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597화 (597/925)

597회

72. 공작님과의 재회 (9)

"앗?!"

어디선가 외마디 비명과도 같은 탄식이 들려왔다. 그 소리의 근원지는 다름 아닌 유지스였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쏠리자, 유지스가 황급히 양손으로 입을 막고 눈동자를 대록대록 굴렸다.

그렇게 모두의 눈치를 살핀 유지스의 눈동자가 최종적으로 향한 곳에는 내가 있었다.

유지스의 노란 눈동자 속에는 일말의 원망이 담겨 있었다.

'하긴. 아쉽기도 하고, 아깝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그런 복잡한 기분이겠지.'

그 기분을 내가 왜 모를까. 나는 유지스를 이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세르펜스에게 이름으로 불리기 위해, 나와 그녀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 왔던가.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제안하면서도 영 내키지 않았다.

생판 모를 남에게 고이 아껴 두었던 간식을 빼앗긴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거 좋네! 사실 나도 내 일행들과 세르펜스가 거리를 두는 것 같아서, 아쉽다고 생각했어."

무려 십여 년간 세르펜스에게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노래를 부른 끝에, 최근 들어서 겨우 그 목적을 달성한 휴마누스가 반색하며 말했다.

휴마누스도 아쉬움을 느꼈다고 말하였으나, 유지스와 내가 느낀 아쉬움과는 다른 것이었다.

'휴마누스가 성격 좋다는 건 새삼스러울 것 없는 사실이지만···.'

오늘따라 그가 대인군자로 보였다.

나는 그런 휴마누스의 넓은 도량에 감탄하며, 그를 본받아 내 제안을 계속 밀고 나가기로 했다.

"맞습니다. 안 친하면 데면데면할 수 있다는 건 인정 하는데, 다들 세르펜스에게는 특히나 더 거리를 두고 있잖아요? 세르펜스도 세르펜스대로 선을 딱딱 긋는 느낌이고. 이런 식으로 하면 평생 가도 친해지기 어렵습니다."

내 말에 세르펜스가 곤혹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성검 일행을 믿는 것과는 별개로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이 없는가 보다.

낯선 사람들과 접하며 관계를 넓혀나가는 것이 무섭기도 하고, 현재 친하게 지내는 소수의 사람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까닭이리라.

나는 숟가락으로 수프를 휘휘 저으며 생각했다.

'좁고 깊은 인간관계도 좋지만, 현재의 인간관계에 만족하며 그걸 전부라고 여겨서는 좀 곤란한데···.'

게다가 세르펜스는 아직 어렸다.

앞으로 그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 마주칠 테고, 그중에는 세르펜스와 마음이 잘 맞는 좋은 사람도 있을 거다.

그런 값진 기회를 벌써 차단해서는 안 된다.

"공작 나리도 별로 내키지 않아 하시는 것 같은데, 꼭 그래야만 할까? 제국 최고 귀족인 공작 나리를 이름으로 부르는 건, 나도 부담스럽기도 하고···."

털털하기로는 휴마누스 이상 가는 푸로르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불편하다는 기색을 보였다.

억지로 친하게 지내도록 강요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푸로르의 말에는 크나큰 오류가 있었다.

"그렇게 따지면 휴마누스는 장차 제국의 황제가 될 예정인 황태자인데요?"

"아차, 그랬었지! 성격이 워낙 쌈박하다 보니 잊고 있었어."

푸로르의 말에 휴마누스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성격이 쌈박하다는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이고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자신이 황태자인 걸 까먹었다는 말에 슬퍼해야 할지 헷갈리나 보다.

'그래도 그만큼 휴마누스에게 사람을 편하게 해 주는 재주가 있다는 거니까, 칭찬이 맞겠지.'

반대로 세르펜스에게는 묘한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분명 친근하게 대해주는 것 같고 다정다감한 성격으로 보이는데, 이상하게도 사적인 친분을 쌓기 어려운 사람.

그게 바로 세르펜스의 이미지였다.

과할 정도로 격식을 차리고 분명하게 선을 그어, 이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분위기를 풍겨댄 탓이다.

녀석이 그렇게 된 배경에 전대 프라시더스 공작이 존재한다는 건, 이제 언급하는 것조차 지겨워진 뻔한 이야기다.

이쯤 되면 마왕도 전대 프라시더스 공작에겐 한 수 접어줘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나는 안쓰러움을 가득 담아 세르펜스를 한 번 바라봐 준 뒤, 고개를 돌려 다시 푸로르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세르펜스는 여러분과 친해지는 게 싫어서 저러는 게 아닙니다. 저 녀석은 그냥 낯가림이 심하고 소심한 데다가, 예의가 몸에 뱄을 뿐이에요. 일단 친해지고 나면 굉장히 살가워지는 데다가, 장난도 잘 받아줍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가 잠시 말을 멈추고 수프를 떠먹으며, 일부러 뜸을 들였다.

