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585화 (585/925)

585회

71. 공작님과 성검 (27)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도, 그 흥분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며, 일정한 박자로 성검펜스를 토닥거리길 십여 분.

성검펜스의 입술이 힘없이 벌어졌다. 그 모습으로 보아, 녀석이 잠들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휴마누스에게 한 번 속았던 전적이 있는바. 아직 방심하기에는 이르다.

나는 슬그머니 녀석의 눈가를 가렸던 손을 떼어냈다.

"으음···."

갑자기 밝아진 탓인지, 성검펜스가 잠꼬대를 하며 몸을 더 웅크렸다. 그러고는 색색거리며 고른 숨소리를 냈다.

나는 그 뒤로도 5분가량 녀석을 토닥거리며 지켜보았다.

깨어 있는 내내 성검펜스의 얼굴에서 걷히지 않았던 우울감이 사라지고, 평온함이 그곳에 자리했다.

'이제 안심해도 될 것 같네.'

나는 내 침대로 가서 휴마누스를 구석에 밀어놓고 몸을 뉘었다.

중간에 성검펜스가 깨어나는 일 없이 아침이 밝아왔다. 그리고 휴마누스는 내 발베개가 되어있었다.

"이럴 거면 그냥 바닥에서 침낭 깔고 자게 내버려 두지 그랬어?"

침대 구석에 찌그러진 휴마누스가 자신의 몸 위에 올려진 내 발을 치워내며 말했다.

억울함이 가득 담긴 그의 목소리에 나는 머쓱함을 느꼈다.

"어, 저기···. 그러니까, 다리를 머리보다 높게 하고 자면 건강에 좋대요."

"그래서 나를 발베개로 사용했다?"

"고의는 아니었습니다."

"······."

휴마누스가 나를 가만히 노려보다가, 침대에서 일어나며 선언했다.

"오늘 밤부터는 바닥에서 잘래."

"황태자인 휴마누스가 바닥에서 자면, 세르펜스와 윈스톤이 심적으로 불편함을 느낄 거 아닙니까?"

"지금도 느끼고 있을걸?"

"······."

반박할 말이 없었다.

황태자가 바닥에 침낭을 깔고 자는 것과 누군가의 발베개로 쓰이는 것.

둘 중 어느 쪽이 더 큰 문제를 초래하느냐고 묻는다면 단언컨대 후자였다.

"선배는 암흑가에서 주군과 한 침대를 썼을 때. 주군을 깔아뭉갤까 걱정된다며 침대 위에 침낭을 올려, 그 속에서 주무시지 않았소? 왜 이번에는 그리하지 않은 것이오?"

웬일인지 윈스톤이 새벽 훈련을 나가지 않고, 우리와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 이불을 정돈하며 질문했다.

"윈스톤 경, 그 얘기를 왜 지금 해 주는 건가?"

내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휴마누스가 억울함을 호소하며 윈스톤에게 따져 물었다.

그 말속에는 '그런 방법이 있는 줄 알았더라면, 시온을 침낭에 넣어버렸을 텐데!'라는 뜻이 담겨있었다.

그에 윈스톤은 '선배의 잠버릇이 이 정도인 줄은 몰랐습니다.'라는 건조한 말로 대답을 끝냈다.

휴마누스의 시선이 이번에는 나를 향했다.

내 잠버릇이 이렇게 심하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그리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방법을 알고 있으면서.

어째서 자신을 발베개로 쓴 거냐고 따지고 싶은 걸 테다.

"처음부터 제가 침대에 침낭을 올려놓고 자는 건 고려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왜?!"

휴마누스가 억울함을 넘어, 서러움이 담긴 외마디 소리를 내질렀다.

아무래도 내가 자신과 세르펜스를 차별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 생각은 반만 맞았다.

"중간에 애가 깨서 칭얼거리면, 빨리 달래줘서 얼른 재워야 하는데. 어느 세월에 침낭에서 기어 나옵니까? 그동안 잠이 다 달아나서 애가 말똥말똥해지면, 그날 밤은 날 새는 겁니다. 휴마누스가 육아의 고충을 알아요?"

"···일단 네가 세르펜스를 완전히 어린애로 보고 있다는 건 잘 알 것 같아."

"그것만 알아도 반절은 먹고 들어가는 겁니다."

