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2회
74. 공작님과 세계수 (1)
바로 다음 날, 세계수 방문 신청이 허가되었다.
정확히 몇 시쯤 오라는 말은 없었기에, 우리는 점심을 먹고 난 뒤 오후에 찾아가겠다는 뜻을 알렸다.
그렇게 붕 뜬 오전 시간 동안 유지스는 형제들을 보러 가겠다며 성을 나섰다.
그리고.
"세르펜스는 어디 가려고요?"
나는 후드가 달린 케이프를 걸치는 세르펜스를 향해 물었다.
일정이 있으면 미리 말해줄 것이지.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방에 돌아와, 혼자서 주섬주섬 외출 준비를 하는 모습이 의문스러운 한편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음···. 어쩌면 악마 숭배자들이 염탐을 위해 이 주변에 와 있을지도 모르잖는가. 그래서 잠시 순찰을 다녀올 생각이다."
세르펜스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침음을 흘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태연한 표정으로 돌변하더니 자연스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거짓말이라는 걸 티 내는 방식이 무척이나 독특하다.
"설마 유지스가 걱정되어서 몰래 뒤를 쫓으려는 겁니까? 예전에 제가 보좌관 모임에 참석했을 때처럼?"
"그런 거 아니다."
녀석은 부정했지만, 나는 그 말을 순순히 믿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프라시더스 공작저가 아니니까. 심지어 제국조차 아니다.
'뭐, 유지스네 집이니까 집주인은 신뢰가 가긴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왕성이라는 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보안이 허술해 보였다.
경비원은 보이지도 않고, 가끔 복도를 지나가는 엘프들은 무기 대신 각종 서류를 품에 안고 있었다.
'그런데 유지스도 밖에 나가 없는 상황에서 세르펜스가 나를 두고 외출을 한다?'
정말 악숭이 때문이라면, 녀석은 교묘한 말로 성검 일행의 옆구리를 찔러 그들을 내보냈어야 한다.
자신이 직접 나가는 게 아니라.
"유지스를 걱정하는 그 마음은 이해합니다. 그래도 사생활 침해와 스토킹은 안 돼요. 그런 집착에 가까운 비뚤어진 관심은 서로를 피폐하게 만들 뿐입니다. 저는 세르펜스가 건강한 인간 관계를 구축했으면 좋겠어요."
"정말 아니다."
세르펜스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말을 믿어달라고 말했다.
여전히 미심쩍기는 했으나, 어떻게 자신을 못 믿을 수 있냐며 배신감에 사무쳐 하는 녀석의 얼굴을 마주한 이상.
더는 의심할 수가 없다.
"알겠습니다. 일단은 넘어가 드리죠."
"···왜 믿어주지 않는 거지?"
"세르펜스가 저를 낯선 곳에 혼자 두고 나갈 리가 없으니까요."
"어째서 내가 선우를 혼자 둘 거라고 생각한 거지?"
"그야 저한테는 나갈 준비 하라는 얘기를 안 했으니까?"
그런 대화가 오고 간 뒤, 나는 휴마누스와 윈스톤이 있는 옆방으로 옮겨졌다.
"아···. 원래 내 호위 담당은 유지스가 아니라 윈스톤이었지? 더구나 윈스톤에 대한 세르펜스의 신뢰도가 대폭 상승한 것 같으니까, 이렇게 되는 게 당연하지. 응, 그래···. 내가 윈스톤에게 세르펜스를 맡길 수 있었으니, 그 반대도 가능할 텐데. 그 당연한 걸 어째서 나는 몰랐던 걸까?"
나는 간과한 점들을 늘어놓으며 자기반성을 했다.
게다가 이 방에는 윈스톤뿐 아니라 성검의 주인인 휴마누스도 있었으며, 다른 일행의 방도 가까웠다.
이 정도라면 녀석도 안심하고 순찰을 다녀올 만했다.
세르펜스가 돌아오면 의심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해야겠다.
"쟤 왜 저러는 거야?"
"선우 선배잖습니까. 깊게 생각하지 않는 걸 추천드립니다."
등 뒤에서 휴마누스와 윈스톤의 목소리가 들렸다.
