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611화 (611/925)

611회

73. 공작님과 아르케 왕국 (13)

* * *

세르펜스가 방에 들어온 건, 휴마누스가 나가고 1, 2분가량 흐른 뒤였다.

나는 녀석을 반기며 입을 열었다.

"윈스톤 형아가 잘 놀아줬어요?"

큰 기대를 하고 던진 질문은 아니었다. 사실은 질문조차 아닌. 가벼운 농담에 지나지 않는 말이었다.

그러나 세르펜스는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마치 난생처음 놀이동산에 다녀온 아이처럼.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세차게 고개를 끄덕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나도 심심해지면 윈스톤 형아한테 가서 놀아 달라고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세르펜스는 신이 나 보였다.

대체 윈스톤이 얼마나 재밌게 놀아줬길래 애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그 비법이 몹시 궁금하다.

"선우는 휴마누스와 무슨 대화를 나눈 건가?"

금방이라도 윈스톤과 뭐 하고 놀았는지, 재잘거리며 떠들 것 같은 표정이었건만.

세르펜스는 나와 휴마누스가 나눈 대화에 먼저 관심을 보였다.

"그냥 저번에 에드나가 언급한 '개인 시간' 얘기가 떠올라서 불러낸 거였대요. 그래서 별 얘기 안 하고, 그냥 각자 할 거 하며 보냈습니다."

"아···. 미안하다, 내가 챙겼어야 했는데···."

세르펜스가 아차 싶은 표정으로 탄식을 흘리며 시무룩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녀석 또한 나처럼 깜박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괜찮습니다. 저도 잊고 있었는걸요, 뭘."

"으음···. 나중에 휴마누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야겠군."

세르펜스가 분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녀석의 목소리에서 패배감이 흠뻑 묻어났다.

말의 내용만 아니면, 원수를 갚기 위해 슥삭 해야겠다고 다짐하는 줄 알겠다.

그렇게나 분한데도 감사의 마음을 잊지 않는 그 태도가 몹시 장하다.

나는 녀석을 향해 팔을 뻗으며, 가까이 오라는 뜻으로 손을 까딱였다.

세르펜스가 종종걸음으로 도도도 다가와서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칭찬받을 행동을 했다는 걸 알고, 머리를 들이미는 녀석의 모습에 살짝 웃음이 났다.

"근데 세르펜스는 윈스톤이랑 뭐 하고 놀았어요? 들어올 때 보니까 굉장히 들떠 보이던데."

내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질문하자, 세르펜스가 쑥스럽다는 듯 얼굴을 살짝 붉히면서 우쭐한 표정을 지었다.

어려운 쪽지 시험에서 혼자 만점을 받아, 선생님의 칭찬과 함께 반 아이들의 박수 세례까지 받고 온 듯한 얼굴이다.

윈스톤이 엄청 우쭈쭈해 주었나 보다.

'남들 앞에서는 그렇게 체면 차리더니! 뒤에서는 더하네, 더해!'

나는 혀를 내두르며, 세르펜스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윈스톤이 세르펜스를 둥개둥개 어르는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아니, 그러려고 노력했으나 내 상상력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머릿속은 희뿌연 안개로 가득 찼을 뿐. 선명한 이미지를 그려낼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내 한계를 인정하며 세르펜스에게 답을 재촉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래요?"

"윈스톤 경이 내게 충성을 맹세했다."

"충성의 맹세라면···. 윈스톤이 공작저에 처음 왔던 날 했던 그거요?"

내 물음에 세르펜스가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기사 서임식을 재현하며, '주군과 기사 놀이'라도 했나 보다.

시온의 기억에 따르면, 리벨론가의 삼 형제도 어렸을 때 자주 했던 놀이다.

항상 카론이 주군 역할을 독차지해서 시온이 울고, 그런 시온을 제온이 달랬던 모양이다.

'남의 추억을 엿보는 느낌이라, 기분이 좀 묘하네···.'

아무튼 '주군과 기사 놀이'는 이 세계에 널리 퍼진 소꿉놀이의 일종이다.

진짜 기사인 윈스톤이 기사 역할을 맡으며 놀아줬으니, 엄청나게 실감 났겠지.

"그런 게 아니다."

세르펜스가 밑도 끝도 없이 부정의 말을 꺼냈다.

바로 직전에 내 말이 맞는다며 고개를 끄덕거릴 땐 언제고. 다시 생각해 보니 아닌 것 같았나?

"선우가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는 듯한 표정을 짓길래 한 말이다."

"아닌데요?"

"아닌가?"

"아닙니다."

"으음···."

세르펜스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는 '이상하군, 분명 그런 것 같았는데···.'하고 중얼거렸다.

"그건 그렇고 이제 슬슬 잘 시간이니까, 가서 씻고 오세요."

"자세한 내용은 안 물어보는 건가···?"

