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8회
73. 공작님과 아르케 왕국 (10)
'대책은 마련하지 못했지만,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걸어 뒀으니···.'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정확히는 세르펜스가 다 한 거지만.
어쨌거나 더 이상 엘프 왕과 나눌 대화는 없다.
우리는 세계수의 조언을 받게 된다면 귀띔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언을 못 받으면 뭐···.'
엘프 왕이 '우리 엘프들의 힘으로 이겨낼 수 있다고 믿어 주시는 거구나!' 하고 알아서 좋게좋게 해석하지 않을까 한다.
응접실을 나온 뒤.
유지스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고 우리는 복도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어지간한 네비게이션 뺨치는 세르게이션이 있었다. 유지스도 세르게이션의 성능을 믿기에 먼저 방으로 간 걸 테다.
실제로도 세르게이션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고, 헤매는 일 없이 무사히 목적지까지 안내했다.
'그보다 외부인이 멋대로 왕성을 활보하게 내버려 둬도 되는 건가···?'
우리를 믿어주는 건 고맙긴 한데, 너무 무방비한 것 같아 걱정스러워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아, 맞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순간. 휴마누스가 돌연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입을 열었다.
막 문고리를 잡아 돌리던 세르펜스가 동작을 멈추고 휴마누스를 바라봤다.
"이제 방에 들어가면 뭐 할 거야?"
휴마누스가 질문을 던지자 세르펜스의 시선이 내게로 옮겨왔다.
나는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어 시간을 확인했다. 바로 자기에는 어중간한 시간이다.
아까 낮잠을 잔 탓에 정신도 맑아서, 침대에 눕더라도 잠이 올 것 같지가 않다.
"일단은···. 앞으로의 일정을 정해야 하려나···?"
성검펜스의 단기 속성 과외를 듣느라 우리가 국경지대에서 뭉그적대는 동안에도, 악숭 세력은 아르케 왕국을 건드리지 않았다.
이는 분명 우리가 아르케 왕국으로 향하는 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함정까지 파서 우리를 몰아넣고 악마를 둘이나 소환했는데도 패배했으니.
놈들도 바보가 아니라면, 우리가 아르케 왕국을 떠날 때까지는 얌전히 기다릴 수밖에 없다.
세계수의 상태를 확인한 후. 제국으로 돌아가는 척, 아르케 왕국에 남아 악숭 세력이 수작을 걸어올 때까지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엘프들에게 닼숭이 문제를 완전히 맡기고 진짜로 돌아갈 것인가···.
"당장 내일 아침에 떠나야 하는 것도 아닌데, 그 정도는 내일 정해도 되는 거 아니야?"
"그거야, 그렇죠···?"
"다른 일은 없어?"
"글···쎄요···? 세르펜스랑 잡담이라도 하다가 잘까?"
왠지 모를 당황스러움에 혼잣말인지 질문인지 모를 대답이 튀어나왔다.
세르펜스가 기뻐하는 낯으로 그것도 좋겠다며 찬동했다.
"할 거 없으면 잠깐 나 좀 볼래?"
휴마누스가 내 대답과 세르펜스의 찬동을 없는 것으로 치부하며 말했다.
말 그대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봐 달라는 건 아닐 테니. 조용한 곳에 가서 대화하자는 뜻으로 한 말일 테다.
"좋아요. 세르펜스도 괜찮죠?"
"세르펜스는 빼고."
세르펜스가 내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뒤에 따라붙은 휴마누스의 말을 듣고 엉겁결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니요.'를 행동으로 표현한다면 딱 저런 느낌인가 싶다.
"제가 들으면 안 되는 얘기입니까?"
세르펜스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하지만 기대와 희망이 담긴 눈망울을 반짝이며 휴마누스를 바라보았다.
어서 그렇지 않다고 말하라는 뜻이다.
그 간절하다 못해 절절한 모습에 휴마누스가 난감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건 아닌데···. 나중에 시온한테 전해 들으면 안 될까?"
휴마누스가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내놓지 않자 타겟을 바꾼 것일까?
세르펜스가 이번에는 나를 바라보며 외롭고 쓸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야 막 말문 트인 어린아이를 집에 혼자 두고, 바깥나들이를 다니는 나쁜 보호자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다.
'그러지 말고 세르펜스도 같이 들으면 안 되냐고 물어볼까? 아, 아니야···. 진짜 녀석이 들으면 안 되는 얘기를 하려는 걸지도 모르잖아.'
