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2회
71. 공작님과 성검 (24)
우리는 본격적인 대화를 나누기에 앞서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천막 하나는 에드나와 아니마가 마법 연구를 위해 선점했으니, 남은 곳은 어젯밤 꺼내 놓았던 마차와 나를 비롯한 남성 멤버들이 사용하고 있는 천막뿐이다.
비좁은 마차와 넓은 천막 중, 어느 곳이 쾌적한지는 비교해 볼 것도 없다.
"방음이 필요할까요?"
유지스가 한쪽 구석에 놓인 의자를 끌어와 앉으며 질문했다.
나는 내 침대에 걸터앉아, 맞은편 침대에 앉은 성검펜스를 바라보았다. 녀석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으음···.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습니다."
방음이 필요 없다는 거로 보아, 중요한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닌가 보다.
"그렇군요."
유지스가 긴장감 가득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대답했다.
그에 성검펜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을 뿐. 본론을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
침묵이 이어질수록 유지스가 긴장을 하다못해 딱딱하게 굳어갔다.
숨 막힐 듯한 어색한 공기가 천막 안을 채워나갔다.
그래 봤자 나는 제삼자였다. 가만히 관전하다가 유지스가 헛소리할 것 같으면, 그녀를 자제시키는 것이 오늘 내가 맡은 역할이다.
나는 마음을 편안히 먹고 성검펜스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처음 유지스가 나까지 데려가겠다고 말했을 때 부담스러웠던 건 사실이다.
'그래도 궁금하긴 해. 성검펜스가 무슨 이유로 유지스를 불러낸 것인지.'
1회차에서 유지스와 함께했던 시간을 말하며, 그 추억을 공유하고 싶은 거려나?
반대로, 유지스에게 현재의 자신과 어떻게 친해졌는지 묻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속으로 이런저런 가능성을 떠올리고 있을 때. 성검펜스의 입술이 움직였다.
"혹시 위리디아 님께서는 저를 좋아하시는 겁니까?"
예상치 못한 돌직구다.
성검펜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내 머릿속은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고, 이내 그것에 지배당했다.
'난 이곳을 탈출해야겠어!'
몸은 착실하게 뇌의 지배에 따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마음만 앞설 뿐, 결과는 내놓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유지스가 나를 붙잡았기 때문이다.
"저를 혼자 두고 나가지 마세요!"
"혼자는 무슨 놈의 혼자입니까? 세르펜스가 있는데! 둘이서 얘기 잘 나눠보세요! 저는 나가야겠습니다!"
"그러지 말고 시온도 같이 있어요!"
"아니, 지금 그런 분위기가 아니잖습니까!"
"그러니까 남아주세요!"
언젠가 세르펜스는 말했었다.
유지스는 저 가느다란 팔로도 내 목을 간단히 꺾을 수 있을 거라고. 그 정도로 팔심이 세다고.
그녀가 내 목을 똑 하고 분지른 건 아니지만, 나는 그 힘을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그렇게 물리적인 힘에 저지당하여 나의 탈출 시도는 끝이 났다.
내가 자리에 얌전히 앉아 탈출 포기 의사를 내비치자, 유지스가 안도하며 바람의 정령을 불러냈다.
당연하게도 방음 처리를 위한 행동이다.
"저기, 그···. 방금 무슨 질문을 하셨었죠?"
유지스가 성검펜스에게 질문했다. 나와 실랑이를 하는 동안 마음이 진정되었는지 한결 차분해진 모습이다.
반대로 성검펜스는 자신이 무엇을 보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혹시 제가 곤란한 질문을 한 겁니까···?"
성검펜스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물었다.
시무룩한 표정은 세르펜스도 자주 짓는 종류였으나, 성검펜스의 그 표정은 세르펜스의 것과 궤를 달리했다.
훨씬 더 음울하고, 어두웠다.
세르펜스의 시무룩한 표정이 간식을 빼앗긴 어린아이의 것이라면, 성검펜스의 시무룩한 표정은 가슴 아픈 사연이 있어 보이는 성인 남성의 것이었다.
상처들이 누적되어 끝내는 덤덤해져 버린. 낙담을 반복하다 기대 자체를 포기한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녀석의 그런 표정은 기껏 진정되었던 누나의 마음을 요동치게 했다.
"아니요! 전혀요! 물어볼 수도 있죠!"
유지스가 펄쩍 뛰며 과하게 부정했다.