세르펜스가 실망했다는 목소리로 말하며, 자세히 물어봐 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내게 자랑하고 싶을 정도로 윈스톤이 재밌게 놀아줬나 보다.

나는 잘 준비부터 끝낸 후 얘기하자고 녀석을 달래어 욕실로 보냈다.

'그나저나 윈스톤이 이렇게나 애 보는 재능이 뛰어날 줄이야···.'

마음 한편이 든든해졌다.

앞으로 세르펜스를 떼어 놓아야 할 일이 생기면 윈스톤에게 맡겨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잠시 내려뒀던 펜을 들었다.

기억이 거의 없는 어렸을 적 얘기야, 부모님께 들었던 내용을 토대로 적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초등학생이 된 이후부터는 학교에서 보낸 시간이 길어졌고, 친구들과 노는 시간 또한 많아졌으니.

대부분 내 기억에 의존해야 했다.

그러한 탓에 펜을 들긴 했으나, 무언가를 써 내려가는 시간보다 기억을 끄집어내려 낑낑거리는 시간이 더 길었다.

'그나마 선명하게 떠오르는 건, 방학 때 가족들과 놀러 다닌 것과 수학여행 정도인데···.'

원래 하이라이트는 가장 나중에 써 줘야 임팩트 있는 법이다.

나는 우선 그 시절 추억의 놀이나 군것질거리, 장난감 등을 두서없이 써 내려갔다.

- 달칵.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에, 나는 쓰던 것을 멈추고 테이블에 반쯤 파묻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막 씻고 나온 촉촉펜스가 보였다.

"뭘 쓰고 있는 거지?"

"제 일대기···? 개인 시간에 할만한 게 떠오르지 않으면, 저 자신에게 집중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휴마누스가 조언해 줬거든요. 마침 세르펜스가 저번에 제 과거 얘기를 궁금해했던 게 떠올라서, 겸사겸사 제 성장 과정을 적어 놓고 있었습니다."

"선우를 위한 개인 시간까지 나를 위해 소모하지 마라. 나중에 공작저에 돌아가면 업무 중 이력서 및 자기소개서를 쓸 시간을 따로 빼 줄 테니···."

"아뇨, 이건 정말 저를 위한 겁니다."

나는 세르펜스의 말을 자르고, 목소리에 힘을 주어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쓴 글을 녀석에게 보여주는 건 어디까지나 '겸사겸사'에 불과하다.

처음에는 과거를 돌아보며 내가 어떤 사람인지 고찰할 수 있으니 나는 나대로 좋고. 세르펜스는 호기심을 채울 수 있으니 녀석은 녀석대로 좋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거양득의 효과를 노렸다.

그러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동안 깨달았다.

이 기록이 얼마나 나에게 유의미한, 꼭 필요한 것인지.

"저는 이곳에서의 삶을 제대로 끝맺을 겁니다. 마왕을 격퇴하고 악숭이들을 처단한 뒤. 평화로운 대륙에서 다 함께 행복하게, 미련 따위 남지 않도록. 그렇게 오래오래 살다가 고향으로 돌아갈 겁니다."

내가 너무 정색하고 말한 탓인지. 아니면 이 말속에 담긴 의미를 파악했기 때문인지.

세르펜스가 표정을 굳히며 고개를 떨궜다.

대충 이해한 것 같으니 이대로 말을 끝낼까 하다가, 그러면 서로 찝찝할 것 같아서 제대로 대화를 마무리 짓기로 했다.

"제가 시온의 기억을 꺼내 볼 수 있는 것처럼. 본래의 몸에 돌아가면,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를지도 모르죠. 그래도 그때 느꼈던 감정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기록하는 거로군. 과거의 기억과 당시의 감정을 잊지 않기 위해···."

"그보다는 추억하기 위해서라고 칩시다."

"······."

세르펜스가 숙연한 얼굴로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리고 머뭇머뭇 눈동자를 굴려댔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세요."

"그런 걸···, 내가 읽어도 되는 건가?"

녀석이 조심스럽게 꺼낸 말은, 그 조심스러운 모습만큼이나 소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나는 내가 쓴 종이를 테이블 위에 고스란히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래 추억은 함께 나눌 사람이 있을 때, 더욱 빛나는 법입니다. 읽고 나서, 제가 '그땐 그랬지.' 하고 말하면 '아, 맞다. 그랬댔지?' 하고 아는 척 좀 해 줘요."

세르펜스의 옆을 스쳐 지나가며. 나는 녀석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두드려 주었다.

그렇게 말한 효과가 있었는지, 욕실에서 씻고 나오자 내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 있는 세르펜스를 목격할 수 있었다.

녀석은 내가 쓴 글을 열심히 베껴 쓰고 있었다.

효과가 조금 과했나 보다.

"거의 다 써간다. 조금만 기다려라."

