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5회
73. 공작님과 아르케 왕국 (7)
세르펜스는 미동조차 하지 않고 내 쓰다듬을 받았다.
침대에 가만히 누워 보드라운 털 뭉치 비슷한 것을 쓰다듬고 있노라니, 노곤노곤 몸이 늘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 전 복도에서, 나는 빨리 세르펜스를 방에 데리고 들어가기 위해 힘들다는 말을 핑계처럼 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건 아니다.
그동안 우리는 먹고 자는 것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이동에 힘썼다.
평소라면 말을 탈 때만이라도 세르펜스에게 기대어 편하게 갔을 텐데. 세르펜스를 비롯한 신성력 트리오는 비행 연습을 하느라 날아서 이동했다.
세르펜스표 편안한 등받이와 자율 주행 모드는 물론이거니와, 안전하게 몸을 잡아주는 세르벨트조차 없이.
직접 말을 몰아 움직이는 건 그냥 걷는 것 이상으로 고역이었다.
그리하여 길이 험해서 걸어가야 할 땐 발바닥과 종아리가.
말을 탈 땐 허리와 엉덩이, 허벅지가 고통을 호소했다.
'하반신만 골고루 조져지는 집중 훈련 코스인가?'
하루 일정이 끝나면 세르펜스가 신성력으로 치료해 주긴 했지만, 그래도 힘든 건 힘든 거다.
덧붙여 아니마와 에드나는 중간부터 마법으로 몸을 띄운 채, 푸로르에게 줄을 맡기고 풍선처럼 둥둥 떠다니듯 매달려 왔다.
그 모습이 부러워서 에드나에게 부탁해 볼까 했지만, 윈스톤에 의해 기각되었다.
'두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활용하는 것뿐이라나 뭐라나?'
한마디로 마법을 못 쓰면 신체라도 단련하라는 뜻이었다.
언제나 내 편을 들어줄 것 같았던 세르펜스조차, 검술의 기본은 하반신에 있다며 윈스톤의 손을 들어주었다.
'세니어를 휘둘러 볼 기회조차 준 적 없으면서!'
매우 억울했다.
하반신을 단련해서 나쁠 건 없다는 말에는 나도 동의한다.
만에 하나 혼자서 도망치거나 적의 공격을 피해야 할 상황이 왔을 때, 믿을 수 있는 건 두 다리뿐일 테니까.
'세르펜스가 나를 싸고도는 이상, 그런 일은 없을 것 같긴 한데···.'
그 세르펜스가 나를 과보호하느라 단련시키겠다고 나서니 어쩔 도리가 없더라.
피곤함을 자각하니 눈꺼풀이 빠르게 무거워졌다.
모처럼의 휴식 시간이니 이대로 잠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딱히 할 것도 없고.
그렇게 사고가 정지되고, 나는 까무룩 잠에 빠져들었다.
"···우, 선우. 일어나라."
희미하게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와 몸을 흔드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 목소리와 손의 주인은 확인해 볼 것도 없이 세르펜스였다.
나는 '흐아함─!' 하고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사방으로 팔다리를 쭉쭉 뻗으며 한껏 기지개를 켰다.
그러고 나서 세르펜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 의도를 파악한 세르펜스가 내 손을 잡아당겨, 나를 일으켜 앉혔다.
"잘 잤는가?"
"넵! 오랜만에 낮잠을 자니까 좋네요."
"많이 피곤했었나 보군."
나는 개운해진 기분으로 경쾌하게 대답했건만. 돌아온 건 세르펜스의 씁쓸한 표정이었다.
이번에는 또 뭐가 문제일까?
곰곰이 고민하다 보니, 불현듯 하나의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혹시 제가 갑자기 잠들어서 놀란 건 아니시죠?"
"혹시 내가 선우를 너무 무리하게 몰아붙인 건가?"
나와 세르펜스가 동시에 서로에게 질문했다.
녀석의 질문을 통해 나는 원하던 답을 얻었다. 그리고 세르펜스는 '선우가 갑자기 잠들어서 놀랐다.'라고 이실직고한 셈이 되었다.
"그냥 여행의 피로가 쌓여 피곤한 와중에 누웠더니, 잠이 쏟아져 그대로 잠든 것뿐인데요?"
"으음···. 그렇게나 피곤해할 줄은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에드나 씨의 도움을 받도록 가만둘 것을···."
세르펜스가 후회막심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운동을 시켜 놓고, 운동하느라 힘들어하게 뒀다고 미안해하다니.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인가 싶다.
