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603화 (603/925)

603회

73. 공작님과 아르케 왕국 (5)

* * *

아르케 왕국은 전 영토가 녹지로 이루어졌다.

그렇기에 아르케 숲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그 명성에 걸맞게 타국에서 찾아온 여행자들을 가장 먼저 반기는 건, 차가운 돌과 흙으로 쌓아 올린 성곽이 아닌 빈틈없이 얽힌 나무들의 집합체였다.

불이 잘 붙지 않을까 걱정스러운 외양이었지만, 지난 역사 속에서 단 한 번도 화마에 휩싸인 적이 없다고 한다.

성벽을 대신한 나무들이 수분을 많이 머금고 있는 품종이라는 게 첫 번째 이유요, 정령들과 세계수의 힘으로 지켜지고 있다는 게 두 번째 이유였다.

'그런데 성검펜스가 1회차에서 세계수가 불탔다고 했잖아?'

더군다나 현재 세계수의 상태 또한 미심쩍었다.

따라서 저 거대한 나무의 집합체가 성벽으로서의 제 역할을 다 할 수 있을지, 매우 걱정스럽다.

'어차피 저 나무 성벽이 불탈 정도면 숲 전체에 불길이 번지고도 남았을 테니, 그 전에 외적의 침입을 막아야 한다는 걸 생각하면 아무래도 상관없으려나···?'

엘프들이 물의 정령을 소환할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이, 입국 심사가 끝났다.

엘프 병사가 신분증을 돌려주며, 유지스를 향해 친밀하게 말을 붙였다.

"제국에 머무르고 계신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오랜만에 조카를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 라엘드 님께서 기뻐하시겠군요."

라엘드 루트 아르케.

엘프들의 대표이자 유지스의 삼촌인 아르케 국왕의 이름이다.

아무래도 인간들의 국가와 달리 권위를 바탕으로 한 자리가 아닌지라, 일개 병사가 그 이름을 불러대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모양이다.

오히려 그게 당연하다는 듯, 유지스도 방긋방긋 웃으며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가족들을 못 본 지 꽤 오래된 듯해서, 더 바빠지기 전에 만나 뵈러 왔어요. 함께 지내는 친구들을 소개해 드리고 싶기도 했고요."

아주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심각한 문제를 의논하러 아르케 왕국에 방문한다는 본 목적은 흐려졌고, 우리는 어느새 친구 집에 놀러 온 아이들이 되어 있었다.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아무리 제국이 안전하다지만, 요즘 같은 흉흉한 시기에 홀로 외국에 나가 사는 가족이 있다면 걱정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주위에 좋은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면 분명 가족분들께서도 안심하실 겁니다."

엘프 병사가 제 일처럼 안도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유지스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곳이 제국과 맞닿은 국경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은 건 아닐까 다소 의심스럽다.

적어도 '제국과 접경한 지역이 아니라 이곳으로 오신 걸 보면, 이 주변에 다른 일이 있으셨나 봐요?'라는 질문 정도는 해야 마땅하거늘.

'말하는 걸 들어보면 엘프 왕이랑 아는 사이인 것 같으니, 유지스가 그의 조카라서 대충 넘어가는 거려나···?'

하지만 다크 엘프를 상대로 경계심을 갖다 버린 탓에, 1회차에서 세계수가 불타는 일이 벌어졌다는 얘기를 성검펜스에게 듣고 난 이후다.

그러니 모든 엘프를 대상으로 의심을 버린 것 같다는 생각에 무게가 쏠렸다.

누구보다도 깐깐하고 의심이 많아야 할 입국 심사관이 이 정도라니.

엘프들의 왕국이 오랫동안 명맥을 유지해 올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노예를 금지하는 룩스메아 교단의 교리 덕택이리라.

"그럼 오랜만에 가족들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함께 오신 분들도 아르케 숲에서 즐거운 추억을 많이 만드시고요."

이름 모를 엘프 병사가 우리들을 향해 친근하게 인사했다.

조금 전까지는 친구네 집에 놀러 온 듯한 기분이었는데, 이제는 휴양지에 놀러 온 기분이 들었다.

"출입을 허가합니다."

엘프 병사가 그렇게 말하며, 나무 성벽에 손을 얹었다. 그러고는 녹빛으로 일렁이는 정령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촘촘하게 얽혀있던 나무줄기들이 풀어 헤쳐지듯 움직였다.

'어째 동화 나라를 컨셉으로 한 놀이동산에 온 것 같은 느낌인데?'

