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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회개해주세요!-615화 (615/925)

615회

74. 공작님과 세계수 (4)

그렇게 속으로 꿍얼거리고 있는데, 세르펜스가 나지막하게 나를 불렀다.

"시온. 이번에도 저번처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녀석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와락 표정을 찡그렸다. 저번처럼, 그 뒤에 생략된 말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다.

오늘 처음 본 하이 엘프의 앞이라 직접적인 표현을 피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해 못 할 내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직접적인 표현을 피하고 있었기에 곧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렇다. 이 자식은 또 자신을 묶어 달라 말하고 있었다.

"지난번에는 쓸모없었잖아요."

"그래도 이번에는 모르잖습니까. 만에 하나 지지난번 같은 사태가 벌어지면 어쩌시려고···. 당신은 언제나 만약을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가 지난번을 운운하며 말하자, 세르펜스는 지지난번 일을 끌어와서 대답했다.

안 그래도 약해 빠진 내가 안전 불감증까지 걸린 듯하여 걱정되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그런 녀석의 옆에 선 휴마누스가 멀뚱멀뚱 눈을 끔벅거렸다.

우리의 대화 주제가 무엇인지 눈치채지 못한 거다.

"세르펜스는 그래도 괜찮은 겁니까? 아무래도 그건 좀···, 그렇잖아요. 거부감 같은 거 안 들어요?"

이어진 설명을 듣고 나서야 눈치챈 것인지, 휴마누스가 '아···, 그거···.' 하고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휴마누스를 무시하고 세르펜스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원래대로라면 지난번에 물어봤어야 했던 말이다. 하지만 그때는 세르펜스가 제 할 말만 하고 기절해 버리는 바람에 물어볼 기회 자체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대화할 시간이 충분했다.

세르펜스는 어린 시절, 지하실의 작은 의자에 묶인 채 모진 고문을 당한 과거가 있다.

그러니 묶이는 것에 익숙할지도 모르지만, 그만큼 거부감도 심할 테다.

아니, 그런 과거가 없는 사람도 밧줄을 들이밀면 누구나 거부감을 보인다.

그러니까 녀석을 묶기 전에 이 부분은 꼭 짚고 넘어가야 한다.

나는 상황이 이러하니 어쩔 수 없다는 대답이 아니라, 본심을 제대로 말해 달라는 뜻을 담아 녀석을 노려보았다.

"으음···."

세르펜스가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침음을 흘리며, 그걸 꼭 물어봐야겠냐는 눈빛을 보내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세르펜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녀석의 입술이 열리는 찰나의 순간. 정체를 알 수 없는 불길함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잠···!"

"당신이 저를 해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또한 제게 그런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씀하시며, 직접 확인시켜 주셨잖습니까. 그렇기에 당신이라면 괜찮습니다."

애석하게도.

내가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외치는 것보다, 세르펜스가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 더 빨랐다.

일순 녀석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린가 싶었다.

그렇지만 오늘도 세르펜스어 해석기는 훌륭히 제 역할을 다했고, 그 덕택에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작년 말, 지하실에서 내가 녀석의 손목에 구속구를 채웠을 때 얘기구나!'

그때의 경험이 힘이 되어 결박당하는 것에 더 이상 공포를 느끼지 않게 되었다니. 그 누구도 자신을 구속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니.

나를 향한 신뢰가 한층 더 두터워졌다니.

정말로 다행이다. 참 다행이긴 한데···.

'이 분위기는 어쩔 거야?'

세르펜스의 말은 정황을 아예 모른다면 이해 자체가 불가능했고, 반만 알면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어쩌면 내가 세르펜스를 꽁꽁 묶으며, '괜찮아, 괜찮아. 하나도 안 무서워.' 같은 말을 해대는 모습을 떠올린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리둥절해 하는 하이 엘프를 제외한 모두가 충격의 바다에 풍덩 다이빙 했다.

입을 떡하니 벌리거나,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돌린다거나, '세상에···.' 하고 탄식하는 건 약과였다.

"나한테 세르펜스에게 이상한 걸 가르치니 어쩌니 하더니···. 자기가 더 하잖아?"

휴마누스가 나를 벌레 보듯 쳐다보며 경멸의 말을 쏟아냈다.

마음 같아서는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라고 말하는 듯한.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세르펜스의 멱살을 잡고 탈탈 털어대며, 어서 해명하라고 다그치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방금 그 발언을 해명하려면 녀석의 과거를 설명해야만 한다.