휴마누스와는 이미 한차례 그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세르펜스가 성검과 접촉한 뒤. 성검을 제어하기 수월해졌다는 얘기였는데, 우리는 그 사실을 세르펜스에게 알리지 않기로 약속했었다.
'성검펜스가 왔다 간 뒤로, 성검에 무슨 변화라도 생긴 건가?'
역시 휴마누스와 따로 얘기해 보는 게 좋겠다.
차분히 생각을 이어나가다 보니, 머릿속에서 세르펜스의 불쌍한 표정이 지워졌다.
그러자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해졌다.
아무튼 아이를 혼자 두지만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
"세르펜스. 제가 휴마누스랑 얘기하는 동안, 옆방에서 윈스톤 형아랑 같이 놀고 있을래요?"
이 정도면 완벽한 해결책을 찾아냈다고 생각했는데, 세르펜스가 받아들이기에는 그렇지 않았나 보다.
매일 급식을 같이 먹던 친구에게서, 오늘은 다른 친구랑 먹기로 약속했다는 통보라도 들은 듯한 표정이다.
"그렇게 쳐다봐도 안 되는 건 안 됩니다."
나는 척하니 팔짱을 끼며 단호하게 말했다.
이 이상 고집을 부려 봐야 내게 혼나기만 할 뿐이라는 걸 깨달았는지, 세르펜스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고개를 떨궜다.
그러고는 터벅터벅 힘없이 발걸음을 옮겨 윈스톤 형아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 탁···.
방문이 조심스럽게 닫히며 희미한 여음을 남겼다.
사춘기라면 방문을 쾅쾅 닫으며 불만을 표출했을 텐데. 아직 그런 시기는 아닌가 보다.
나는 팔짱을 풀고 휴마누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도 들어가죠."
"어, 어어─. 그래···."
휴마누스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세르펜스가 들어간 방문을 힐끔거리는 그를 내버려 둔 채, 먼저 방 안으로 들어갔다.
뒤이어 휴마누스가 들어오며 방문을 닫았다.
그리고 진지한 얼굴로 내게 질문했다.
"혹시···. 세르펜스는 사석에서 윈스톤 경을 '형아'라고 부르는 거야?"
윈스톤이 들었다면 기함할 소리다.
"휴마누스는 대체 뭐가 문제입니까? 이걸 과연 눈치가 없는 수준이라고 불러도 되는 걸까요?"
"어, 뭐야, 진짜로?! 그런 거였어?"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기함은 내가 먼저 하게 생겼다.
나는 아득하게 멀어져가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고, 아까 거울 놀이를 하던 의자에 앉았다.
휴마누스가 멋쩍은 표정으로 '아니지? 그래, 아닌 줄 알았어.' 하고 중얼거리며, 내 맞은편에 앉았다.
알기는 개뿔.
그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말해 뭐하냐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다.
"그래서 할 얘기가 뭡니까?"
"없는데?"
"······."
조금 전 휴마누스가 던진 '세르펜스는 사석에서···' 어쩌고 하는 질문이 너무 기가 막힌 나머지, 귀가 막혀서 말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나는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라앉힌 후, 휴마누스에게 다시 한번 말해달라 부탁했다.
그래도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다.
"그럼 왜 저만 따로 보자고 불러내신 겁니까?"
"전에 에드나가 한 말이 떠올라서."
"개인 시간 얘기요···?"
"응."
휴마누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다.
나는 이제 뭐 할 거냐는 휴마누스의 질문에 내가 했던 대답을 떠올려 보았다.
세르펜스와 일정을 논하거나, 세르펜스와 놀거나.
결국 또 애 보기였다.
"어···, 완전히 까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그동안 이동하느라 바빠서 개인 시간을 가지고 어쩌고 그럴 여유가 없었잖아요?"
"응, 그런 것 같아 보여서, 여유가 생긴 지금 얘기하는 거야. 앞으로 개인 시간이 생기면 뭘 할지, 느긋하게 생각해 보라고."
"······."
사람 할 말 없게 만드는 대답이었다.
아니, 그냥 내가 말문이 막혀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것뿐이었다.
나는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휴마누스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는 휴마누스가 성검에 관한 얘기를 하려고 저를 불러낸 줄 알았습니다."
"성검이 왜?"
"세르펜스가 한동안 성검을 지니고 다녔잖아요. 게다가 악마와 싸우느라, 신성력도 마구 불어넣었고. 그래서 뭔가 변화가 생긴 줄···."
"아···."
휴마누스가 작은 탄성을 흘렸다.