대화에 참여하지 않고, 귀만 열어둔 채로 식사 중이던 일행들도 손을 멈추고 내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두 명을 제외한 모두의 얼굴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제외된 두 명은 아니마와 세르펜스다.

아니마는 결론이 어떻게 나오든 에드나를 따라하기로 마음먹었는지 별생각이 없어 보였고, 세르펜스는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불안한 눈치다.

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세르펜스의 등을 가볍게 토닥여 주었다.

"이 녀석, 은근 허들이 낮아서 작정하고 친해지려 다가가면 생각보다 쉽게 마음을 열어줍니다."

"야! 그렇게 말하면 나는 뭐가 돼?!"

세르펜스와 알고 지낸 지 20년 가까이 되어가는 휴마누스가 울컥한 목소리로 반발했다.

오늘도 휴마누스는 눈치가 없어 내 말의 뜻을 잘못 이해하고야 말았다.

내 말은 어디까지나 '소중한 것이나 개인적인 친분을 만들어도 괜찮다는 걸 깨달은' 현재의 세르펜스에 국한된 얘기였다.

즉, 나는 휴마누스의 지난 십여 년간의 노력 자체를 무시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비록 그것이 삽질과 뻘짓의 역사라 하여도 말이다.

나는 안타깝다는 시선으로 휴마누스를 바라보며 아련하게 말했다.

"휴마누스는···. 참 좋은 친구죠. 눈치가 조금이라도 있었으면 정말 완벽할 뻔했는데 뭐 어쩌겠어요. 다 지난 일인 것을···."

"칭찬이야, 욕이야?"

"칭찬입니다."

"왜 욕 같지?"

"휴마누스에게 칭찬과 욕을 구분할 수 있는 눈치가 없어서?"

"······."

계속 나와 대화를 해 봤자 자기만 손해라고 생각한 걸까?

휴마누스가 샐러드를 입에 욱여넣으며 묵비권을 행사했다. 훌륭한 판단이다.

나는 그에게서 신경을 끄고, 모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무튼 강요하는 건 아니니까, 정 불편하면 지금처럼 부르셔도 상관은 없지만···. 세르펜스가 여러분과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는 것만 알아주세요. 유명한 얘기니 다들 아시겠지만, 얘가 어린 나이에 공작 자리에 올랐잖습니까? 뒤에서 받쳐주는 보호자 하나 없이 가문을 이끌어 나가랴, 어른들 사이에 끼어 정치를 논하랴···. 그러다 보니, 또래 친구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어려워합니다."

말을 하다 보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처음 이름으로 부르기를 제안했을 땐, 세르펜스가 성검 일행과 에드나를 이름으로 불렀으면 하는 바람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세르펜스를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사정하는 자리가 되어 있었다.

어쩐지 아이 입학식에 참석하여, 착해 보이는 반 친구를 붙잡고 '우리 애와 친하게 지내며 잘 좀 챙겨줘.' 같은 소리를 해대는 극성 부모가 된 기분이다.

'어? 잠깐만, 보통 그런 경우 아이가 창피함을 느끼지 않나···?'

나는 아차 싶은 마음에 서둘러 옆에 앉은 세르펜스를 살폈다.

녀석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그, 그랬구나···. 내가 공작 나리를 조금 오해했었나 봐···."

푸로르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어색하게 말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싶어 얼떨떨해하는 게 분명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드리는 질문인데, 제가 오버한 겁니까?"

"으음···, 조금 그런 것 같습니다."

내 물음에 세르펜스가 어물어물 대답했다.

부끄러워하는 녀석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미안한 감이 없잖아 있다.

하지만 옥수수 수프 속에서 점차 흐물흐물해지는 크루통을 걸고 맹세컨대, 나는 녀석을 부끄럽게 하려고 이런 말을 꺼낸 게 아니다.

세르펜스가 다른 사람과 거리를 두는 건 그러려니 할 수 있다.

그러나 세르펜스가 부담스러워 친해지기 좀 그렇다는 얘기를 들었더니, 나도 모르게 간절해져서 이렇게 되어버린 걸 어쩌겠는가!

'되돌리기는 늦었어. 이미 엎어진 물이야.'

어쩔 수 없으니, 지금 이 기회를 살려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이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세요! 친근함이 넘쳐서 절로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그런 모습을 보며 친해지고 싶어 하는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는 것 같은데···?"

푸로르가 그 한 사람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 손가락 끝을 시선으로 따라가 보니, 유지스가 세르펜스만큼이나 얼굴을 붉힌 채로 귀를 파닥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과연 유지스는 세르펜스를 좋아한다는 걸 숨길 마음이 있는 걸까 의문이 들었다.

"어쨌든 아까도 말했다시피, 공작 나리께서 싫다는데 괜히 혼자 친한 척하며 이름으로 부를 생각은 없어."