내 당당한 대답에 휴마누스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흘겨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성검펜스를 위해서, 내가 이럴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 준 걸 테다.

'아마도. 확실하진 않지만···.'

그렇게 혼자서 속으로 타협하고 있는데, 천막 한구석에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네, 세르펜스. 무슨 일입니까?"

나는 몸을 돌려 누워 성검펜스를 바라보았다.

녀석은 이미 이불 정리를 마치고, 깔끔하게 정돈된 침대에 반듯하게 앉아있었다.

"오늘 밤부터는 제가 신의 사자와 한 침대를 쓸 테니, 전하께서는 편히 주무십시오."

"뭐어?! 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뻔히 보고도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성검펜스의 말에 휴마누스가 대경실색했다. 그러고는 성검펜스에게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떻냐면서 열심히 설득하기 시작했다.

누가 보면 성검펜스가 불구덩이에 뛰어들려고 해서 말리고 있는 줄 알겠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기분이 영 좋지가 않다.

잠버릇이 험해서 같이 자는 사람 몸에 다리를 좀 올려놨기로서니, 저렇게까지 반응할 필요가 있나 싶다.

"본디 체격 차를 생각하면 진작 그리 해야 했던 일입니다. 그런데 제 고집 때문에 전하께서 그런 고충을 감수한 것이지 않습니까?"

어째서인가 성검펜스가 휴마누스에게, 자신 때문에 희생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투로 말했다.

얼굴에 드리워진 우울감 탓일까?

그렇게 말하는 성검펜스의 모습이 더없이 숭고하게 느껴졌다.

'내용물을 까놓고 보면, 고작 나와 같은 침대를 쓰겠다고 말한 것뿐인데 말이지···.'

나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나 휴마누스는 그렇지 않은가 보다.

그는 감격에 겨워하며, 자신이 느끼는 감동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만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되나 싶어, 상체를 일으켜 앉아 윈스톤의 안색을 살폈다.

윈스톤의 표정도 나처럼 썩어 있었다.

그 표정에 의거하여, 나는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입을 열었다.

"휴마누스는 지금 무언가 크나큰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세르펜스와 한 침대를 쓰게 되면, 저는 당연히 침낭에 들어갈 겁니다."

성검펜스를 재우는 데 필요한 건, 녀석을 토닥여 줄 팔 한쪽뿐이다.

즉, 나는 침낭에 들어가 팔 한쪽만 내놓고 자면 된다. 성검펜스가 내 잠버릇을 감내할 필요는 그 어디에도 없다.

이제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휴마누스가 멍한 표정으로 '아···.' 하고 탄식을 흘렸다.

반면에 성검펜스는 가만히 눈만 깜박거릴 뿐이었다. 처음부터 내가 침낭에 들어갈 것을 염두에 두고 꺼낸 말이었나 보다.

'내 토닥토닥이 마음에 들었나 보네.'

이 타이밍에 나와 같은 침대를 쓸 마음이 들었다는 건 그렇게밖에 해석할 수 없다.

내 덕분에 꿀잠을 자고 일어났으니, 그럴 만도 하다.

나는 뿌듯함을 느끼며 괜스레 코끝을 매만졌다. 그리고···.

"도시에 가면, 반드시 침대를 사고야 만다!"

귀하게 자란 황태자 휴마누스가 침대 없는 자의 설움을 절실히 느끼며 독백했다.

* * *

성검펜스가 휴마누스와 리에나에게 과외를 해 주고, 나는 체력 단련이라는 미명하에 윈스톤에게 굴려지는 생활이 나흘간 반복되었다.

그동안 성검펜스는 나와 약속한 대로 밥과 간식을 잘 먹고, 밤에는 잠도 잘 잤다.

성검펜스가 돌아가는 날까지 이 평화가 계속 이어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오늘따라 왜 이렇게 잠을 못 주무실까?"

내 말에 성검펜스의 몸이 움찔거렸다.

녀석이 슬그머니 감고 있던 눈을 뜨고 나를 마주 봤다.

은은하게 빛나는 촛불이 옆자리 성검펜스의 얼굴을 비췄다. 그는 부모님 몰래 밤늦게까지 핸드폰 하다가 들킨 아이처럼, 뜨끔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잠도 못 주무시고···."

