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581화 (581/925)

581회

71. 공작님과 성검 (23)

작은 오해에서 시작된 해프닝도 지나가고, 우리는 평온한 분위기 속에서 간식 시간을 즐겼다.

그러고 나서 성검펜스는 다시 과외를 시작했고, 푸로르는 또다시 윈스톤에게 대련을 신청했다.

이번에는 윈스톤도 거절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반기는 듯했다. 혼자 수련하는 것보다 누군가와 대련을 하는 게 실력 향상에 더 도움이 되니까.

더군다나 우리가 상대해야 할 적은 '사람'에 국한되지 않았다.

악마 중에서는 사람과 비슷한 형상을 한 존재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악마들도 많다.

공왕이 부리는 마물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그런 점에서 신체 각 부위를 동물의 것으로 치환하며, 변칙적으로 싸우는 푸로르와의 대결은 윈스톤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될 거다.

'그런데도 아까는 내게 체력 단련을 시키느라, 대련을 거절했다는 거지···?'

조금 어처구니가 없었다.

세르펜스가 돌아왔을 때. '주군께서 자리를 비운 사이, 제가 착실하게 선배를 훈련 시켜 놓았습니다.'라고 말하며 제 공을 뽐내고 싶었던 건 아닐 테고.

'나를 훈련 시키는 게,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라고 생각해서 그랬다는 쪽이 더 신빙성 있겠네.'

자기 공치사를 늘어놓으며 생색내는 윈스톤의 모습은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전투 중에는 경황이 없어서 잘 몰랐는데, 이렇게 지켜보고 있으니 윈스톤 님의 실력이 늘었다는 게 실감이 나네요."

내 옆에서 윈스톤과 푸로르의 대련을 관전하던 유지스가 놀랍다는 투로 말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윈스톤에겐 재능이 있고, 세르펜스가 직접 가르쳐주기까지 했으니. 꽤나 강해졌을 거라고 예상은 했었는데···."

성검 일행 중 하나인 푸로르와 맞먹을 정도일 줄은 몰랐다.

주변에 위험 요소가 없어서 세니어의 버프가 발동하지 않은 탓에, 두 사람의 움직임을 완전히 따라갈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두 사람이 거의 대등하게 싸우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저 두 사람, 오전에도 한판 붙었다는 것 같은데 유지스는 못 봤어요?"

"아! 그때는 윈스톤 님께서 푸로르의 전투 방식에 적응하지 못하셨던지라, 제 실력을 못 내셨거든요."

"아하."

나는 이해했다는 뜻으로 짧게 감탄사를 흘리며, 윈스톤의 모습에 집중했다.

그는 침착하게 푸로르의 움직임을 살피고 정확하게 검을 휘둘렀다. 거칠게 몰아붙이는 푸로르의 공격에도 밀리지 않고 우직하게 버텼다.

"처음 뵈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검술이 안정되었어요."

유지스가 윈스톤을 처음 보았을 때. 그러니까 '검은 투사' 시절의 그를 떠올리며 감탄했다.

나는 [성검의 주인]을 통해 읽었던. 즉, '흑기사' 시절의 윈스톤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능에 따라 검을 휘두르던. 악숭 세력의 꼭두각시나 다름없던 흑기사는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차분하고 우직하게 검을 휘두르는. 충성스럽고 올곧은 기사만이 이곳에 존재했다.

그게 신기했던 걸까?

성검펜스가 리에나와 휴마누스를 가르치는 와중에도, 이따금 고개를 돌려 윈스톤의 모습을 살폈다.

어쩌면 윈스톤의 검술에서 자신의 흔적을 발견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윈스톤과 푸로르가 대련을 마친 건 저녁 준비 시간이 다 되어서다.

그동안 둘은 총 세 차례에 걸쳐 공방을 나눴는데, 한 번은 푸로르가 이겼고 이후에는 두 차례 내리 비겼다.

몇 번 더 싸우다 보면 승패가 엎치락뒤치락하지 않을까?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라고, 기왕이면 윈스톤이 팍팍 밀어붙이며 이겨줬으면 좋겠다.

저녁 당번은 나와 푸로르, 윈스톤이 맡았다.

점심을 만들었던 세 사람과 공부하느라 바쁜 세 사람을 제외하고 났더니, 이런 결과가 나와버린 것이다.

"소거법이란···."

"갑자기 소거법은 왜 찾아?"

푸로르가 성검 일행의 아공간 주머니에서 채소들을 꺼내다 말고, 내 혼잣말에 관심을 보였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고기 없어요, 고기? 바비큐 파티 하게."