아무리 내 명예가 중요하다고 한들, 그럴 수는 없다.

"제가 세르펜스에게 그런 말을 하긴 했지만, 여러분이 상상하는 그런 상황은 절대 없었습니다! 자세한 건 개인적인 일이라 설명해 드릴 수는 없지만···. 휴마누스의 세례명을 걸고 맹세컨대, 진짜로! 그런 거 아닙니다!!"

"엑? 왜 내 세례명을 거는 거야?!"

"저는 세례명이 없으니까요!"

나를 벌레 보듯 쳐다보던 휴마누스가 이제는 벌레 씹은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애써 외면하며, 나는 일행을 둘러보았다. 휴마누스의 세례명을 걸기 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충격적인 결과다.

'휴마누스의 세례명이 가진 무게가 고작 이 정도에 불과했다니···.'

나는 안쓰럽다는 눈으로 휴마누스를 바라보았다.

휴마누스가 진저리를 쳤다.

"저···, 여러분? 지금 대체 무슨 대화를 하시는지···."

하이 엘프가 얼빠진 표정으로 말했다. 표정만큼이나 얼이 빠져나간 듯, 맥없는 목소리다.

그제서야 나는 지금이 이럴 때가 아니라는 걸 떠올렸다.

"알겠습니다. 세르펜스가 원하는 대로 해 드릴 테니, 안심하고 기절하세요."

더 이상 아웅다웅하며 말다툼해 봤자, 오해만 커질 뿐이다.

내가 백기를 들어 올리자 세르펜스의 얼굴에 안도가 떠올랐다.

허구한 날 자신을 이기적이라 말하는 주제에. 너무 이타적인 것 아닌가 하는 불만이 떠올랐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자세히 설명해 달라고 누가 캐묻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비록 내가 다소 이상한 오해를 받긴 했지만, 세르펜스가 감수한 것에 비하면 이딴 건 아무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세르펜스는 내 안위를 위해. 나를 설득하려고 그런 말을 꺼낸 거다.

우리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여 아무것도 묻지 않는 동료들이 고마우면서도, 묘하게 찝찝했다.

"그럼···. 휴마누스."

세르펜스가 휴마누스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시선을 받은 휴마누스가 멀뚱히 세르펜스를 마주 보았다.

그러다가 세르펜스의 시선이 자신의 손에 들린 성검에 다다른 후에야, '아!' 하고 탄성을 흘렸다.

"그런데 있잖아, 설마 나한테도 그럴 속셈이야?"

휴마누스가 성검을 다잡으며 나를 향해 질문했다.

자신도 기절하면 묶을 거냐는 물음이다. 나는 골이 띵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길 바라요?"

"아니."

"그럼 헛소리는 그쯤 하고, 시작하세요."

내 대답에 휴마누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성검에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이미 한 차례 진을 빼고 난 이후라서일까?

오색 찬란한 성검의 기운이 불안정하게 요동쳤다. 휴마누스의 황금빛 신성력도 이전보다 희미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세르펜스가 성검을 쥔 휴마누스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그리고 신성력을 흘려보내어 오색 빛에 자신의 색을 더했다.

그렇게 은빛이 섞여든 성검의 기운은 빠르게. 그러면서도 안정적으로 제 덩치를 키웠다.

"성검의 주인보다···, 성검의 힘을 잘 다루다니···?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을 텐데···."

하이 엘프가 제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혼잣말을 흘렸다.

본래 성검의 주인으로 선택받은 인물이 세르펜스라는 걸 고려하면,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성검의 힘은 세르펜스가 제어하는 대로 고분고분 움직여 세계수에 스며들었다. 그 거체가 영롱한 빛에 휩싸이는 건 순식간이었다.

축 늘어졌던 나뭇가지가 기지개라도 켜듯 힘차게 사방으로 뻗쳤다. 이 가지 저 가지 할 것 없이 여기저기에서 새순이 돋아나고, 또 자라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앙상하던 나뭇가지는 풍성한 나뭇잎에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성한 빛이 사그라들고 난 이후.

이곳이 마계였나 싶을 정도로,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던 세계수가 싱그러운 자태를 뽐냈다.

푸른 나뭇잎들이 흔들리며 서로 부딪혀 사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사이사이로 햇볕이 내리쬐어, 나뭇잎이 만들어낸 그 그림자마저도 아름답게 빛이 났다.