퍽 친근감이 묻어나는 휴마누스의 말투와는 판이하게, 대답하는 윈스톤의 목소리는 무심하기 이를 데 없다.
세르펜스에게 일방적으로 친한 척 하던 휴마누스가 제 버릇 개 못 주고, 윈스톤에게 비슷한 짓을 하고 있는 거다.
하지만 그딴 건 아무래도 좋다.
"당사자를 앞에 두고 대체 무슨 대화를 주고받는 겁니까?!"
"들어오자마자 방문을 짚고 선 채, 혼잣말을 중얼거리니까 그렇지."
휴마누스가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황금빛 날개를 펄럭이며 대답했다.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러니 휴마누스가 나를 이상하다는 듯 말한 건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저는 세르펜스가 윈스톤을 신뢰한다며 칭찬해 줬는데, 어떻게 윈스톤은 저에 관해 그런 식으로 말할 수가 있죠?"
"정말 몰라서 묻는 거요?"
윈스톤이 매우 진지하게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모른다고 대답했을 때 돌아올 설명이 두려워, 자세히 파고들지 않기로 했다.
나는 조용히 입 다물고 테이블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윈스톤이 운동시키기 전에, 어제 쓰던 거나 마저 써야지···.'
* * *
세르펜스는 점심 식사가 시작되기 전에 돌아왔다.
유지스는 밖에서 점심을 먹고 성문 앞에서 만나기로 했기에, 우리는 유지스 없이 유지스의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어색할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주된 화제는 당연히 유지스에 관한 것이었다.
점심 식사가 진행되는 내내, 우리는 유지스의 근황과 그녀의 어릴 적 이야기를 교환하듯 주고받았다.
그렇게 식사를 끝마치고 밖으로 나가니, 때마침 유지스가 나무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유지스도 우리를 발견하고는 손을 크게 흔들며 뛰어왔다.
"형제분들은 잘 만나고 오셨습니까?"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지자, 세르펜스가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유지스에게 말을 건넸다.
자신은 유지스의 뒤를 밟지 않았다는 걸 다시 한번 내게 어필하기 위함일 테다.
녀석이 돌아오고 나서 분명히 사과했거늘. 아직 앙금이 남았나 보다.
하지만 유지스가 그러한 사정을 알고 있을 리 만무했으니. 세르펜스가 자신의 형제들에 관심을 두는 것에 마냥 기뻐했다.
세계수를 향해 걸음을 옮기며, 유지스는 오랜만에 만난 형제들과 조카 얘기를 꺼냈다.
귀가 번쩍 뜨이는 소리다.
"오오! 유지스의 조카라니, 엄청 귀여울 것 같습니다! 아니, 보나마나 분명 귀엽겠죠!"
"네에, 남자아이인데 정말 귀여워요!"
"몇 살이에요?"
"187살이요! 마지막으로 봤을 때만 해도 저와 키가 엇비슷했는데, 그새 더 큰 거 있죠?"
한껏 부풀었던 기대가 꺼지고, 남은 것은 실망이었다.
키가 자랐다는 걸 보면 그녀의 조카가 아직 성장기인 건 확실하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조카의 이미지와 상당히 동떨어져 있다는 것 또한 확실했다.
'유지스는 대체 몇 살이지?'
나는 유지스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20대 초반이라고 하면 20대 초반 같고, 후반이라고 하면 후반으로 보이는 얼굴이다.
한마디로 종잡을 수 없다는 뜻이다.
애초에 겉모습만으로는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이종족이었으니.
관찰해 봤자 알아낼 수 있는 정보는 하나도 없다는 결론을 재확인했을 뿐이다.
"···쑥쑥 잘 자라네요."
먼저 관심을 보여놓고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해보니 귀댁의 조카는 하나도 귀엽지 않을 것 같습니다.'라며 말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유지스의 말에 적당히 호응해 주며 서둘러 대화를 끝마쳤다.
"으음···."
세르펜스가 침음을 흘리며 검지로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어째서인가 녀석은 심기 불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왜 그러느냐는 눈으로 쳐다보자, 세르펜스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성검 일행의 눈치를 살폈다.
"저도 백부님의 조카입니다."
녀석이 '에잇, 모르겠다!' 하는 표정으로 내게 귓속말을 했다.