그 반응에 놀랐는지 성검펜스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러니까, 제가 세르펜스를 좋아하느냐고 물었죠? 음, 그게, 사람 대 사람으로서 좋아하느냐고 물으셨던 거라면 당당히 그렇다고 대답하겠어요! 그런데 이성 간의 달콤 쌉싸름한 감정이냐고 물으신 거라면, 음, 으음. 그, 그런 편이죠?!"
횡설수설 말을 이어가던 유지스는 급기야 내게 확인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당황한 건 알겠는데 자신의 감정을 내게 물어봐서 뭘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
유지스의 발언도 환장할 노릇이나, 성검펜스는 거기에서 한발 더 나아갔다.
"언제부터, 어쩌다가 그렇게 되신 겁니까?"
사람이 사람을 좋아한다는데, 거기다 대고 할 소리인가?
성검펜스가 마치 '심각하게 휘어버린 척추 X-ray 사진을 보며, 도대체 무슨 생활을 해 온 거냐고 환자를 다그치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 같은 소리를 해댔다.
이 정도였으면 평소 생활에 큰 지장이 있었을 텐데, 어째서 이제서야 병원에 찾아온 거냐. 그동안 아프지는 않았냐.
그런 질문들이 이어질 것만 같다.
유지스도 성검펜스의 말에 적잖이 당황했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네?! 그건 대체 무슨 질문이죠?"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위리디아 님 같은 분께서 저를 좋아하신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요컨대 이해될 때까지 자신을 좋아하는 이유를 나열해 달라는 소리다.
성검펜스는 그런 의도로 말한 건 아닐 테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어쨌거나 유지스는 자신이 어떤 경위에서 세르펜스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구구절절 설명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물론 입 다물고 그냥 넘어가는 방법도 있긴 했다.
다만, 그렇게 한다면 성검펜스가 자기혐오에 빠져들게 될 거다. '역시 나 같은 걸 누가 사랑해 주겠어.' 하고 말이다.
"그, 그게 그러니까 처음 만났을 때···. 날카롭게 벼려낸 칼 같은 서늘한 느낌과 무뚝뚝한 분위기가···, 어딘지 모르게 멋있게 느껴져서···."
유지스가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귀를 파닥거리며 떠듬떠듬 말했다.
새빨개진 얼굴로, 소위 '나쁜 남자' 이미지를 동경했노라 말하는 모습이 질풍노도의 사춘기 소녀. 좀 더 정확하게 콕 찍어 말하자면 중학교 2학년 정도의 소녀를 연상케 했다.
'우리 누나도 중고등학생 때, 거친 매력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나쁜 남자가 멋있다고 했었지.'
그랬던 누나도 대학에 들어가면서 취향이 점차 바뀌어 다정한 남자가 좋다고 하더니, 돈을 벌기 시작할 즈음에는 '오직 나만을 바라보는 고분고분 순종남이 최고야.'가 되어버렸다.
도대체 무슨 연애를 해 왔길래 취향이 그렇게까지 격변할 수 있는지, 유씨 집안 최대의 미스터리다.
"그때부터라면, 무언가 착각하신 것 아닙니까?"
성검펜스가 몸을 배배 꼬아대는 유지스를 바라보며,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보통 면전에서 '날카롭게 벼려낸 어쩌고저쩌고' 하는 소리를 들으면, 민망함에 몸 둘 바를 몰라 할 텐데.
어째 성검펜스는 제삼자인 나보다도 침착해 보였다.
"네?! 착각이라니요?"
"저에게 목숨을 빚졌다는 생각에, 고마워하는 마음과 좋아하는 감정을 헷갈리신 것 같습니다."
"아, 아니거든요!"
분석하는 듯한 성검펜스의 말투에 유지스가 울컥 소리쳤다.
그에 성검펜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유지스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마치, '아니라면 제대로 설명해 보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 그래요! 그 당시에는 그랬을 수도 있어요. 위험한 상황에 갑자기 나타나서 구해주셨으니까! 보답 같은 건 바라지도 않는다는 태도가 어딘지 모르게 냉소적이면서도 쿨해 보였던 것도 사실이에요!"
그랬구나, 그 당시 유지스는 세르펜스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었구나.
그건 그렇고 나는 왜 이곳에 있는 걸까? 이것 참 의문이 드는구나.
"하지만 그런 이유로 좋아한다는 건 아니에요! 그랬다면 조금 전에 '그런 편'이라고 말하는 대신, 확실하게 그렇다고 말했겠죠!"
"그 말인즉···. 저에 관해 자세히 몰랐을 때는 좋아했었으나, 알고 난 뒤에는 마음이 변했다는 뜻입니까?"