"지금 잡아올까?"

없다는 뜻이다. 점심때 먹었던 스튜 속 고기가 마지막이었나 보다.

어차피 바비큐 파티를 꼭 해야겠다는 생각 따윈 없었다. 캠핑하면 바비큐가 떠올라서 그냥 해 본 말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나는 없으면 말고 하는 심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아요. 뭐하러 그렇게까지···."

"잡아 올 테니까, 딱 기다려!"

푸로르가 내 말을 끊고, 숲속을 향해 네 발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그녀가 서 있던 자리에는 도마와 식칼. 그리고 채소들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윈스톤. 요리할 줄 알아요?"

"모르오."

"그래도 채소 손질은 해 봤죠?"

"안 해 봤소."

"볼타 산맥 토벌하러 갔을 때, 음식 안 해 먹었어요?"

"그런 위험한 장소에서 요리해 먹을 리가 없지 않소?"

윈스톤이 무슨 그런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듣고 보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기껏해야 보존성을 높이기 위해, 딱딱하게 건조한 빵과 육포를 물에 불려 먹는 게 전부였겠지.

전쟁이 터져도 요리 같은 잡무는 병사들 몫일 테니.

뼛속까지 기사인 윈스톤은 요리 자체를 배우지 않았나 보다.

"윈스톤, 지금부터 배웁시다. 칼을 쓴다는 점에서는 검술과 크게 차이가 없으니, 분명 잘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이건 내가 억지를 부리는 게 아니다.

[성검의 주인]을 읽어 봐서 안다. 휴마누스도 요리와 담을 쌓고 지냈지만, 여정을 떠나는 동안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두툼하고 굳은살 가득한 윈스톤의 손가락은 섬세함과 거리가 멀어 보이긴 하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드워프들은 윈스톤 만큼이나 두툼하면서도, 비교도 안 되게 짜리몽땅한 손가락으로 섬세한 작업을 잘도 한다.

그러니 윈스톤도 잘할 수 있을 거다.

"아직 선배의 아공간 주머니에 남아있는 도시락이 꽤 있지 않소?"

"지금 세르펜스에게 필요한 건, 어디선가 사 온 음식이 아니라 정성이 듬뿍 담긴 수제 요리입니다!"

"그 도시락도 누군가의 정성이 담긴 수제 음식이오."

윈스톤이 정론을 펼쳤다.

이 세계에는 공장에서 만든 공장제 도시락이란 게 존재하지 않으니. 그 말에 틀린 점은 없었다.

하지만.

"세상에 어느 누가 캠핑장까지 와서 도시락을 까먹습니까? 원래 이런 곳에 오면 직접 음식을 해 먹어야 하는 겁니다. 그게 진짜 재미죠!"

"······."

내 말에 윈스톤이 모든 걸 포기한 표정으로 식칼을 잡았다.

진작에 그럴 것이지.

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윈스톤에게서 시선을 떼고 식자재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절망했다.

바비큐 소스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 방법을 모른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가 살던 곳에서는 그냥 시판 소스 하나면 해결되는 문제인데···. 그러고 보니, 내가 시판 소스 없이 만들 줄 아는 요리가 있었던가···?'

라면은 없으니까 패스. 이유식은 먹일 아기가 없으니까 패스.

한식은 간장, 고추장, 된장 등. 역시 소스가 없으므로 패스.

'그러니까 우리 중에 레시피를 알고 있는 유일한 요리사가 푸로르 뿐이었는데, 푸로르가 자리를 비웠다는 거지?'

나는 상황 파악을 마친 후, 윈스톤에게서 식칼을 뺏었다.

"채소 손질은 제게 맡기시고, 윈스톤은 가서 푸로르를 잡아 오세요."

"알겠소."

윈스톤이 군기 잡힌 목소리로 빠릿빠릿 대답하고는 푸로르가 사라졌던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채소 손질이 끝날 즈음. 푸로르가 혼자서 돌아왔다.

"뭐야, 요리할 줄 모르면 일찍 얘기하지."

"요리는 할 줄 압니다. 이 세상의 요리를 못할 뿐이죠. 그보다 윈스톤은요?"

"할 줄 아는 게 없다길래, 사냥이라도 해 오라고 시켰어."

푸로르가 냄비에 식수를 채우며 말했다.

아무래도 바비큐 파티는 포기할 수 없었나 보다.

나는 푸로르의 지시하에 재료를 갖다주거나 소스가 타지 않게 젓는다거나, 자른 채소들을 굽기 좋게 꼬치에 꿰거나 하며 잡일을 도맡았다.