원래 운동을 하고 나면 몸이 힘든 게 당연하다는 걸 알려줘야 하나?
"됐어요. 덕분에 체력도 키우고 좋죠, 뭐."
"···설마 삐졌나?"
"진짜로 삐져 볼까요?"
"그러지 마라."
내가 가볍게 던진 농담에 세르펜스가 식겁하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가련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녀석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노라니, 토라진 적도 없는 기분을 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정말로 내가 삐진 게 아니라는 걸 세르펜스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이런 고급 기술을 남발하다니! 만약 내성이 생겨서 결정적일 때 안 먹히면 어쩌려고?'
아주 잠시, 걱정이 되긴 했으나 이는 내가 걱정해야 할 문제가 아니었다.
내게 내성이 생겨서 곤란해지는 건 어디까지나 세르펜스였으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일부러 그 점을 지적하지 않고 넘어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깨우신 겁니까?"
화제를 바꾼 것을 용서의 의미로 받아들인 것인지, 세르펜스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속으로 가련한 표정을 지은 게 효과가 있었다고 여기며 만족해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아주 어리석은 판단이다.
"···선우? 왜 갑자기 그런 표정을 짓는 거지?"
"네? 제 표정이 왜요?"
"으음···.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무척이나 악당 같았다."
세르펜스가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로 넌지시 말했다.
대체 내가 무슨 표정을 지었길래 저러는지 모르겠다.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세르펜스가 잠깐 고민하는 듯하더니 돌연 비릿한. 그러나 치명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후후후···. 그래, 지금 마음껏 좋아하도록 해라. 언젠가 너의 그 오만이 네 숨통을 조르게 될지니."
"에, 으, 예에?!"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자신이 언제 최종 흑막 같은 표정을 지었냐는 듯. 세르펜스가 평상시 모습으로 말을 이었다.
음산하게 깔았던 목소리도 본래대로 청아하게 돌아와 있었다.
내가 방금 뭘 보고 들은 건지 모르겠다. 타락펜스가 왔다 간 것 같은데, 착각인가?
"선우?"
세르펜스가 내 이름을 부르며, 눈앞에 대고 손을 흔들어댔다.
그 덕분에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을 수 있었지만, 내가 그런 수상쩍은 표정을 지었다는 충격에서 벗어나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보다 어서 일어나서 씻고 와라. 이제 곧 저녁 식사 시간이니, 슬슬 준비하라고 하더군."
"아, 예."
나는 얼떨떨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세르펜스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에 있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욕실이었다.
찬물을 얼굴에 끼얹고 나서야 충격이 좀 가셨다.
'살아있는 나무로 만든 건물에 별것이 다 있네. 도대체 어떻게 만든 거람?'
거울도 있었는데, 이건 그냥 걸면 되는 거라서 별로 신기하지 않았다.
나는 거울을 보며 방금 세르펜스가 지었던 표정을 따라 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거울 너머의 얼굴은 비릿하고 치명적인 미소가 아닌, 비열하고 치졸해 보이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어딜 어떻게 봐도 최종 흑막보다는 끄나풀에 불과한 삼류 악당에 한없이 가까웠다.
주인공에게 '두고 보자!'라는 말을 남기고 도망쳤다가, 윗선의 꼬리 자르기에 당해 뒷골목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될 것 같다.
이러한 결과가 나온 건 세르펜스의 표현력이 남다르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냥 얼굴이 달라서일까?
모르겠다. 고민하지 말고 빨리 씻기나 하자.
나는 서둘러 세안을 마치고 머리도 대충 빗은 뒤 방으로 돌아왔다.
세르펜스는 눈을 감은 채 바른 자세로 의자에 앉아있다가, 천천히 눈을 뜨며 나를 쳐다보았다.
"뭐 하고 있었어요?"
"공중전을 대비하여, 어떤 식으로 움직여야 효율적일지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있었다."
쉽게 말해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내가 씻고 나오는 이 짧은 시간도 짬짬이 활용하는 거로 보아, 내가 잠들어 있던 긴 시간을 녀석이 내버려 뒀을 리가 없다.
그런 녀석이 기특하기도 하고, 나도 좀 더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소한 짐이 되어서는 안 되니까···.'
앞으로는 윈스톤의 운동 프로그램에 더욱 적극적으로 임하고, 말을 탈 때 세르펜스를 등받이로 이용하는 건 자제해야겠다.
