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9회
72. 공작님과의 재회 (1)
"그럼 유지스는 그렇다 치고, 다른 사람들이랑은 작별 인사를 안 나눠 봐도 괜찮겠어?"
"···예."
성검펜스가 마지막으로 나와 유지스에게 한 번씩 눈길을 준 뒤,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는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다.
그럴 만도 하다.
지난 며칠간, 실질적으로 그가 교류한 사람은 나와 유지스와 휴마누스, 리에나뿐이었으니까.
그마저도 리에나는 신성력 날개 만드는 법을 알려주느라 그런 거였다.
성검펜스는 나머지 일행들을 어려워했다.
터놓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낯설어서 그런 것도 없잖아 있었을 테지만.
그보다는 적이었던 이들이 실은 선한 사람들이었다는 게, 혼란스러워서 그랬던 것이 아닐까 한다.
1회차에서도 유지스와 휴마누스는 성검펜스의 아군이었으며, 리에나와는 접촉 자체가 없었다.
아예 다른 세상에서 온 나는 말할 것도 없고.
그러한 이유 때문인지, 성검펜스는 우리 넷을 제외한 이들과 직접적인 대화를 피해왔다.
'그리고 마지막에 와서도···.'
성검펜스는 그들과의 대화를 거부했다.
"뭐···. 네가 그렇다면야."
휴마누스가 멋쩍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억지로 대화를 강요해 봤자, 서로 불편할 뿐일 테니.
"그동안 고마웠어, 세르펜스."
"저도 감사드려요."
휴마누스와 리에나가 나란히 감사를 표했다. 그에 성검펜스는 습관적으로 '아닙···.'까지 말했다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이로써 성검펜스의 과외는 정말로 끝이 났다.
이제 남은 것은 이별뿐.
- 스릉
성검펜스가 조용히 검집에서 성검을 뽑았다. 그러고는 정중하게 양손으로 성검을 받쳐 들고 휴마누스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휴마누스는 곧바로 그것을 받아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손에 있을 때와 사뭇 다른 성검의 모습을 찬찬히 눈에 담았다.
한참을 그러고 나서야 조심스럽게 성검을 잡아 들었다.
성검펜스의 손에서 성검이 떨어지는 바로 그때.
"으윽···."
녀석이 신음을 흘리며 크게 휘청였다.
휴마누스가 깜짝 놀란 와중에도 순발력을 발휘하여, 성검을 쥔 손을 내리고 나머지 한쪽 팔로 쓰러지려는 그를 붙잡아 지탱했다.
"세르펜스! 괜찮아?!"
"으, 으음···."
별로 괜찮지 않은 모양이다.
휴마누스를 떼어낼 생각조차 못 하고, 도리어 그에게 기대는 걸 보니 말이다.
녀석은 그 상태로 인상을 찡그린 채 머리를 짚으며 두통을 호소했다.
나와 유지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들에게 다가갔다.
윈스톤도 검을 집어넣고 가까이 다가왔다.
"괜찮아요, 세르펜스? 돌아온 겁니까?"
"으, 윽···. 시온···."
세르펜스가 나를 '시온'이라 부르며 자신이 돌아왔음을 증명했다.
그러고는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표정으로 내게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했다.
"예? 왜요? 뭔데요?"
"제가, 이대로···. 기절···하면···."
돌연 세르펜스가 자신의 기절을 예고했다.
저런 소리를 하는 거로 보아, 멀어지려는 정신을 억지로 붙들고 있는 듯하다.
참으로 대단한 인내력이 아닐 수 없다.
'그냥 기절하면 편할 텐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까지 무리하며 두통을 참아내고 있는 걸까?
지금 당장 전하지 않으면 안 될. 아주 중요하면서도 시급한 말임이 틀림없다.
"네, 네! 기절하면요?"
나는 끊어질 듯 말 듯. 희미한 세르펜스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서며 물었다.
그러자 세르펜스가 힘겹게 입술을 달싹였다.
"저를 묶어···, 주십시오."
"네! 그러니까 제가 세르펜스를 묶어 드리면···, 예?"
"저번처럼···."
그 말을 끝으로 세르펜스는 완전히 의식을 잃고 몸을 축 늘어트렸다.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현 상황에 근거하여 세르펜스가 한 말을 해석해 보았다.
세르펜스는 오랫동안 성검과 접촉했었다.
