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7회
71. 공작님과 성검 (29)
"아무튼 본명을 알려드렸으니, 세르펜스도 제 질문에 대답해 주세요."
"음···."
아주 잠깐이지만, 성검펜스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쳐 지나갔다.
됐다고 할 땐 언제고. 막상 세례명으로 불러주지 않으니 서운한가 보다. 그래도 녀석은 자신의 말을 무르지 않았다.
그 대신, 내 질문에 대답했다.
"제가 전하의 요구에 응하기로 한 건···, 위리디아 님께서 살아계셨다는 걸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성검의 주인인 황태자 전하께서 강해지신다면, 이번에는 위리디아 님께서 살아남으실 수 있을 것 같아서···."
자신이 말해 놓고도 민망했는지, 성검펜스가 두 손을 꼼지락거렸다.
예상하지 못했던 답이다.
녀석은 무슨 마음으로 저런 대답을 내놓은 걸까?
자신 때문에 유지스가 죽었다는 죄책감의 발로일까? 아니면 순수한 소망일까?
"대의를 위한 이유가 아니라서 죄송합니다."
"그걸 왜 저에게 미안해합니까? 아니, 그 누구에게도 미안해하지 마세요. 다른 누구를 위한 행동이라는 것만으로도, 숭고한 의지가 담겨있는 거니까."
"······."
내 말에 성검펜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다. 얼굴에 녀석이 느끼는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으니까.
성검펜스는 내가 처음으로 그의 세례명을 불러 주었을 때처럼,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보다. 가기 전에 한 번만 유지스를 이름으로 불러주지 그래요? 그럼 유지스도 좋아할 텐데."
"그럴 수는···, 없습니다."
유지스를 걱정해서 휴마누스를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고 했으니, 당연히 고개를 끄덕일 줄 알았건만.
그런 내 기대와는 반대로 성검펜스는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었다.
"어째서요?"
"제가 당신이 알고 있는 세르펜스가 아니듯, 현재의 위리디아 님은 제가 아는 위리디아 님이 아니잖습니까. 처음에는 그것을 잘 구분할 수 없었지만, 알면 알수록···. 다른 사람이라는 게 와닿기 시작했습니다."
성검펜스가 울적한 표정을 지으며, 유지스를 이름으로 부를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유지스는 성검펜스에게 소중한 존재였던 모양이다.
시온처럼 내용물이 바꿔치기 당한 게 아닌 이상, 현재의 유지스와 성검펜스가 기억하는 유지스는 분명 같은 유지스일 터였다.
'하지만 달라진 거겠지.'
나는 1회차의 유지스를 모른다. 그래도 2회차인 <성검의 주인> 속 유지스의 모습은 알고 있다.
그때와 비교해도 유지스는 매우 달라졌다.
눈앞에 펼쳐진 현실을 바라보며 당면한 문제를 처리하는 데 급급하지 않고, 먼 곳에 펼쳐진 이상(理想)을 꿈꿀 여유가 있었기에.
현재의 유지스는 그때보다 훨씬 더 쾌활하고 발랄했다.
'그리고 굉장히 주책맞지.'
아마도 성검펜스가 가장 큰 괴리감을 느낀 게, 바로 이 부분이지 않을까 싶다.
"위리디아 님께서는 제게 이름으로 불리길 바랐으나, 저는 단 한 번도 그 바람을 들어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제가 유지스···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성검펜스가 말을 끝맺지 못하고, 웅얼거리며 입속말을 삼켰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얘기였다.
"그건 그거대로 유지스가 좋아하겠네요."
"그런···겁니까?"
"네. 결국 세르펜스도 유지스를 소중하게 생각했다는 거잖아요? 비록 그 대상이 현재의 자신이 아니라지만, 어차피 현재의 유지스는 현재의 세르펜스에게 소중하게 여겨지고 있으니까···. 아,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이해했으니, 더 설명해 주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내가 효율적인 전달 방법을 고심하며 끙끙거리고 있자, 성검펜스가 그러지 않아도 된다며 사양했다.
녀석의 얼굴에 씁쓸함이 떠올랐다.
그 모습을 마주하고 있자니 그를 위로해 주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떠오른 생각을 곧장 실천에 옮기고자, 내가 '저···.' 하고 운을 떼는 찰나.
