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4회
74. 공작님과 세계수 (3)
"그럼 여러분을 세계수 님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원래도 정중했던 하이 엘프가 한층 더 정중해진 태도로 말했다.
그 목소리가 살짝 들떠 있는 건 우리가 세계수를 치유해 줄 거라는 기대감 때문일 테다.
그건 그렇고 '그럼'이라니.
'설마 우리가 세계수를 치유하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면, 안내 자체를 안 해 줄 생각이었던 건가?'
나는 하이 엘프의 뒤통수를 잠시 노려보다가, 아까처럼 고개를 내려 발치를 살피며 걸었다.
그렇게 세르펜스의 외투에 달린 후드를 잡고 얼마나 걸었을까.
이번에는 녀석의 등에 이마를 박지 않고 무사히 걸음을 멈추는 데 성공했다.
바닥에 자라난 풀잎들이 메마르다 못해 썩어서 거무튀튀한 갈색빛을 띠었기에.
굳이 앞을 보지 않아도 멈춰야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려 정면을 바라보았다.
곧바로 한 그루의 나무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둘레가 몇 아름이나 될지 가늠하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매우 거대한 나무다.
하나 그 굵디굵은 둘레가 무색하게도 튼튼해 보인다는 말은 안 나왔다.
'바로 직전에 세계수가 오늘내일한다는 얘기를 듣고 왔던 터라, 멀쩡한 모습은 아닐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보니 예상했던 바를 훨씬 웃돌았다.
썩어 문드러져 거무죽죽한 몸체는 툭 건드리면 파스스 바스러질 것 같았고, 힘없이 늘어진 가지에는 잎사귀 하나 붙어있지 않았다.
황폐하다는 단어조차 현재 눈앞에 보이는 광경을 묘사하기에는 부족했다. 한겨울의 나무도 지금의 세계수보다는 생기가 넘치리라.
'세계의 나무'라는 이름보다는 '마계의 나무' 따위의 이름이 붙어야 할 정도로, 음산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아, 안돼! 세계수 님의 마지막 잎새가···!"
하이 엘프가 비명을 지르며 세계수를 향해 뛰어갔다.
그러고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땅을 더듬거리다가 메마른 나뭇잎 하나를 주워들더니,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궜다.
마지막 잎새가 어쩌고저쩌고 하더니.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잎사귀가 하나밖에 남지 않았었나 보다.
'그리고 우리를 안내하느라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그게 떨어진 거고.'
소중한 이의 마지막 임종을 지키지 못한 이처럼.
죽어가는 나무 앞에 주저앉아, 검게 변한 낙엽을 조심스레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흐느껴 우는 하이 엘프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묵념했다.
"이게, 무슨···. 내가 저번에 왔을 땐···, 이런 모습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휴마누스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그 간단한 말을 제대로 끝맺지 못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나 보다.
유지스도 경악한 표정을 지으며, 손으로 입가를 가려 비명을 삼켰다.
[성검의 주인]에서 세 번째 시련 당시, 세계수까지 당도한 건 휴마누스 뿐이다.
나머지 성검 일행은 우리가 하이 엘프와 만났던 장소에서 그를 기다렸다.
그렇기에 멀쩡한 세계수의 모습을 알고 있는 건 휴마누스와 엘프인 유지스뿐이었다.
그 때문일까?
나머지 일행들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지만, 휴마누스와 유지스는 유독 크게 놀란 듯 보였다.
"흐윽, 세계수 님께서는···. 성검의 주인께서 방문하시기 전까지는 용사의 무구를 품고 계셨기에, 흐흑···. 그 힘으로 겉모습을 위장하셨을 뿐입니다. 그 전에도···, 흐으윽! 내부는, 이미···!"
하이 엘프가 흐느껴 우는 와중에도 친절한 설명을 잊지 않았다.
실신하지 않고 설명할 정신이 있는 거로 보아, 세계수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건 아닌 모양이다.
아리따운 엘프가 신비로운 은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눈물을 퐁퐁 쏟아내고 있었으니.
그 모습을 마주한 상태로 냉정하게 머리를 굴릴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으리라.
그리고 그 흔치 않은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나다.