"아, 예···. 다 끝나면, 제가 쓴 건 제 아공간 주머니에 넣어주세요."

나는 세르펜스에게 내 아공간 주머니를 맡긴 뒤.

베개 위에 보송보송한 새 수건을 깔고, 막 감고 나와 젖은 머리를 뉘었다.

필사를 끝낸 세르펜스가 테이블 위를 정리하고 마법등을 껐다. 그러고는 자신의 아공간 주머니에서 짧고 가느다란 양초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저 양초는 타이머 기능이 있는 취침 무드등의 아날로그 버전 같은 거다.

각자 침대에 누워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다 잠이 밀려왔을 때, 귀찮게 일어나서 불을 끄러 가는 수고를 덜 수 있다.

짧은 시간만 타오르다 저절로 꺼질 테니까.

반대로 우리가 대화에 열을 올리느라 밤을 지새우는 것도 방지할 수 있다.

"윈스톤 경에게 내 어릴 적 얘기를 했다."

나처럼 베개에 수건을 대고 누운 세르펜스가 대뜸 말을 꺼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튕기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부러 일어나려고 일어난 게 아니라, 놀라서 튀어나온 반사적인 행동이다.

"주군과 기사 놀이를 하다 온 게 아니었습니까?!"

"이미 나와 윈스톤 경은 주군과 기사 관계인데, 그런 놀이를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세르펜스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실낱같은 기대를 품고, 윈스톤이 둥개둥개하며 세르펜스와 놀아준 게 아니었냐고 확인하듯 물었다.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실망스럽다 못해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선우가 잘했다고 칭찬할 줄 알았는데···."

세르펜스가 침대에 일어나 앉아, 무릎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나는 제정신을 찾았다.

세르펜스가 즐거워하는 놀이를 기대하고 실망하느라, 세르펜스의 용기 있는 결단을 간과하다니.

이래서야 주객이 뒤바뀐 꼴이다.

"죄송합니다, 저는 진짜 윈스톤이 재밌는 놀이를 알고 있는 줄 알고···. 아니, 따지고 보면 잘 놀아줬냐는 말에 고개를 끄덕거린 세르펜스 탓도 있잖아요?!"

"사이 좋게 잘 지내다 왔느냐는 뜻으로 한 말인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말을 한 사람이 선우잖은가?"

아무래도 세르펜스의 선우어 해석기가 에러를 일으킨 모양이다.

일부러 오해를 유발하려고 한 것도 아닌 것 같으니 그냥 넘어가는 게 좋겠다.

나는 녀석의 과거를 들은 윈스톤의 반응을 물었고, 세르펜스는 대답했다.

"윈스톤 경은 자신이 복수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한 게 나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내게 현명하다며···. 내 지략을 통해 구원받았다 말하였다."

그렇게 말하며 세르펜스가 스스럽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니, 어째서 세르펜스가 그토록 들떠 있었는지 알 것 같다.

녀석은 자신이 세운 계획을 싫어한다.

어쩌면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혐오한다거나 꺼림칙하게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계획을 떠올린 자신 또한, 그렇게 여겼겠지.

'그래서 윈스톤을 구해낼 당시, 나를 앞세워 그 계획을 전달한 거고.'

그렇게 구해진 자에게 음험한 계략이 아닌 현명한 지략이었다는 말과 함께, 그 덕분에 구원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으니.

세르펜스 또한 그 말에 구원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때 세르펜스가 어떤 기분이었을지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린아이가 제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여. 숨도 쉬지 않고 오늘 하루 겪었던 즐거운 일을 재잘재잘 떠들어대느라,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것처럼.

녀석도 그렇게 들끓는 환희를 어떻게 가라앉혀야 할지 몰라, 두 뺨을 발그스름하게 물들이며 두 눈을 반짝였다.

그와 동시에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듯 연약하고도 어설프게, 환히 웃었다.

"그러고 나서, 윈스톤 경이 다시금 충성을 맹세해 주었다. 거짓으로 연기한 내가 아니라, 진짜 나에게."

세르펜스는 단점이라 여기며 싫어하던 부분이 갑자기 긍정적으로 느껴져, 무척이나 당혹스러워하면서도 고양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녀석이 다시 한번 윈스톤의 맹세를 받아주었다는 건, 구태여 물어 확인할 것도 없다.

"그래서 충성 맹세를 받아들인 후, 그다음은요?"

"휴마누스가 방에 들이닥쳤다. 그래서 윈스톤 경에게 고맙다는 말만 전하고 나왔다."

"이런 휴마눈새가···!"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데,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정전이 된다면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 싶다.

나도 이제는 더 이상 휴마누스를 눈치 없는 새끼라 욕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휴마누스가 도통 협조해 주지 않는 걸 어쩌겠는가.

아직 촛불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지만, 휴마누스 때문에 흥이 다 깨져 버렸다.

잠이나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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