"괜찮아요."

나는 성검펜스를 계속 토닥거리며, 입으로는 '자장자장'을 반복했다.

하지만 성검펜스는 눈을 감지 않았다.

"잠이 안 옵니다."

성검펜스가 죄라도 고백하는 듯한 투로 말했다.

녀석이 부드러운 미성으로 작고 나지막이 말했으니. 잠이 솔솔 와야 마땅했지만, 나는 반대로 찬물이라도 끼얹어진 것처럼 슬슬 밀려오려던 졸음이 달아나 버렸다.

"왜요?"

"······."

성검펜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선을 피하며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

나는 그런 녀석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침낭에서. 그리고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내가 조용히 촛대를 집어 들자 성검펜스도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굳이 말하지 않았지만, 대화를 나누자는 내 의도를 파악한 걸 테다.

우리 둘은 천막을 벗어나 말 없는 마차에 올라탔다.

나는 촛불을 불어 끄고, 비어있는 옆자리에 얌전히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아공간 주머니에서 방음 스크롤을 하나 꺼내어 찢었다.

마차가 이미 꺼내져 있었다거나 촛대를 내가 들고 있다거나.

사소한 것이 조금 달라졌지만. 상황 자체만 보면 성검펜스가 처음 나타났던 날, 밤에 있었던 일과 비슷했다.

"거의 끝나가나 봐요?"

"···네."

주어가 빠졌어도 대화가 성립되기에 무리는 없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정확한 시기를 물었다.

"언제쯤?"

"아무리 늦어도 내일 안으로 끝날 겁니다."

이르면 내일 오전. 늦어도 오후나 저녁 내에, 성검펜스가 말했던 '기초 과정'이 끝나게 된다는 소리다.

성검펜스의 과외는 전적으로 그의 머릿속 지식을 바탕으로 진행되며, 과정별 교과서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는 기초, 그 이후는 심화. 이렇게 딱딱 나뉘어 있는 게 아니었다.

그 때문에 리에나와 휴마누스는 성검펜스의 가르침에 따르면서도, 배워야 할 것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지 못했다.

심지어 그 '기초'란 것조차, '세르펜스가 이후의 내용을 알아서 터득할 수 있을 수준'을 말하는 것에 불과했다.

당연하게도 그 기준을 알고 있는 건 오직 성검펜스 뿐이었다.

"아니, 그걸 왜 지금 얘기합니까? 잠깐만, 이것도 내가 물어본 거니까···. 설마하니 아무 말도 안 하고 몰래 떠나버릴 생각이었습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성검펜스가 시선을 내리깔며 말했다.

그걸 네가 모르면 누가 아느냐는 질문은 무용(無用)했다. 녀석은 정말로 몰라서 그렇게 답한 걸 테니까 말이다.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제대로 규정하지 못한다는 건 그런 거다.

특정 행동을 하면서 왜 하고 있는지, 왜 해야만 하는지 알 수 없다.

길을 헤매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시시각각 찾아오는 불안감 앞에 맨몸으로 내던져지게 된다.

그렇기에 사람은 자신에 대해 똑바로 알아야만 한다. 끊임없이 자신에 관해 생각하고, 질문을 던져야만 한다.

그래야 길을 잃지 않고 나아갈 수 있다.

'하지만 성검펜스는 항상 자신의 내면을 외면하며 살아왔을 테니···.'

떠날 시기가 코앞까지 성큼 다가오고 나서야, 뒤늦게 불안감을 느끼며 잠을 못 이룬 게 아닐까 싶다.

"끝내기 싫어요?"

"그건···."

성검펜스가 말끝을 흐리며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마침내 답이 나왔는지, 성검펜스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조금쯤은···, 더 머물고 싶은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쉬고 싶다는 마음도 여전합니다."

녀석의 말에 나는 묘한 안도와 안쓰러움을 느꼈다.

성검펜스가 이곳에 남고 싶다며 내게 호소한다면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아서 돌아가 준다고 하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안쓰러움이 찾아온 건 그 이후다.

"하루 이틀 정도는 더 있다 가도 되는데···."

"욕심내고 싶지 않습니다."

"······."

세르펜스에게는 얼마든지 욕심을 가지라고 말했던 나였지만, 차마 성검펜스에게는 그 말을 해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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