이 안 와서 그러는 거라면, 제가 재워드릴 수도 있습니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활짝 폈다. 경력직이기에 내보일 수 있는 자신감의 발로다.

세르펜스를 재운다는 건 아기를 재우는 것과 비슷하다.

아니, 오히려 더 쉽다. 적어도 업어달라고 보채지는 않으니까.

지난 은퇴한 사용인 실종 사건 당시, 불안에 떨던 세르펜스를 재운 게 바로 나다.

내 토닥토닥을 받은 세르펜스는 악몽에 시달리는 대신 꿀잠을 즐겼다.

그러나 이런 내 화려한 경력과 당당하고 믿음직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성검펜스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거절이었다.

"···자고 싶지 않습니다."

"피곤하지 않아요?"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제가 어떻게 세르펜스를 재워줄지, 궁금하지도 않습니까?"

"······음."

궁금하긴 했나 보다. 부정하지 않는 걸 보면.

휴마누스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와 성검펜스를 바라보았다.

집중력이 흐트러진 탓일까? 허공에 떠 있는 신성력이 비파형 동검 형태조차 유지하지 못하고, 벽에 집어던진 찰흙처럼 이도 저도 아닌 형태가 되었다.

"자고 싶지 않습니다."

성검펜스는 잠시 고민하는 듯했으나 결국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처음에 내놓았던 대답을 다시 입에 담았다.

악몽을 꿀까 봐 무서워서 그러는 줄로만 알았는데.

어쩐지 그런 의미로 하는 말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설마···. 자고 일어나면 이 모든 게 꿈이 되어 사라져 버리고, 자기 혼자 본래 살던 시기에 눈을 뜰까 봐 그런가?'

나는 성검펜스를 쳐다보았다. 성검펜스는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맞는 것 같다.

'억지로 재워버려? 아니야···. 저 상태면 내가 재우려 해도 안 잘 게 뻔해. 자는 척하며 나를 속여 넘긴 후, 내가 자러 가면 부스스 일어나서 활동하겠지.'

결론이 나왔다.

그냥 녀석이 제풀에 지쳐 잠들 때까지 내버려 두기로.

나는 천막으로 향하는 대신, 마법으로 만들어 낸 임시 의자에 궁둥이를 대고 앉았다.

"휴마누스, 물 끓이게 불 좀 붙여주세요."

"안 재우게?"

"본인이 자기 싫다는데 뭘 어쩌겠어요?"

"하긴."

내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자 휴마누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능숙하게 불을 지폈다.

작은 불씨가 자리를 잡는 사이, 나는 성검펜스에게 가까이 와서 앉으라는 의미로 손짓했다.

녀석은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휴마누스 건너편에 자리를 잡았다.

"휴마누스랑 리에나 님에게 신성력 날개 만들기 속성 과외를 해 줄 생각 아니었습니까? 그렇게 멀리 앉아서 어떻게 가르치려고요?"

"······."

성검펜스가 일어나서 나와 휴마누스 사이에 앉았다.

리에나는 아직 데면데면해서 불편한가 보다.

"깃털의 형태 하나하나에 온 신경을 쏟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우선 커다란 덩어리부터 간략하게 잡아놓고, 그 안에서 작게 쪼갠다는 느낌으로 형태를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전체적인 균형이···."

본격적인 과외가 시작되고, 어째 조소과 강의에서나 들을 법한 내용이 성검펜스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의 지도에 따라 휴마누스와 리에나가 신성력을 발현했다.

본격적인 소조에 들어가기에 앞서, 찰흙으로 대강의 덩어리를 잡아놓은 듯한 모양새다.

성검펜스도 신성력을 발현하여 두 사람이 예시로 삼을 훌륭한 날개를 만들어냈다.

"전하. 날개의 형태를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신성력의 손실을 최소화해야 합니다. 제게 이 기술을 가르쳐 달라 요청하신 건, 하늘을 날기 위함이 아니라 하늘에 떠 있는 적을 상대하기 위함이 아닙니까?"

"모양을 잡는 것에만 신경 쓰다 보니···. 그러니까, 신성력을 꽉 붙들고 있으란 소리지?"

머리로는 이해한 듯하지만, 제 뜻대로 잘 안 되는지 휴마누스의 미간에 옅은 주름이 잡혔다.

"그런데 이렇게 날개 형상을 갖추는 것만으로는 하늘을 날 수 없지 않아요?"

"예, 맞습니다. 공기를 밀어낼 수 있도록 신성력의 성질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공기를 차단하는 결계를 만든다는 느낌으로 조정하면 될까요?"

반면에 우등생 리에나는 벌써 심화 과정을 넘보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신성력의 형태는 휴마누스와 크게 다를 바 없었지만.

자꾸만 모양이 흐트러지는 황금색 신성력 덩어리와는 다르게, 리에나가 만들어낸 백색 신성력 덩어리는 형태를 안정적으로 유지했다.

그렇게 한창 과외가 진행되는 동안. 나는 그 옆에서 물을 끓였다.

주전자는 내 아공간 주머니에 있었고, 모닥불 위에 그것을 고정해 둘 지지대는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어제 저녁을 준비하며 만들어 둔 걸 테다.

'이따 아침을 먹어야 하니, 핫초코는 역시 좀 그렇지?'

분유···가 아니라, 우유를 타야겠다.

그리고 혹시 누가 아는가? 성검펜스가 따뜻한 우유를 마시고 졸음이 쏟아져 자고 싶어질지.

그런 내 야심 찬 계책은 그 어떤 성과도 내놓지 못했다.

유지스를 시작으로 잠에서 깬 일행들이 모두 밖에 나올 때까지, 성검펜스는 하품 한 번 하지 않았다.

그렇게 다 함께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나는 백기를 들어 올렸다.

배가 부르니 잠이 쏟아지기 시작한 터라, 어쩔 수 없었다.

"저 자러 갈게요···."

억울한 마음이 목소리에 고스란히 담겼다.

어제 전투를 벌이며 체력을 소모한 사람들은 밤을 새우고도 멀쩡한데,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한 내가 먼저 나가떨어지다니.

'신성력도 오러도 없는 사람은 어디 서러워서 살겠나!'

나는 성검펜스와 휴마누스, 윈스톤을 차례로 흘겨보았다.

이런 내 행동에 성검펜스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고, 휴마누스는 멀뚱멀뚱 나를 마주 보았으며, 윈스톤은 '또 시작이네.'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유지스. 제가 자는 동안, 세르펜스를 잘 부탁합니다."

"걱정하지 말고 푹 쉬세요."

유지스가 맡겨만 달라는 듯, 주먹으로 가볍게 제 가슴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정말 믿음직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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