"씻는 동안 시간이 지체된 것 같은데, 바로 안 나가도 돼요?"
"식사 준비가 끝나면 유지스가 부르러 오기로 했다."
세르펜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여유롭게 대답했다.
어쩐지 서두르라는 말 하나 없이, 최종 흑막을 연기하며 장난을 치더라니.
내가 그러했듯이. 긴 여정에 지친 일행이 잠을 자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갑자기 밥 먹으러 나오라고 하면 곤란해할 테니 시간 여유를 두고 알려 준 모양이다.
진짜 별거 아닌 사소한 부분이지만, 그것을 신경 써 준다는 것 자체에서 손님을 배려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조금 그렇지만···. 괜찮겠는가?"
느닷없이 세르펜스가 내 안부를 물어왔다.
그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나는 이유를 설명해 달라는 눈으로 녀석을 멀뚱멀뚱 쳐다봤다.
"식사 자리에는 높은 확률로 유지스의 가족들도 함께할 거다. 만약 선우가 불편하다면···."
"피곤해서 잔다는 핑계를 대고, 세르펜스가 제 식사를 따로 받아오겠다고요?"
듣다 보니 대충 감이 잡혀, 나는 녀석의 말을 잘라내고 이어질 말을 대신 꺼냈다.
세르펜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선우가 원한다면.' 하고 대답했다.
"참 나. 그런 말을 할 거면 제가 씻기 전에 했어야죠."
"실수는 인정한다. 그래서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조금 그렇다고 서두에 언급했잖은가."
"그 '이제 와서'가 '씻고 나서'를 뜻하는 줄은 몰랐죠."
나는 그렇게 툴툴거리며 세르펜스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침대에 앉으면 자연스레 눕게 될 것 같아서다. 그랬다간 기껏 빗은 머리를 다시 빗어야 한다.
그리고 잠들거나 귀찮아질까 봐 걱정하는 게 아니라 이런 생각부터 떠오른다는 건···.
"갈래요."
"선우라면 그렇게 대답할 것 같았다."
"저를 얼마나 밥친놈으로 보는 겁니까?"
"밥친···?"
처음 듣는 단어에 세르펜스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의아해했다.
나는 밥친놈이 '밥에 미친놈'을 뜻하는 단어임을 설명했고, 세르펜스는 이해했다고 대답했다.
"그런 이유가 아니다. 아니···. 그런 이유가 아예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어쨌든 선우라면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부딪혀 보려고 할 것 같다는 생각으로 한 말이었다."
"제가 그렇게 용감해 보였어요? 외면하거나 덮어두려 한 적도 꽤 많은 것 같은데···."
모범이 될 어른으로서 세르펜스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게 어쩐지 쑥스러워, 나는 괜스레 볼을 긁적거리며 머쓱하게 말했다.
"그래도 결과적으로 보자면 그렇잖은가. 선우는 일단 문제를 인식하고 나면, 그것이 아무리 외면하고 싶은 것이라 할지라도 마주하려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봐줘서 고마워요."
"고마워할 것 없다. 나는 그저 보이는 대로 말했을 뿐이니까. 오히려 나야말로 선우가 그러한 사람이라는 것에 고마워해야겠지."
세르펜스가 다소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눈썹은 미안함을 담아 살짝 찡그려졌고, 그 바로 아래에 있는 두 눈동자에는 존경과 감사가 담겼으며. 입술은 다정하게 호선을 그렸다.
겉보기에 드러난 표정만 해도 저러하니, 그 속내는 얼마나 더 복잡할까.
녀석은 아무 말 없이 그 표정 그대로 나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찾아온 적막이 왠지 모르게 어색했다.
"아 참. 아까 제가 지었던 표정이 이 표정 맞아요?"
화제를 바꾸고자, 나는 아까 욕실에서 연습 아닌 연습했던 비열하고 치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 세르펜스가 정확하게 재현해 냈다며 감탄했다. 어처구니가 없다.
"이 표정이랑 세르펜스가 지었던 그 표정이 어떻게 같을 수가 있습니까?!"
나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손거울을 꺼내어 세르펜스에게 들이밀었다. 그리고 '비릿하고 치명적인 최종 흑막의 미소'를 짓게 시켰다.
자신의 표정을 확인한 세르펜스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녀석의 눈에도 내 표정과 자신의 표정이 딴판으로 보였나 보다.
그렇게 거울을 가지고 세르펜스와 장난치며 놀고 있는데, 문 쪽에서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식사 준비가 끝났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