이게 다 세르펜스 덕택이자, 녀석 때문이다. 신비롭고 아리따운 얼굴을 한 누군가가 우는 모습은 몹시 질리도록 봤다.
나는 동요하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침착하게 생각했다.
'마지막 잎사귀가 떨어졌을 뿐. 아직 버틸 여력은 남아 있나 보네.'
정말로 세계수가 죽음을 목전에 둔 상태였다면, 휴마누스가 제대로 성검의 힘을 발휘할 수 있든 없든 진작에 그를 불러들였을 테니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말이다.
운 나쁘게 연락할 때를 놓쳤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우리가 세계수를 찾아왔으니. 중간에 멈춰 서서 이러쿵저러쿵 떠들 시간에, 우리를 한시바삐 세계수로 인도했으리라.
"이, 일단 치료해 보겠습니다."
침착을 되찾은 나와는 달리, 휴마누스가 당혹을 숨기지 못하고 허둥지둥 세계수로 다가갔다.
집중력을 끌어올리기 위함일까?
휴마누스는 눈을 감으며, 검집에서 성검을 뽑아 들고 길게 심호흡을 했다.
성검으로부터 오색 찬란한 광휘가 서서히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볼타 산맥에서 한 차례 보았던 빛이다.
휴마누스의 황금빛 신성력이 오색 빛 광휘에 섞여 들어갔다.
나는 볼타 산맥에서 휴마누스가 혼자 저 힘을 제어하려 애쓰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불규칙적으로 흔들렸던 그 기운이, 지금은 놀랍도록 안정되어 있었다.
'휴마누스가 성장해서? 아니면 성검이 고쳐져서?'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휴마누스가 성검의 힘을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는 건 좋은 소식이다.
다만 한 가지 걱정되는 건 '출력'이다.
볼타 산맥 때는 성인 남성의 덩치보다도 크게 부풀어 오르며 덩치를 키웠던 빛이, 지금은 그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아마도 저게 휴마누스가 제어할 수 있는 최대치겠지···.'
그래도 제어할 수 있다는 게 어디랴 싶다.
세계수가 아무리 커 봤자 고작 한 그루의 나무였으니. 산맥 하나를 통째로 감싸는 것보다 적은 양의 힘으로도 충분할지 누가 아는가?
'어쩌면 세르펜스가 나서지 않고도 문제가 해결될지도 몰라.'
나는 손아귀를 빠져나가려는 기대심을 억지로 붙들듯.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휴마누스를 응원했다.
성검에서 피어오른 찬란한 빛이 세계수에게로 흘러갔을 땐, 나도 모르게 '오오!' 하는 탄성이 튀어나왔다.
"조금만 더! 힘내라, 힘! 휴마누스는 할 수 있습니다! 아자아자, 화이···."
열심히 응원하는 내 입을 세르펜스가 틀어막았다.
그러고는 귓속말로, 휴마누스의 집중력을 흐트러트리지 말라며 혼을 냈다. 일리 있는 말이다.
나는 알았다는 뜻으로 엄지와 검지를 붙여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그제야 녀석이 내 입을 막았던 손을 거두어들였다.
'괜찮은 척 먼저 나서긴 했지만, 역시 성검에 접촉하는 게 꺼려졌었구나···.'
정말로 괜찮다고 여긴 거라면 그거야말로 문제다.
다행히도 녀석은 자신이 겪어야 할 고통을 등한시한 게 아니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유지스를. 그리고 그녀의 고향을 위해 나서겠다는 거였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그게 그거였지만.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나는 안도를 느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녀석의 용기가 대견했다.
성검과 접촉한 녀석이 후유증을 겪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사람으로서, 그게 세르펜스에게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알고 있으니까.
그렇기에 또 다른 측면으로는 녀석이 안쓰러웠다.
아무리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뒤따르는 법이라지만, 녀석이 짊어진 책임은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 너무 벅찬 것이었다.
그 책임을 덜어내고 또 덜어내어도, 또다시 짊어져야 할 책임이 생겨났다.
내가 녀석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그저 위로뿐이라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나는 착잡한 생각을 머릿속 한구석에 몰아넣었다.
그리고 눈앞의 상황에 집중했다.
성검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세계수에 스며들고 있었다. 엷은 빛이 세계수의 줄기로, 가지로, 뿌리로 퍼져나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앙상한 가지에 뾱 하고 새순이 돋아났다.