완전히 까먹고 있었거나, 생각지도 못했거나. 그 둘 중 하나에 해당하는 것이 분명한 반응이다.
갈 곳을 잃은 휴마누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크흠 하고 크게 헛기침했다.
"너도 변명을 했으니, 나도 변명을 하나 해도 될까?"
"하세요."
"신성력 날개를 만들고 비행 연습을 하느라, 성검의 상태를 확인한다는 걸 깜박했어. 성검은 일반적인 검이랑 다르게, 손질을 안 해줘도 괜찮거든."
휴마누스가 침착하게 성검의 주인으로서. 그리고 한 명의 검사로서 글러 먹은 소리를 해댔다.
그리고 우리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지, 지금 바로 확인할게."
"네, 그래 주세요."
내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휴마누스가 성검을 뽑아 들고 신성력을 불어 넣었다.
그리고 허공에 대충 몇 번 휘둘러본 뒤 다시 검집에 꽂았다.
나는 그 일련의 과정을 끝까지 지켜본 후 질문했다.
"좀 나아졌어요?"
"아니, 똑같아."
"그렇다는 건 지금 그 상태가 기본인가 봅니다. 알아서 잘 적응해 보세요."
"응, 그래야겠네."
그 대화를 끝으로 또다시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먼저 그 어색함을 견디지 못하고 입을 연 건 이번에도 휴마누스였다.
물론 그가 나를 따로 불러낸 목적이 목적인 만큼, 수다나 떨자는 제의는 아니었다.
"그럼 나는 내 할 일 할 테니까, 너도 네 할 일 해."
그렇게 말하며 휴마누스는 품속에서 작은 수첩과 펜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다음으로 그가 취한 행동은 수첩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자리에서 일어나는 거였다.
뭐 하는 건가 싶어, 나는 휴마누스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휴마누스는 의자를 살짝 틀어서 등받이 부분을 옆으로 오게 한 뒤 다시 앉았다.
그리고 신성력으로 황금빛 날개를 만들어낸 뒤에야 수첩을 펼치고 펜을 들었다.
"이제 날개를 만드는 건 졸업한 거 아니었어요?"
"날기만 한다고 끝나는 게 아니니까. 적을 관찰하며 다음 움직임을 예측하여 검을 휘두르고, 날개를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계속 생각해야 해. 그 와중에 이걸 유지하는 데에 정신력을 소모할 수는 없잖아. 전투에 방해가 되지 않으려면, 숨 쉬듯 자연스럽게 날개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하는데, 내가 아직 그 수준까진 아니라서."
휴마누스가 하하 웃으며 펜 뚜껑을 열었다.
[성검의 주인]을 읽으면서도 항상 느꼈던 거지만, 그가 굉장한 노력파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와닿았다.
"그런데 그 수첩은 뭡니까?"
"일지 쓰려고."
"그렇게 작은 곳에 써도 돼요? 몇 자 못 적을 것 같은데?"
"우리 일행이 가진 아공간 주머니는 하나뿐이라서 말이야. 매번 맡기고 받아오기 귀찮아서, 가지고 다니기 편하게 여기다 쓰고 있어. 두꺼운 책 한 권으로 엮어내나, 작은 수첩 여러 개에 나눠서 써내나. 어쨌든 제출만 하면 되는 거잖아?"
휴마누스가 넉살 좋게 하하 웃으며 말했다.
정해진 규격이 없으니 그 말에 틀린 점은 없었다.
하지만 작은 수첩에 나눠 쓴 일지를 순서대로 찾아가며 읽어야 할, 후대 성검의 주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
"그런데 그 아공간 주머니 말이야, 원래 우리 일행이 얻었어야 하는 물건이었더라?"
"···봤구나?"
"봤지. 그때 꾼 꿈에서."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아공간 주머니의 편리함에 익숙해진 나는 절대 이것을 얻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휴마누스가 꿈을 통해 [성검의 주인] 시기의 기억을 엿보았을 때. 이런 부작용이 생기리라 예상해야 했는데···.
"원래 히든 피스를 독점하는 건 미래를 아는 자의 특권입니다. 클리셰를 뛰어넘은 일종의 공식이라고요! 미래의 정보를 알면서 히든 피스를 챙기지 않는다? 이건 고구마 예약 수준이 아니라 하차 각입니다!"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는데, 내가 눈치가 없어서 못 알아듣는 게 아니라는 건 알겠어."
휴마누스가 정색하며 말했다.
그동안 내가 눈치 없다고 구박한 것이 응어리져 가슴에 한이 되어 맺혔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