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0회
72. 공작님과의 재회 (2)
"그냥 내가 옆에서 지켜보다가, 세르펜스가 깨어나면 정신이 들 때까지 못 움직이게 붙잡고 있는 건 어때?"
"혀를 깨물 수도 있다니까요?"
"···입은 막아놓고."
휴마누스가 꽤나 솔깃한 제안을 해 왔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만약 세르펜스의 저항이 생각보다 거세서, 휴마누스나 세르펜스 둘 중 하나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그래도 밧줄보다는 안전할 것 같은데···."
"그뿐만이 아닙니다. 세르펜스의 특기 중 하나가 적의 무기를 빼앗아 사용하는 겁니다."
자칫하다가는 휴마누스가 성검을 빼앗길 위험이 있다. 그리고 세르펜스가 또다시 성검을 쥐게 되면 이하 생략.
아무리 눈치 없는 휴마누스라 하더라도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으리라.
휴마누스가 자신의 허리춤을 힐끔 쳐다보았다.
요 며칠 내내 비어있던 그의 검집에는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온 성검이 들어있었다.
"그럼 유지스의 정령은 어때?"
"세르펜스가 벗어나려고 힘을 쓰다가 정령이 역소환되고, 유지스가 내상을 입겠죠."
"···그냥 묶자."
결국 휴마누스가 포기 선언을 내뱉었다.
그렇게 휴마누스와 유지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밧줄을 들고 세르펜스에게로 다가갔다.
막상 녀석을 묶으려고 하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청은 빛 머리칼 하며, 곱게 감긴 두 눈과 곱상하기 짝이 없는 순한 얼굴.
세르펜스는 오늘도 어김없이 성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참으로 무방비해 보였다.
"저, 뭔가 굉장히 나쁜 놈이 된 것 같은데요···? 감히 인간 주제에 기절한 천사님을 밧줄 따위로 묶어도 되는 걸까요?"
완전 인간말종 악숭 쓰레기가 따로 없다.
당장에라도 천벌을 받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떤 느낌인지는 알겠는데, 그래도 할 수밖에 없잖아요? 세르펜스는 엄연히 사람이에요. 더군다나 시온은 신의 사자잖아요. 그러니까 괜찮을 거예요!"
유지스가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다.
세르펜스는 사람이니까 묶어도 된다는 뜻인지, 내가 신의 사자니까 진짜 천사를 묶어도 괜찮다는 뜻인지 조금 헷갈렸다.
그래도 마음을 가다듬는 데 도움이 되긴 했다.
"난 모르는 일이야. 세르펜스는 너에게 부탁했어."
반면에 휴마누스는 도움이 하나도 안 되었다.
혹시 내가 자신에게 세르펜스 포박 업무를 떠넘기기라도 할까, 재빨리 발을 빼기에 바빴다.
'결국 내가 할 수밖에 없는 건가?'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고, 침대 위에 얌전히 누워있는 세르펜스를 내려다보았다.
"이건 그러니까···. 신생아의 모로 반사를 잡아주기 위해, 속싸개로 단단히 감싸주는 것과 비슷한 겁니다!"
그렇게 나는 누구에게 하는 건지 모를 변명을 늘어놓으며 세르펜스를 묶었다.
밧줄로 양손을 등 뒤에서 모아 묶은 다음, 상체를 두어 바퀴 정도 감았다. 발목을 묶는 것 잊지 않았다.
그리고 '쪽쪽이' 대용으로 뭉친 손수건을 세르펜스의 입에 쑤셔 넣었다.
수고로운 일을 끝마쳤음에도 찾아온 것은 보람이 아닌 배덕감이었다.
나는 밧줄로 꽁꽁 묶인 세르펜스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불을 고이 덮어주었다.
보이지 않으니까 마음이 조금 편안해진 느낌이다.
"그나저나 세르펜스의 정신을 되찾게 하려면, 세례명을 불러야 하는데···."
나는 탁탁 손을 털면서 휴마누스와 유지스를 바라보았다.
유지스라면 세례명을 들어도 세르펜스가 싫어하지 않을 것 같은데, 휴마누스는 조금 애매하다.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하며 휴마누스만 나가라고 하기도 뭐하다.
난감한 마음에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찰나. 유지스가 손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럼 저는 나가볼게요. 될 수 있으면 세례명은 세르펜스의 입을 통해서 직접 듣고 싶거든요."