"아아─, 세계수 님···!"
하이 엘프가 감격하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로 인해 손에 쥐고 있던 세계수의 마지막 잎새(였던 것)가 바사삭 소리를 내며 바스러졌다.
'저거 소중한 것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른 그 순간.
세계수에 감돌던 빛이 사그라들었다.
파릇파릇한 새순이 하나 돋아나긴 했지만, 세계수는 여전히 을씨년스러운 모습이었다.
심지어 방금 돋아난 새순조차 급속도로 푸른색을 잃고 노랗게 바래고 말았다.
"이 정도로는 안 되겠지···?"
휴마누스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어색한 표정으로 나와 세르펜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의 양으로 봤을 때. 상체에 걸친 갑옷 안쪽도 땀에 푹 젖어 있겠지.
휴마누스는 최선을 다했고, 과거보다 발전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세계수의 수명을 조금 연장한 정도에 그치고 말았다.
만약 그에게 조금만 더 성장할 시간이 주어진다면···.
'혼자서 세계수를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현재로서는 역부족이었다.
"으음···."
세르펜스가 작게 침음을 흘렸다. 그리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 과감한 걸음걸이에 나도 모르게 흠칫 놀라고 말았다. 다행히도 녀석은 휴마누스를 지나쳐 세계수 앞에 섰다.
그러고는 그 거대한 몸체에 손을 얹고 직접 신성력을 흘려 넣었다.
성검의 힘을 빌리고도 금방 말라버릴 싹 하나를 틔우는 데에 그쳤다.
제아무리 세르펜스라 할지라도, 본신의 힘만으로 세계수를 치료하는 건 불가능하리라.
세르펜스도 자신의 행동이 부질없는 짓이라는 걸 알았는지, 10초도 채 안 되어 손을 떼어냈다.
녀석이 공연히 힘을 낭비할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굳이 시도해 본 것은.
'작은 희망에 기대를 걸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내게 알리기 위함일까?'
휴마누스가 걱정과 미안함을 담아 세르펜스를 쳐다보았다.
세르펜스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 휴마누스와 나란히 서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마주한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하이 엘프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혹시 기절한 사람을 둘 정도 눕혀 놓을 장소가 있습니까? 기왕이면 건물처럼 사방이 막힌 곳이었으면 좋겠는데···."
세르펜스가 성검 일행 앞에서 '백부님의 조카' 발언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들.
악몽에서 막 깨어나 착란 상태에 빠져, 살의를 드러내거나 울고불고 하는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으리라.
휴마누스가 악에 받친 모습으로 '세피'를 부르짖으며, 세르펜스에게 달려드는 것 또한 일행들에게 보여서 좋을 건 없다.
이번 꿈에 나오는 게 1회차의 기억이라면 변명의 여지가 있겠지만···.
'잠깐만. 1회차의 기억이 꿈에 반영된다면, 휴마누스는 무슨 꿈을 꾸게 되는 거지? 휴마누스는 1회차에서 성검에 접촉하지 않았을 거 아니야?'
백날 고민해 봤자 답이 나올 리 만무했다.
난 그 의문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이 근처에 저희 사도들의 마을이 있어요. 그곳에 있는 제 집이라면···. 그런데 대체 무슨 방법이기에 기절하는 사람이 두 명이나 생기는 건가요? 혹시 생명력을 끌어다 쓴다거나 하는 건 아니겠죠? 그런 방법이라면 세계수 님께서 슬퍼하실 거예요."
하이 엘프가 확인 사살이라도 하듯, 바스러진 나뭇잎 조각을 쥔 손을 꼬옥 말아쥐며 말했다.
생명력을 끌어다 쓰는 건 우리가 아니라 세계수 쪽이라는 걸 지적해 줘야 하나?
잠시 갈등이 일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부작용이 없는 것은 아니나, 금방 회복되니 심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세르펜스가 대외펜스 미소를 지으며 하이 엘프를 향해 안심하란 듯이 말했다.
나는 녀석의 그런 연기가 보기 싫어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리고 남몰래 이죽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정신적 상처는 육체적 상처보다 오래가는데···. 금방 회복되긴 개뿔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