나무줄기는 윈스톤과 휴마누스가 나란히 어깨동무하고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한 크기의 틈을 만들고 난 후에야 그 움직임을 멈췄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렇다 해도 두 사람이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하는 일은 없었다.

우리가 통과하고 나자 나무줄기가 서로를 옭아매듯 움직여 그 틈새를 다시 메꿨다.

성검 일행인 푸로르는 세 번째 시련 때문에 아르케 왕국에 방문한 적이 있는 만큼, 그 신기한 모습에 조금의 관심도 두지 않고 유지스에게 질문했다.

"아르케 왕국은 왕이 변경의 문지기랑도 친하게 지내나 봐?"

"친하게 지낼 수는 있지만, 삼촌이랑은 모르는 사이일 거예요."

"그럼 네가 아는 엘프야?"

"아니요, 처음 뵙는 분이에요."

"그런 것 치고는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 같던데?"

유지스의 대답에 푸로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하고 싶은 질문을 푸로르가 대신해 준 덕에 나는 말수를 아낄 수 있었다.

생판 남에게 아는 척하며 덕담을 건네다니, 보통 오지랖이 아니다. 그리고 그걸 받아넘기는 유지스도 보통 친화력이 아니다.

"그야 세계수의 기운을 함께 나눠 받은 이웃인걸요."

유지스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언제부터 이웃의 범위가 한 나라를 광범위하게 아우르게 된 것인지는 몰라도, 엘프들 사이에서는 이게 자연스러운 일인가 보다.

딱히 이상한 광경은 아니다.

난생처음 보는 택시 기사님과 서로의 근황을 물어가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건, 내가 살던 세상에서도 흔한 일이니까.

하지만 이 세상에서는 흔치 않은 일인지, 푸로르가 '와···.' 하고 맥없는 탄성을 흘렸다.

"도시에 도착했으니까, 일단 침대부터 사자."

휴마누스가 아무런 맥락 없이 대뜸 쇼핑을 제안했다. 그의 두 눈은 개인 침대를 향한 열망으로 불타올랐다.

지금은 휴마누스 혼자서 침대 하나를 독차지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냥 나중에 사면 안 되나···?"

현재 에드나의 침대를 함께 쓰고 있는 아니마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녀를 제외한 성검 일행 전원이 새 침대를 원하고 있었으므로,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 그 의견은 묵살되었다.

'그나저나 외국에 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이 가구점 방문이라니,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민 준비라도 하는 줄 알겠네.'

우리는 곳곳에 걸린 표지판을 따라 상점가로 향했다. 외국과 접경한 지역이라 상업이 활발한 덕분인지 표지판이 정말 많았다.

몇몇 엘프들이 나무 사이를 오가는 모습으로 보아, 철저하게 외지인을 위한 표식인 게 틀림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길 찾기가 쉬운 건 아니었다.

아르케 왕국은 전역이 숲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말은 도시든 작은 마을이든 다 똑같은 숲이라는 얘기다.

숲 속에 세워진 도시가 아니라. 그냥 진짜로 숲 그 자체다.

엘프들은 필요에 의해 나무를 가공하는 일이 있어도, 편의를 위해 나무를 베어내지는 않는다.

자연스레 발길이 오가며 다져진 흔적이 곧 길이 되었고, 건물들은 아름드리나무와 어우러져 동화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래 봤자 이 아름다움에 감탄할 수 있는 건, 길을 잃기 전까지겠지.'

굽이굽이 난 오솔길을 따라 우거진 나무들 사이를 걷다 보면, 여기가 저기 같고 방금 지나온 길이 눈앞에 또 있는 것 같고.

어디가 어딘지 하나도 모르겠다.

'세르펜스를 명예 엘프로 내세워, 아르케 왕국 이민을 꿈꾸던 시절도 있었는데···.'

생각만 하고 실행에 옮기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다. 이런 곳에 살면 방향 감각이 멀쩡한 사람도 길치가 되어 버릴 게 분명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표지판을 확인하는 것조차 포기했다. 봐도 모르겠으니까.

다행히도 우리 일행 중에는 현지인이 한 명 있었다.

유지스의 길 안내 덕분에 우리는 지도와 나침반을 들고 씨름하는 일 없이, 무사히 가구점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어서오···, 허억! 내가 이 도시에서 본 적 없는 아름다움이 아직 남아있었을 리는 없을 텐데? 외지에서 온 손님인가?! 오호, 귀를 보니 그쪽은 인간이구먼! 그럼 그렇지! 이곳에 살았다면 내가 몰랐을 리가 없어!"