"와! 제가 이렇게까지 사정했는데, 너무 매정하시네!"

"아직 할 말 남았어, 끝까지 들어 봐."

보통 끝까지 들어보라고 말하는 경우, 열에 아홉은 반전이 기다리기 마련이다.

나는 푸로르가 시키는 대로 얌전히 닥치고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공작 나리께서 이름으로 불리며 편하게 대해주길 바라신다면야,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지. 툭 까놓고 말하자면 완전 개이득이잖아?"

아주 훌륭한 결론이다.

나는 속으로 푸로르를 '거래할 줄 아는 사람'으로 평가하며 짝짝짝 박수갈채를 보냈다.

푸로르가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시선을 옮겨 세르펜스를 바라보았다.

"아무튼 제 생각은 그런데, 공작 나리께선 어떠십니까?"

"저도 괜찮···습니다. 여러분을 생각해서라도, 제가 진작에 나서서 이런 제안을 드렸어야 했는데···. 제 신분 때문에 여러분께서 불편해할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제 불찰입니다. 선우는 어디까지나 이런 제 실수를 만회하고자···."

"저기, 공작 나리? 아니, 세르펜스 나리? 굳이 해명하지 않으셔도 되니까, 진정하십쇼."

"······."

진정하라는 푸로르의 말에 세르펜스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말을 할 자신이 없었나 보다.

어느 한쪽이 입을 닫아버렸으니 대화는 끊겼고, 푸로르는 쩝 입맛을 다시고 숟가락을 들어 식사를 시작했다.

'어쨌거나 푸로르는 통과했고. 남은 사람은 에드나, 아니마, 리에나인가?'

나는 속으로 세르펜스가 아직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 사람 명단을 떠올리며, 테이블 밑으로 세르펜스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직접 말을 꺼낼래, 아니면 또 내가 대신 말해줄까?'라는 뜻을 담아.

세르펜스는 전자를 선택했다.

"으음···. 다른 분들은 괜찮으십니까?"

"네, 저도 괜찮아요. 세르펜스 님이라 불러드리면 되지요?"

리에나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앞서 정신없는 대화가 오고 간 이후라, 리에나의 태도가 무척이나 여유로워 보였다.

그렇게 간단히 리에나의 동의를 얻어낸 세르펜스는 나란히 붙어있는 에드나와 아니마를 쳐다보았다.

"아니마눈 언니야가 하자는 대로 할꼬얌!"

아니마가 애교라는 단어가 수치심을 느끼고 도망갈 것 같은 말투를 구사하며, 에드나에게 들러붙었다.

저렇게 억지로 혀 짧은 소리를 내다가 혀에 마비가 오는 건 아닐까 걱정스러울 지경이다.

"고용주님께서 저를 이름으로 부르시는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데···. 혹시 저도 고용주님을 이름으로 불러야 하는 거예요?"

에드나가 잠시 숟가락을 내려놓고 아니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질문했다.

그녀의 시선이 정확히 나를 향했으니, 이는 세르펜스가 아닌 나에게 하는 질문임이 틀림없었다.

"왜요? 우리 애 이름 불러주기 싫어요?"

"그런 건 아니고, 돈 주는 분의 성함을 함부로 불러대도 괜찮은가 싶어서···."

신분제 사회에서 살아온 에드나가 자본주의의 노예나 할 법한 소리를 해댔다.

아니,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온 나도 저런 말은 안 한다.

다른 사람이 듣기에도 에드나의 대답이 가관이었는지, 푸로르와 리에나가 귓속말로 무어라 쑥덕거리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런 이유면 그냥 막 부르세요. 참고로 저도 지금 이 시간부로 그쪽 애를 이름으로 부를 겁니다."

"···그렇다면 저도 리에나 님처럼, 고용주님을 세르펜스 님이라고 부를게요."

"저는 아니마를 그냥 아니마라고 부를 생각이었는데요?"

내 대답에 에드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다가 아니마에게 말을 붙였다.

"아니마, 서언우 씨가 널 그냥 이름으로만 부르겠다는데 괜찮겠니?"

"언니랑 친한 사람이야? 그러며눈 상관없쪄! 그리구 내가 언니를 대신해서 저 사람을 그냥 세르펜스라고만 부를 테니까, 언니는 걱정하지 말구 편한 대로 해!"

"세상에! 아니마, 너는 어쩜 이렇게 착하고 귀여울 수가 있니?! 게다가 말도 잘하고!"

에드나가 감탄하며 아니마를 꼬옥 껴안았다.

착함과 귀여움은 주관적인 영역이니 그러려니 할 수 있지만, 말을 잘한다는 건 매우 아니올시다 싶다.

'다섯 살짜리 꼬마가 와도 아니마보다 훨씬 정확한 발음을 구사할 텐데···.'

에드나는 보통 팔불출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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