"아니요, 그 반대에요!"
유지스가 부랴부랴 양손을 내저으며 소리쳤다.
그에 성검펜스는 무슨 면접관이라도 된 것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유지스를 관찰하듯 쳐다보았다.
'나 좀 나가게 해줘···!'
자신이 세르펜스를 좋아하는 감정이 진짜라는 걸 설명해야 하는 유지스만큼은 아니지만. 유지스를 지켜보는 나 또한 곤욕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세르펜스가 어떤 사람인지 알면 알수록, 가엾기도 하고···. 그런데도 순진한 모습을 간직한 게 귀엽기도 하고, 상처를 딛고 나아가려고 노력하는 모습에 감동하기도 했고···."
곤란함이 극에 달했는지, 유지스가 울상을 지으며 꾸역꾸역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 유지스를 바라보는 성검펜스의 표정에는 의문만 가득했다.
'불쌍한 유지스!! 그러게 클 때까지 기다린다는 소리는 왜 해서!'
그 말만 삼켰어도, 성검펜스가 이런 행동은 하지 않았을 텐데.
나는 딱하다는 시선으로 유지스를 바라보았다.
"세르펜스는 매력적인 사람이에요! 시온도 그렇게 생각하죠?!"
"아니, 왜 갑자기 저한테 화살을 돌리십니까?!"
"가만히만 있지 마시고, 뭐라도 좀 얘기해 보세요!"
난처함에 눈에 뵈는 게 사라진 유지스가 내게 무리한 요구를 해 왔다.
둘 사이의 얘기를 하는데, 나를 끼워 넣어서 뭘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
그래도 내 도움으로 유지스의 곤란함을 해결하고, 성검펜스의 자신감을 북돋아 줄 수 있다면야.
나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세르펜스, 유지스의 말을 믿어주세요. 유지스는 말이죠? 부드럽고 자상한 공작님의 따스한 얼굴이 차갑게 변하는 순간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공작저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붙잡고 설득하고 다닐 정도로···."
"시온!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유지스가 얼마나 세르펜스를 좋아하는지, 제삼자 시선에서 근거를 들어가며 냉정하게 설명해 달라고 부탁하신 거 아니셨습니까?"
"아, 아니에요!"
아니었나 보다.
"그럼 저더러 뭘 어떻게 도와달라는 겁니까?"
"세르펜스는 지금 자신이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잖아요?"
"그렇죠."
"그러니 세르펜스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사람인지, 저랑 같이 설득해 달라는 뜻이었어요!"
진작 그렇게 얘기해 줄 것이지.
나는 이해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성검펜스를 바라보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장점 덩어리인 녀석인지라,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망설여질 지경이다.
'평소라면 가장 먼저 보이는 얼굴부터 짚고 넘어갔겠지만···.'
세르펜스는 자신의 얼굴이 잘생겼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성검펜스 또한 당연히 그러할 테다.
얼굴 말고. 성검펜스도 동의할 수밖에 없는 직관적이면서도 객관적인 예시가 필요하다.
내가 신중하게 성검펜스를 찬찬히 뜯어보는 그때, 녀석의 입이 열렸다.
"알겠습니다."
"드디어 이해해 주시는 건가요?!"
유지스가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얼굴 가득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자신의 노력이 빛을 발했다고 생각했나 보다.
반면에 성검펜스의 표정은 좀 복잡해 보였다.
"위리디아 님의 취향이···, 으음···. 굉장히 독특하다는 것만은 잘 알 것 같습니다."
"세르펜스는 하나도 모르고 있어요!!"
유지스가 빽 하고 소리를 지르더니, 양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고개를 숙이다 못해 허리를 접었다.
지켜보는 내가 다 수치스럽다.
'성검펜스 이 녀석, 방음은 없어도 된다더니···!'
자신은 방음이 없어도 괜찮다는 뜻이었나 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엾은 유지스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등을 가볍게 토닥여 주었다.
"맞아요, 세르펜스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유지스의 취향은 절대 독특한 게 아닙니다. 제가 살던 세상에서는 그, 뭣이냐. '갭 모에'라는 단어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많은 사람이 선호하는 취향 중 하나입니다!"
"남을 존중해주는 사람에게 막 대해지는 걸 즐기는 시온에게 그런 위로는 듣고 싶지 않아요···."
유지스가 낙심한 와중에도 내게 딜을 넣었다.
우리가 나란히 이상한 취향의 사람이 되어서 좋을 게 하나 없건만.
"······."
아니나 다를까, 성검펜스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