가히 세계의 나무라는 그 명칭에 걸맞은 모습이다.

변화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세계수의 뿌리를 타고 퍼져나간 힘은 주변의 땅에도 깃들었다.

내 걸음을 멈추게 했던 거무튀튀한 풀잎이 점차 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바닥에 축 퍼져있던 식물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듯 몸을 세웠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거무죽죽한 색은 보이지 않았다. 파릇파릇한 푸른 빛이 시야에 가득 찼다.

그 사이사이로 노랗고 하얗게 피어난 꽃이 생기를 더했다.

이제 11월에 돌입했으니. 제국에서는 슬슬 겨울을 준비할 때였다.

하지만 세계수의 힘이 미치는 이곳에서는 그런 계절감조차 잊게 했다.

그렇게 풍경에 정신이 팔린 것도 잠시.

"세르펜스는?!"

나는 세르펜스가 서 있던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녀석이 비틀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 주위에 가득 찬 잎사귀들만큼이나 푸르른. 청록색 그림자가 휙 하고 앞으로 뛰쳐나갔다.

유지스가 긴 생머리를 흩날리며 몸을 날린 거다.

그녀는 세르펜스가 땅에 쓰러지기 직전에 그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휴마누스는 그대로 쓰러져 버리긴 했지만···.'

맨땅바닥도 아닌 푹신한 풀밭에 쓰러졌으니 별로 걱정되지 않았다.

그 이상으로 더 걱정해야 하는 건 기절한 두 사람이 일어난 직후이고, 지금 당장 걱정해야 하는 건···.

"거기, 이름 모를 사도님?"

"네, 네?"

본모습을 되찾은 세계수를 올려다보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던 하이 엘프가 내 부름을 듣고 이쪽을 돌아봤다.

그런 하이 엘프를 향해. 나는 표정을 굳히며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다 죽어가던 세계수를 치료한 건, 휴마누스가 혼자 한 겁니다. 제 말 무슨 뜻인지 아셨죠?"

"어차피 세계수 님께서 힘을 잃었다는 건 알려져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래도 하이 엘프들은 알고 있었을 거 아닙니까?"

"그들에게도 비밀로 해야 하나요?"

"비밀은 입 밖으로 내뱉어서는 안 되기에 비밀인 겁니다."

"신의 사자께서 그러길 원하신다면···."

망설이는 기색이 없잖아 있었지만, 하이 엘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겠노라 약속했다.

"세계수 님께서 완전히 정신을 차리실 때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릴 듯하니, 우선 마을로 안내하겠습니다."

하이 엘프가 손바닥에 들러붙은 세계수의 마지막 잎새였던 가루를 털어내며 말했다.

한때는 큰 의미를 부여하며, 떨어지지 말고 조금만 더 버텨 달라고 응원했던 이파리였을 텐데.

매정하기가 이를 데 없다.

'새로운 잎이 잔뜩 돋아났으니 암울했던 과거의 잔재는 필요 없다, 뭐 그런 건가?'

우리는 매정한 하이 엘프의 뒤를 따라서 또다시 빽빽한 나무 사이를 걸었다.

세르펜스는 기절하여 유지스의 품에 안겨 있었으므로, 이번에는 바짝 정신을 차리고 걸어야만 했다.

하이 엘프의 마을은 멀지 않았다.

내가 넘어지는 것도 넘어지는 거지만, 그보다 기절한 두 사람이 깨어나기 전에 도착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참, 제가 혼자 사는지라 침대가 하나뿐인데…. 괜찮을는지요?"

매정한 하이 엘프가 침실 문을 열고 나서야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조심스레 질문했다.

침대가 하나뿐인 건 당연히 괜찮았다. 하지만 침대가 방 한가운데를 차지한 건 별로 안 괜찮았다.

"가구 배치 좀 바꿔도 괜찮죠?"

집주인의 동의하에 방 한가운데를 차지했던 침대가 구석 자리로 밀려났다.

푸로르가 짐짝처럼 어깨에 짊어지고 온 휴마누스를 그 위에 내려놓았다.

가구 재배치를 통해 새로 만들어진 빈 공간에는 세르펜스의 침대가 놓였다. 유지스가 그곳에 세르펜스를 곱게 눕혔다.

'그래 봤자, 나 혼자 녀석을 묶으려면 이리저리 굴려야 할 텐데….'

녀석을 어떻게 묶을지 고민해야 하는 현실이 너무 야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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