"나도!"
유지스의 말에 휴마누스가 동조했다. 정말 다행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휴마누스의 세례명을 여기저기 떠들고 다닌 게 떠올라 괜스레 미안해졌다.
"그런데 시온은 혼자 있어도 괜찮겠어요?"
"녀석이 눈 뜨자마자 냅다 세례명을 외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저번에도 세례명을 부르니까 곧장 정신을 되찾았거든요."
"시온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세르펜스에 관한 일이라면 시온을 따라올 자가 없으니까요."
내가 자신만만하게 말하자, 유지스가 걱정을 거두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녀를 안심하게 하려는 말이 아니라 나는 정말로 자신이 있었다.
아니, 자신이 있었다기보다는 확신이 있었다는 표현이 맞으리라.
세르펜스의 성향상. 어떤 혼란스러운 상황이 찾아와도, 무턱대고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고 눈을 떠보니 꽁꽁 묶여있는 상태라 하더라도.
그는 눈앞에 보이는 사람을 죽이는 대신, 역으로 제압하고 이것저것 물어보며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하는 걸 우선시할 거다.
'하물며 나처럼 무능력한 일반인이 그 상대여서야.'
내게 주어진 힘이 없다는 게 서러울 때가 많지만, 이럴 때만큼은 다행으로 느껴졌다.
유지스와 휴마누스가 밖으로 나갔다. 나는 천막 한구석에 방치된 의자를 끌어와 세르펜스의 머리맡에 두고 앉았다.
무슨 꿈을 꾸는 건지, 기절한 세르펜스의 얼굴이 어딘가 모르게 외로워 보였다.
'본격적인 악몽으로 넘어가기 전에 강제로 깨워야 할까?'
순간 그런 생각이 떠올랐으나 과연 그게 가능한 것인지 의문이 뒤따랐다.
세르펜스도 기절하지 않으려고 버텼지만, 결국 의식을 잃고 이렇게 꽁꽁 묶여버리지 않았는가.
몸을 이리저리 뒤집어가며 묶는 동안에도 깨어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으니.
지금 당장은 무슨 짓을 해도 일어나지 않을 성싶다.
그래도 미련이 남아서 세르펜스의 볼을 콕콕 찔러보았다. 그러나 녀석은 미동조차 없었다.
아무 반응도 없는 그 모습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나도 모르게 세르펜스의 코끝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간질간질한 바람이 느껴졌다. 당연한 얘기지만 녀석은 숨을 쉬고 있었다.
보는 사람 한 명 없지만, 괜히 무안해져서 손가락을 거둬들였다.
'아직은 괜찮아 보이긴 하는데···.'
영 아니올시다 싶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깨워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초조하게 세르펜스를 지켜보았다.
혹시 몰라, 아공간 주머니에서 방음 스크롤을 한 장 꺼내어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그러고 나서 오래 지나지 않아 녀석의 얼굴이 점차 하얗게 질려갔다.
"세르펜스···?"
반사적으로 녀석을 가볍게 흔들며 이름을 불러보았다. 그러나 세르펜스는 낮은 신음만 흘릴 뿐. 깨어나지 않았다.
돌연, 추위라도 타는 사람처럼 세르펜스의 몸이 떨렸다.
"아, 아으···. 이, 이에··· 으아아읍···."
입에 물려놓은 손수건 때문에 정확히 뭐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은 무언가 말하고 있었다.
손수건을 빼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했으나 결론은 금방 나왔다.
세르펜스가 더 이상 말을 하는 대신, 턱이 덜덜 떨릴 정도로 이를 악다물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래서야 손수건을 빼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흐으, 흐으으···."
세르펜스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지체 없이 무릎 위에 올려뒀던 스크롤을 찢었다.
"아도르, 아도르! 일어나 보세요! 빨리!! 당장 일어나지 않으면, 아도르 몫으로 남겨둔 초코 퍼지 마시멜로 쿠키 샌드를 제가 다 먹어버릴 겁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세르펜스를 흔들었다.
볼타 산맥에서는 괴로워하는 녀석을 흔들며 소리치니 금방 깨어나더니만.
아무리 녀석을 부르고, 소리를 지르고, 간식을 가지고 협박해 본들. 어찌 된 영문인지 깨어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 아으···, 에아···븝, 으으아음···!"
세르펜스가 또다시 무어라 중얼거리며 몸을 뒤척였다.