그리고 그가 성검과 접촉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볼타 산맥에서 간접적으로 성검과 접촉했던 세르펜스는 곧장 기절했고, 꿈속에서 1인칭 시점으로 타락펜스가 살아온 삶의 편린을 지켜보았다.
그 후, 깨어났을 때. 세르펜스는 꿈과 현실을 혼동하여 내 목을 졸랐다.
'즉 저번처럼 자신이 내게 위해를 가할지도 모르니까, 묶어두라는 뜻이구나!'
너무 뜬금포로 던져진 말이라 해석하는 데 제법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무리 없이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 문제는 성검펜스가 왔다 간 상황에서도 저번과 비슷한 일이 벌어지느냐다.
만일 이번에도 녀석이 악몽에 시달린다면, 얼마든지 그럴 가능성이 있다.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공포에 질린 눈동자를 마주하며, 잔뜩 겁에 질린 상태로 꿈에서 깨어난다면.
녀석이 무슨 돌발 행동을 벌일지 알 수 없다.
저번처럼 나를 공격할 수도 있고, 성검펜스가 그러했듯 자해를 저지를지도 모른다.
'본인이 원하기도 했으니···. 안전하게 묶어두는 게 좋겠지?'
세르펜스라면 밧줄이든 쇠사슬이든. 아무리 꽁꽁 묶어 봐야, 순식간에 끊어낼 수 있을 테지만.
포박에서 벗어나는 그 짧은 시간이면 녀석의 정신을 되돌리기에 충분했다.
결론이 나왔다. 녀석을 묶어두기로.
"시온, 너···. 언제 세르펜스를 묶은 적 있어? 대체 왜?!"
휴마누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경악하며 소리쳤다.
내 평생 들어본 헛소리 중 베스트 탑 10에 선정될 만한 발언이다.
기존 랭크에 등록된 헛소리 대다수는 악숭 세력이 떠들어 댄 개소리들뿐이었는데, 휴마누스가 당당히 그곳에 자신의 이름을 올린 것이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어처구니가 없었다.
세르펜스의 손목에 수갑을 채워본 적은 있으나 묶어본 적은 없다.
이제 곧 묶을 예정이지만, 아무튼 이제까지는 없었다.
게다가···.
"휴마누스도 그때 함께였잖아요. 볼타 산맥에서."
"나, 나도?! 뭔가 착각한 거 아니야?"
자신도 꿈을 통해 2회차를 엿보고, 그로 인해 정신착란을 일으켜 놓고 저딴 소리를 하다니.
곱절로 어이가 없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눈새눈새가 눈치 없었던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니.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설마 기억 안 납니까? 산맥 전역에 결계를 펼치고 나서 기절했다가···."
"그때 본 건 네가 세르펜스를 무릎 꿇린 것뿐인데? 설마 묶기까지 했던 거야?!"
내가 차근차근 설명해 주려 했건만.
휴마누스가 내 말을 끊어버리고, 이상한 소리를 해댔다.
리에나가 '헉!' 하고 숨을 들이켰으며, 푸로르는 '헐···.' 하고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에드나는 조용히 손을 들어 올려 아니마의 귀를 막았다. 아이 교육에 바람직하지 못한 얘기라 판단한 것이다.
"평소에 세 분은 뭘 하고 지내시는 건가요?!"
"대체 주군께 무슨 짓을 한 거요?"
유지스가 경악하며 질문했고, 윈스톤이 따지듯 물었다.
당장에라도 나와 휴마누스에게서 세르펜스를 떼어놓기라도 할 기세다.
다들 눈새눈새 때문에 단단히 오해한 모양이다.
"여러분 그런 거 아닙니다! 휴마누스가 하는 헛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마세요! 저 새끼는 세르펜스에게 이상한 걸 가르친, 아주 질 나쁜 친구입니다!"
"내가 뭘 가르쳤다는 건데?!"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세요!"
나와 휴마누스가 티격태격하기 시작하자, 갑자기 세르펜스의 몸이 붕 떠올랐다.
보다 못한 유지스가 바람의 정령을 불러 세르펜스를 압수해 간 거다.
그렇게 둥실둥실 떠오른 세르펜스의 몸은 공주님 안기 자세로 유지스의 품에 안겼다.
"어쨌든 휴마누스가 오해한 거고, 시온은 세르펜스를 묶은 적 없다는 얘기죠?"
"네, 아직은 없습니다."
"아직···은?"
"이제 묶어야 하잖아요."
"묶을 거예요?"
"묶어달라잖습니까?"
"······."