"감사합니다."
성검펜스가 난데없이 감사 인사를 해 왔다.
그 탓에 나는 하려던 말을 몽땅 까먹어 버렸다.
"예? 갑자기 무슨···."
"현재의 제가 누군가를 소중하게 여길 수 있도록 곁에서 지도해 주셔서. 그리하여, 제가 다른 이들의 소중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걸 알려 주셔서. 그리고, 저의 '현재'를 바꿔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검펜스가 공손하게 양손을 포개어 자신의 허벅지 위에 올리고, 앉은 자세 그대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잠자리에 드느라 머리카락을 그냥 풀어 놓았던 탓에, 아무렇게나 어깨에 걸쳐져 있던 긴 머리카락이 쏟아지듯 사라락 흘러내렸다.
하지만 기품이 배어나는 반듯한 자세 때문일까?
그 모습조차 정갈하고 우아해 보였다.
'이거, 세르펜스가 무릎을 꿇은 것보다 더 부담스러운데···?'
세르펜스가 무릎을 꿇는 건 아이가 말썽을 부려 혼나는 모습 그 자체였다.
반면에 성검펜스가 감사를 표하며 고개를 숙이는 건, 고위직 공무원이 내 공을 치하해 주는 느낌이었다.
그것도 아주 극진하게.
그 때문에 나도 모르게 내가 국가적인 큰 공을 세운 건 아닐까 돌아보게 했다.
'뭔가 표창장이라도 받으며 카메라 앞에서 악수를 해야 할 것 같고, 뉴스에도 출연할 것 같고, 여기저기 기사도 날 것 같고···.'
하여간 엄청나게 부담스러워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세르펜스가 알면 억울해할지도 모르나 어쩔 수 없다.
"어, 그···. 알았으니까, 이만 고개를 드세요."
내 말에 성검펜스가 자세를 바로 하며, 앞으로 넘어온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 가녀려 보이는 목덜미가 드러났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머리를 안 묶는 편이 사람들을 현혹하기에 더 유리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지? 사람들을 현혹해서 뭘 어쩌려고!'
나는 재빨리 제정신을 되찾았다.
악숭 세력은 세르펜스가 강하다는 걸 인지하고, 늘 경계했다.
그러니 세르펜스의 가련한 연기에 휘둘리는 사람은 언제나 대륙의 편에 선 이들 뿐이다.
쉽게 말해 허튼 짓거리라는 소리다.
그런 의미에서 세르펜스는 될 수 있는 한, 계속 머리를 묶고 다니는 게 좋겠다.
"이런 말씀 드리기 염치없지만···."
"예? 무슨 얘기요?"
"선우. 앞으로도 현재의 제 곁에 머물며, 저를 이끌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성검펜스는 그렇게 말하며, 한 손으로 살포시 제 가슴께를 짚고 눈을 간절하게 빛냈다.
갑자기 나를 본명으로 부르는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대외펜스를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다.
'그렇다고 100% 연기라는 소리는 아니지만···.'
진심은 담겨 있으나, 연출 된 행동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요 며칠 잘 먹이고 잘 재워서 그런지 마음에 여유가 생긴 모양이다.
그렇게 생긴 여유를 이런 곳에 쓰지 말아 주었으면 좋으련만.
"굳이 그런 부탁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성검펜스가 어째서 저런 말을 하는지 대충 짐작 가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옆에서 지켜봐 주는 이. 즉 '신의 사자'라는 감시자가 없으면, 자신이 엇나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알아두세요. 세르펜스에게 필요한 건 지도해 줄 사람이 아니라, 보살펴 줄 사람이라는 걸."
"네, 명심하겠습니다."
과연 내 말을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미심쩍은 대답이 돌아왔다.
그런 녀석을 잠시 노려봐 주다가, 아무렴 어떠랴 싶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잔소리를 늘어놓으며 마지막 밤을 보내는 건 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다.
"제게 더 하고 싶은 말 있어요?"
"으음···."
성검펜스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녀석을 향해,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럼 아침이 올 때까지, 모닥불 피워놓고 마시멜로나 구워 먹을래요?"