괴로움 가득한 표정 탓에 그 작은 동작조차 크게 느껴져, 몸을 뒤척이는 게 아니라 뒤트는 것처럼 보였다.
이러다 멀미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스러울 정도로 거세게 흔들어 보았지만, 효과는 없었다.
바로 눈앞에서 이렇게나 고통받고 있는데 도와줄 수 없다니.
"어, 어떡하지···?"
흔드는 건 소용이 없다. 귓가에 대고 소리를 질러대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는 발을 동동 굴러가며 다른 방법을 떠올려 보려 했지만,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가고, 차가운 물이라도 뒤집어쓴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물을 뿌리자!'
이게 옳은 판단인지 미루어 생각해 볼 여유도 이성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러는 동안에도 세르펜스의 상태는 점점 더 나빠졌다.
나는 곧바로 아공간 주머니에서 물통을 꺼내어 세르펜스의 얼굴에 쏟아부었다.
"흐읍!"
드디어 세르펜스가 숨을 멈추며 눈을 번쩍 떴다.
나는 다가오는 안도감을 물리치고, 긴장감을 단단히 붙들었다.
"아도르···? 정신이 들어요?"
나는 비어버린 물통을 아무렇게나 집어 던지고 세르펜스의 양어깨를 붙잡았다.
눈을 뜨긴 했지만, 녀석의 눈동자에는 초점이 잡히지 않았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짧고 거친 호흡을 빠르게 반복하며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다.
아무래도 내 말이 아예 들리지 않는가 보다.
나는 녀석을 억지로 일으켜 앉히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아도르!!! 정신, 쫌!! 차려요!!!!"
"으, 으움···. 어, 으우···?"
드디어 세르펜스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녀석이 눈을 깜박이며 나를 마주 보았다. 그러더니 그 얼굴이 점차 울상으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혼자 길을 잃고 헤매던 어린아이가 부모와 상봉하고 안도하는 듯한 표정이다.
"흐, 흐으···, 흣···! 어, 어우으···!"
세르펜스가 흐앙 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눈물을 흘린다는 점은 변하지 않았지만, 느낌이 사뭇 달랐다.
조금 전까지는 망연한 표정으로 금방이라도 끊길 듯한 숨을 이어나가며, 눈물만 뚝뚝 흘려댈 뿐이었다면.
이제는 서러움에 펑펑 눈물을 흘리며 부모의 품을 파고드는 어린아이 그 자체였다.
"어우···, 어우으응···. 흐으!"
세르펜스가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으며 계속해서 '어우어우' 하는 소리를 반복했다.
입에 물린 손수건 때문에 발음이 뭉개질 대로 뭉개졌지만, 녀석이 내 이름. 즉, '선우'라고 말하고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나는 녀석의 떨리는 등을 가만가만 토닥여 주었다.
"아이고! 누가 우리 공작님을 괴롭혔어요, 누가?! 아주 그냥, 내가 혼쭐을 내줘야겠네!"
"흐으윽, 어, 우으···! 아, 아우이에으, 흐읍! 으아에 아아, 그흣, 히허으으애···. 아흐읏···!"
세르펜스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해댔다. 마치 옹알이라도 하는 것 같다.
가뜩이나 발음도 안 좋은데, 울음소리까지 뒤섞이니 당최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무서운 일을 당했다며 하소연이라도 하는 걸까?
그 내용이 궁금하긴 하나 입안의 손수건을 빼내려면 녀석을 떨어뜨리는 게 먼저다.
아무리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한 행동이라 한들.
내 어깨에 이마를 비벼대며, 정신없이 울어 젖히는 아이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칠 것 같지 않다.
'그냥 자신을 떼어놓으려는 거라고 생각하겠지.'
어차피 세르펜스는 자신의 입에 무언가 물려있는 것도 자각하지 못한 채, 옹알거리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두서없이 마구잡이로 떠들어대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일단 달래놓고 차근차근 얘기를 나누는 게 좋겠다.
"이제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제가 있잖아요?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제가 다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세르펜스를 괴롭힌 나쁜 놈들이 다시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쫓아내 버릴 테니까, 이제 안심해도 됩니다."
"어우으···으읏, 흐읍!"
아까 세르펜스의 얼굴에 뿌렸던 물과 녀석이 흘리고 있는 눈물 때문에,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그래도 나는 계속 녀석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세르펜스가 안정을 되찾고 울음을 그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