유지스가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런 유지스에게 안겨있는 세르펜스를 보호하기라도 하듯, 윈스톤이 나와 유지스 사이를 가로막았다.
"와, 이렇게 사람을 이상하게 몰아가네?!"
억울해도 이렇게 억울할 수가 없다.
심지어 묶어 달라고 먼저 말한 건 세르펜스인데, 어째서 내가 이런 취급을 당해야만 하는 걸까?
너무 부조리하다.
"볼타 산맥에서 세르펜스가 성검과 접촉했었잖아요! 그때 세르펜스가 꿈을 통해 다른 시간대의 자신이 겪었던 일을 보게 되었는데, 깨고 나서도 착란 증세를 일으켜서 조금 위험한 짓을 했거든요? 그래서 세르펜스는 '저번처럼' 사고 치지 못하게, 자신을 묶어달라고 한 겁니다. 제정신을 되찾을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요. 저는 그런 세르펜스의 의견을 존중하여, 그의 뜻에 따르기로 한 거고요."
나는 일류 래퍼 못지않은 속도로 말을 다다다 쏟아내면서도, 혀 한 번 꼬이지 않고 무사히 설명을 끝마칠 수 있었다.
위기의 순간에는 초월적인 능력이 발휘된다더니. 그 말은 진실이었다.
"아···. 그랬군요. 이해했어요. 그런 줄도 모르고, 오해해서 죄송해요."
유지스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사과했다. 윈스톤도 헛기침을 하며 슬쩍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허리에 양손을 얹어 화가 났다는 걸 온몸으로 표출하며, 일행들이 오해하도록 유도한 휴마누스를 노려보았다.
"일단 세르펜스를 어서 묶···. 아니, 눕혀 놓는 게 좋지 않을까?"
휴마누스가 내 시선을 피하며 말을 돌렸다.
자신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오해를 했는지 자각하여 무안해서 저러는 걸 테다.
"그래서 시온은 대체 왜 공작 나리를 무릎 꿇린 거래···?"
푸로르가 무어라 혼잣말을 중얼거리긴 했으나, 그건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휴마누스의 말처럼 당장 급한 건 세르펜스를 묶어서 침대에 눕혀 놓는 일이다.
나와 유지스는 천막으로 향했고, 휴마누스도 쭐레쭐레 따라왔다.
나머지 일행들은 따라오길 거부했다. 그중에서도 윈스톤이 특히나 강력하게 거부 의사를 표했다.
다소 어린애 같은 구석이 있으나, 무력(武力)적인 측면에서는 존경스러운 주군이 무력(無力)하게 포박당한 모습은 보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이제 묶어야···겠죠?"
유지스가 세르펜스를 침대에 내려놓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세르펜스를 묶어 볼 기회를 양보해 달라는 건가?
"네, 그러세요."
"세르펜스가 묶어달라고 부탁한 사람은 시온이잖아요."
내 착각이었나 보다.
유지스가 자신의 아공간 주머니에서 밧줄을 꺼내어 내 손에 쥐여 주었다.
비록 자신이 세르펜스를 들고 오긴 했지만, 직접 묶는 건 부담스러운 모양이다.
"진짜 묶으려고?"
"본인이 원하잖아요."
"그래도 좀···."
휴마누스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내 손에 들린 밧줄과 세르펜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세르펜스를 밧줄로 묶어두는 게 좀 께름칙한가 보다.
"저는 뭐, 세르펜스를 묶고 싶어서 묶으려는 줄 아십니까? 세르펜스가 걱정돼서 이러는 겁니다! 휴마누스도 성검의 선택을 받았던 세르펜스가 자해하는 거 보셨잖아요? 직접적으로 말은 안 했지만, 그 녀석 분명 자살했을 겁니다. 만약 세르펜스가 깨어나자마자 콱 혀 깨물고 죽으려 한다면 휴마누스가 책임지실 겁니까?"
"끄응···."
세르펜스가 자살 기도를 할지도 모른다는 말에, 휴마누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아차! 그러고 보니 입에도 뭔가 물려 놔야겠네. 혹시 재갈 같은 거 가지고 다니시는 분? 기왕이면 한 번도 안 쓴 새것으로. 악숭이들 입에 들어갔다 나온 걸, 세르펜스 입에 물리기는 좀 그렇잖아요."
"······."
"······."
휴마누스와 유지스는 침묵했다. 없는가 보다.
대충 손수건이라도 뭉쳐서 입에 욱여넣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