윈스톤이 어딘가에서 잡아 온 사슴을 도축하는 건, 오늘의 메인 주방장인 푸로르의 몫이었다.

자신이 잡아 온 사냥감을 손질하는 법도 모른다는 게 민망했는지, 윈스톤은 그 옆에서 사슴을 도축하는 모습을 자세히 관찰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바비큐 파티가 시작되었다.

고기를 굽는 나를 제외한 일행들은 모두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아까 꿀 케이크를 먹을 때, 아니마가 만들어 뒀던 거다.

"시온도 그만 굽고 이리 와서 앉아요."

판타지 소설에서 흔히 묘사되는 채식주의자 엘프들과 달리, 인간처럼 잡식성인 가나안의 엘프 유지스가 고기를 집어 먹으며 손짓했다.

"절반만 굽고요. 나머지 절반은 윈스톤에게 맡길 겁니다. 그러니까 윈스톤은 그때까지 부지런히 배를 채워 두세요."

내 말이 끝나자 윈스톤의 먹는 속도가 묘하게 빨라졌다.

그런 윈스톤을 보며, 오늘 가장 수고해 준 메인 요리사 푸로르가 목젖을 드러내며 시원하게 웃었다.

나머지 일행들의 면면에도 웃음기가 가득했다.

나는 미리 꼬치에 꿰어둔 고기와 채소들을 불판에 올리며, 슬쩍 성검펜스에게 눈길을 보냈다.

그는 우연히라도 일행들과 눈이 마주칠세라. 고개를 푹 숙이고 고기를 깨작거렸다.

화기애애하고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낯설었나 보다.

혼자 겉도는 녀석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빌려온 고양이 같다는 말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내가 살던 세상의 속담인데 성검펜스와 찰떡같이 잘 어울렸다.

그렇게 바비큐 파티가 끝날 때까지, 성검펜스가 일행에 섞여드는 일은 없었다.

"남은 시간은 자습할게. 더 이상 새로운 걸 배우면 머리가 터질 것 같아."

바비큐 파티가 끝난 후.

다시 과외를 시작하려는 성검펜스를 향해 휴마누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옆에서 지켜보며,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교정해 드리겠습니다."

성검펜스는 물러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휴마누스가 농땡이를 피우려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혹은 한시라도 빨리 기술을 전수하고 성검을 건네주고 싶은 거든가.

그에 휴마누스가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안 그래도 괜찮은데···.'하고 중얼거렸다.

"저희에게는 스스로 생각하며, 오늘 배운 내용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요."

"맞아! 그러니까 세르펜스는 이만 가서 쉬어."

때마침 끼어든 리에나의 말에 휴마누스가 냉큼 동의를 표하며, 성검펜스에게 휴식을 권했다.

성검펜스는 곤란하다는 듯 미간을 찡그리며 망설이다가, 갑자기 생각을 바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유지스에게 다가갔다.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시종일관 남의 집 고양이처럼 굴던 성검펜스가 먼저 대화를 요구할 줄이야.

예상치 못한 일이다. 모두의 시선이 그와 유지스에게로 쏠렸다.

"네?! 저, 저요? 저만요?!"

뜻밖의 제안에 당황한 유지스가 새된 목소리로 당연한 얘기를 되물었다.

그 반응을 거절로 받아들인 것인지, 성검펜스가 눈을 내리깔며 낙담한 표정을 지었다. 유지스의 얼굴에 급속도로 당황스러움이 번진 건 당연한 결과다.

"거절하려는 게 아니라···! 저, 괜찮다면 시온도 함께 데려가도 괜찮을까요?"

"예? 저는 왜요?!"

나는 두 사람의 모습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다가 유지스의 말에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얼씨구나 이게 웬 떡이냐 하며, 성검펜스의 손을 붙잡고 대화를 나누러 가도 모자랄 판에.

대체 나를 왜 걸고넘어진단 말인가.

"지금 세르펜스와 단둘이 있으면 진정이 안 되어서 말실수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아, 그런 이유라면 인정합니다."

유지스의 설명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어지간하면 눈치 없는 놈이 되기 싫어서라도 빠졌을 텐데. 평소보다 높아진 유지스의 목소리 톤이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성검펜스를 돌아보며 물었다.

"제가 끼어도 됩니까?"

"으음···. 네, 상관없을 것 같습니다."

잠깐 고민을 하는 듯했지만, 성검펜스는 긍정의 답을 내놓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