나야말로 모르겠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건지.
대단한 비밀이라도 알려주는 듯한 태도로, 얘는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아, 예에···. 에일리히 님의 조카분도 참 귀엽···죠. 반짝반짝하고···."
내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놀랍도록 메마르고 건조했다.
그런 영혼 없는 답변에도 세르펜스는 만족스러워했다.
나는 녀석에게서 관심을 끄고 성검 일행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아니마가 선례를 만들어 두었기 때문일까?
푸로르와 리에나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마는 당연히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눈치였고.
다시 고개를 움직여, 이번에는 윈스톤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조금쯤은 떨떠름해 하지 않을까 했건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금 나만 어처구니없는 거야?'
나는 생각을 그만두고 다리를 움직이는 것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기로 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니, 유난히도 키가 큰 나무들이 울타리처럼 빽빽하게 자라난 장소에 도착했다.
많은 이들의 발길이 닿아 하나의 선을 이룬 오솔길과, 키 큰 나무들이 만들어낸 면이 맞닿는 곳에.
한 엘프가 서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성검의 주인이시여. 동료분들도 다시 만나 반갑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분들은···. 처음 뵙겠습니다."
엘프가 기묘하게 일렁거리는 은빛 눈동자로 우리를 쭉 둘러보며 인사를 건넸다.
그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나는 눈앞의 이 엘프가 하이 엘프. 즉, 엘프족의 사도(使徒) 중 한 명이라는 걸 곧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그도 그러할 게, '일렁거리는' 은빛 눈동자는 비유가 아닌 실제였으니까.
인간이든, 엘프든, 드워프든, 아직 본 적 없는 메로우든. 눈동자가 불꽃처럼 일렁거리는 일은 없다.
저건 오직 사도들의 특성이다.
엘프는 은색, 드워프는 금색, 메로우는 백색.
신성력의 색상과 정확하게 일치했고, 실제로도 그들의 눈동자는 지닌 신성력을 그대로 드러내는 창(窓)이었다.
"그럼 안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무어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하이 엘프는 몸을 돌려 앞장서 걸었다.
잠깐만 한눈을 팔면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들 때문에 그 모습을 놓칠 것 같다. 그 때문에 우리는 서둘러 하이 엘프의 뒤를 쫓아야만 했다.
"발밑을 조심하십시오."
내가 넘어지기라도 할까 봐 걱정되었는지, 세르펜스가 작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의 말대로 오솔길조차 없는 숲속을 걷는 건 상당한 주의를 요하는 일이었다.
여기저기 걸림돌투성이에, 지면 위로 살짝 모습을 드러낸 나무뿌리가 올가미처럼 발목을 붙잡기 일쑤였다.
눈은 두 개였으나, 하이 엘프의 모습을 쫓는 것과 발밑을 살피는 것을 동시에 하는 건 불가능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세르펜스의 뒤에서 녀석의 외투에 달린 후드를 손잡이처럼 붙잡고, 발밑에 온 신경을 집중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니 세르펜스의 등이 가까워졌고, 나는 녀석의 등을 이마로 들이박았다.
달리 말하자면, 세르펜스가 갑자기 멈춰 서는 바람에 땅만 보고 걷던 내가 그대로 부딪혔다고도 표현할 수 있겠다.
이 모든 건 우리를 안내하던 하이 엘프가 돌연 걸음을 멈춘 탓이다.
"그런데 여러분께서는 어쩐 일로 세계수 님을 만나 뵙고자 청하신 것입니까?"
하이 엘프가 일렁이는 눈동자로 우리를 훑으며 입을 열었다.
마주쳤을 땐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이런 곳까지 우리를 끌고 온 뒤에야 물어보다니.
이유 여하에 따라, 여차하면 우리를 이곳에 버리고 가려고 이러는 건 아닐 테다.
왜냐하면 악숭이와 싸울 주요 전력인 성검의 주인을 숲의 미아로 만들어서는 안 되니까.
'알려져서는 안 될 무언가가 있고, 우리가 그것을 알고 찾아왔는지 확인하는 것뿐이겠지.'
세계수에 문제가 생겼다는 추측이 기정사실로 굳어진 순간이다.
나는 이마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진지하게 표정을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