성검펜스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아침이 밝았고, 요 며칠 계속되었던 일상이 반복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와 성검펜스가 모닥불 앞에서 밤새운 걸 목격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복잡한 심경이 내 표정에 드러난 탓일까?
무언가 직감했는지, 유지스의 표정이 조금 착잡해 보였다.
나와 유지스는 나란히 앉아, 성검펜스의 마지막 수업을 지켜보았다.
어느덧 리에나의 백색 날개는 얼추 그 형상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성검펜스의 완벽한 은색 날개에 비하면 굉장히 허술해 보였다.
'밤새 성검펜스와 대화를 나누지 않았더라면, 오늘이 마지막이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겠지.'
마지막인 만큼. 성검펜스는 자신을 대신하여, 임시 선생님 자리를 이어받게 될 리에나를 교육하는 데에 신경을 쏟았다.
그로 인해 가장 비행 기술이 필요한 휴마누스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닐 수가 없다.
"한 번 움직여보시겠습니까?"
성검펜스가 리에나의 주변을 한 바퀴 빙 돌며, 그녀가 만들어낸 날개를 유심히 살펴보다가 불쑥 말을 꺼냈다.
"이, 이렇···게요?"
리에나가 신성력 운용과 아무래도 상관없는 주먹을 꽉 움켜쥔 채, 어설프게 날개를 움직였다.
공기가 밀려나며 강한 바람이 일었다.
그 바람을 정통으로 맞은 성검펜스의 머리칼이 흐트러졌다. 녀석은 엉망이 된 머리칼을 가볍게 쓸어 넘기며 입을 열었다.
"이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과외 종료이자, 이별을 알리는 말이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나는 법을 연습하는 건가요? 아직 날개 모양을 완벽히 갖추지 못했는데, 괜찮을까요?"
걱정 가득한 리에나의 말에 성검펜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행동을 본 리에나의 표정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이 정도면 제가 없어도 될 거라는 뜻이었습니다."
"뭐?! 잠깐만! 그게 무슨 소리야?"
과외 선생님의 무관심 속에, 자신이 만들어낸 금색 날개와 홀로 분투하던 휴마누스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대련하던 푸로르와 윈스톤이 동작을 멈추고 성검펜스를 바라보았다.
천막 안에서 마법 연구를 하던 에드나와 아니마도 모습을 드러냈다. 휴마누스의 외침을 듣고 무슨 일인가 싶어 밖으로 나왔나 보다.
"말 그대로의 뜻입니다. 세부적인 정교함은 관찰력을 키우고, 신성력으로 모양을 빚는 게 익숙해지면 해결될 문제입니다."
요컨대 백날 강의를 듣는 것보다, 참고 자료를 직접 분석하며 혼자 자습하는 게 더 중요한 단계에 이르렀다는 소리다.
"날개만 만든다고 다가 아니잖아? 비행은 어떻게 하라고?"
"그 정도는 두세 번 날아보면 바로 터득할 수 있을 겁니다."
저렇게 말하는 거로 보아, 성검펜스는 고작 두세 번 연습하고 비행에 성공한 모양이다.
터무니없는 녀석의 말에 휴마누스와 리에나가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가 막힌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저 녀석, 진짜 자신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아? 본인이 천재라는 걸 저렇게나 당당히 말하고 있는데?'
사람의 유전자에 새겨진 본능에 '하늘을 나는 법' 같은 게 있을 턱이 없다.
그런데도 성검펜스는 두세 번 날아보면 된다는 소리를 당연하게 해댔다.
"기쁘지 않으십니까?"
"뭘 말하는 거야?"
"성검은 다시 전하의 손에 쥐어질 것이며, 현재의 저 또한 돌아올 겁니다. 이제 곧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게 될 터이니, 마땅히 기뻐할 일 아닙니까?"
성검펜스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물었다.
그 모습이 못마땅하다는 듯 휴마누스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나도 현재의 세르펜스가 돌아온다는 건 기뻐. 하지만···, 그럼 너는?"
"바라던 대로,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됩니다."
"진심이야? 정말 그러길 바라?"
"그러면 전하께서는 제가 남기를 바라십니까?"
"······."
성검펜스의 반박에 휴마누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의 눈을 피하며 입을 꾹 다문 휴마누스를 바라보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성검펜스는 무심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