생뚱맞게 드워프가 우리를 맞이했다.

'대체 왜?'라는 문장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드워프는 아연하여 굳어있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유지스와 세르펜스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봤다.

옆에 서 있던 세르펜스가 게걸음 치며 내 등 뒤로 숨었다.

"모습을 숨기고 싶은 거면 윈스톤 경이나 내 뒤에 숨는 게 낫지 않을까?"

휴마누스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 말이다.

세르펜스, 얘는 숨고 싶어지면 꼭 내 뒤에 숨더라.

제 덩치도 생각하지 않고 작은 상자에 몸을 구겨 넣고 보는 고양이도 아니고.

'어라? 얘 고양이 맞잖아?'

나는 세르펜스의 행동을 이해해 주기로 했다.

종족의 타고난 본능이면 어쩔 수 없지.

"침대 사러 왔어요. 급하니까 당장 살 수 있는 거로 보여주세요."

"오! 눌러살려고 온 건가? 그래, 그래. 아르케 왕국은 좋은 곳이지. 나는 아름다움 연수를 위해 잠깐 방문한 거였는데, 이렇게 가게까지 내고 눌러 앉아버렸지 뭔가?"

침대를 사러 왔다는 내 말을 멋대로 오해한 드워프가 신나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이쪽도 종족의 타고난 본능 탓이겠지만, 별로 이해해 주고 싶지 않다. 노력해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아름다움 연수는 또 뭔데?'

의문이 떠오르긴 했으나, 그다지 알고 싶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평생 모르고 살고 싶다.

아르케 왕국이면 세르펜스의 얼굴이 튀지 않을 것 같아서 굳이 가리지 않았는데.

드워프가 있는 줄 알았으면 후드를 씌워 놓을 걸 그랬다.

후회스러웠으나 이미 쏟아진 물이다.

다시 주워 담는 건 불가능하니, 이용할 수밖에.

"이 천사처럼 아름다운 사람이 오늘 밤 맨바닥에서 자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어서 침대를 보여주시죠!"

"허업! 아, 알겠네!! 이쪽으로 오게나!"

협박이 제대로 먹혔다. 드워프가 기겁하며 우리를 안쪽 창고로 안내했다.

침대가 필요한 건 성검 일행이었지만, 빨리 침대를 살 수만 있다면 그딴 진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괜히 사실대로 말했다가, 드워프가 자신은 맞춤 제작만 하니 이곳에 머물며 기다려 달라고 하면 큰일이다.

휴마눈새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눈치 없이 입을 놀리는 대신 상황을 관망했다.

"내가 맞춤 제작 전문인 데다가 창고 크기가 작아서, 견본으로 만들어 둔 침대가 네 개밖에 없는데 괜찮겠나?"

창고에 들어선 드워프가 뒤늦게 아차 싶은 표정으로 말했다.

침대가 필요한 사람이 네 명이니 네 개면 갯수가 딱 맞는다. 마침 잘 됐다 싶었으나 좋아하며 본색을 드러내기는 아직 이르다.

나는 아쉽다는 티를 팍팍 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이고, 어쩔 수 없네···. 그럼 그거라도 주세요. 가격은 얼마죠?"

"이제 곧 이웃이 될 사이인데, 어떻게 돈을 받고 물건을 팔 수 있겠나?"

이웃이고 나발이고 물건을 팔 때 돈을 받는 건 상식이자 생존 수단이다.

나는 가까운 사이일수록 계산은 정확히 해야 한다는 말과 함께, 강제로 드워프에게 돈을 쥐여 줬다.

"그래서 살 집은 구했나? 하긴, 구했으니 침대를 산 거겠지? 침대를 새로 만드는 대로 배달해 줄 테니, 주소를 알려 주게나."

"저희는 신성 루멘 제국의 수도에서 삽니다. 애초에 필요한 침대도 네 개뿐이었으니, 배달 서비스도 필요 없습니다."

"으잉···? 그게 무슨···."

이제야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드워프의 얼굴이 점차 사색으로 변해갔다.

나는 성검 일행을 돌아봤다. 가장 먼저 내 의중을 알아챈 건 푸로르였다.

푸로르가 아니마에게서 아공간 주머니를 거의 빼앗듯 받아다가 잽싸게 침대를 챙겼다.

그리고 우리는 허망해하는 드워프를 그곳에 남겨두고 다음 도시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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