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6회
74. 공작님과 세계수 (5)
집주인을 포함한 모두를 방 밖으로 몰아낸 뒤, 나는 세르펜스가 고이 누워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녀석은 무표정한 얼굴로 죽은 듯이 기절해 있었다.
묶으려면 이리저리 굴려야 하니, 안경은 벗겨서 탁상 위에 올려놓았다.
'저번처럼 또 자국이 남으려나? 피부가 쓸려서 따가울 것 같던데···. 혈액 순환도 좀 걱정되고···.'
나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꺼낸 밧줄을 손에 든 채, 녀석을 내려다보며 고민에 잠겼다.
인간은 경험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존재다. 나도 지난날의 기억을 더듬어 답을 찾아냈다.
'우선 이불로 세르펜스를 감싸서 김밥펜스를 만들고, 그다음에 밧줄로 묶어 놓자!'
방법을 떠올리는 게 힘들었지 행동으로 옮기는 건 쉬웠다.
들고 있던 밧줄을 잠깐 내려놓고, 세르펜스를 침대 가장자리까지 굴렸다.
저번처럼 얼굴까지 덮어버리면 호흡 곤란을 야기할 수도 있다. 그러니 이번에 이불로 감싸는 건 목 아래부터다.
세르펜스의 팔을 몸통에 붙여 차렷 자세로 만든 후. 밑에 깔린 이불로 녀석을 꼼꼼하게 말았다.
그리고 바닥에 내려놓았던 밧줄을 다시 들어, 김밥펜스를 칭칭 감았다.
이제 매듭을 묶고 입을 막으면 결박 완료다.
"세···피···."
세르펜스의 입에 손수건을 쑤셔 넣는 와중. 갑자기 등 뒤에서 억지로 쥐어 짜낸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흠칫 놀라며 소리가 난 방향을 돌아보았다.
"아차, 그러고 보니 휴마누스를 깜박 잊고 있었네···."
저번에는 세르펜스가 일어나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깨어난 터라,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건만. 오늘은 휴마누스가 끙끙거리는 게 먼저였다.
하던 일만 끝내 놓고 휴마누스를 깨워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린 그 순간, 나는 손을 멈추고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왜냐하면.
"미, 안···. 세피···, 미안···해···."
휴마누스가 사과의 말을 중얼거리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성검의 주인]에서 휴마누스가 운 건 딱 한 번뿐이다.
신성 루멘 제국이 멸망하고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이 죽었을 때. 그리하여 그의 지난 삶이 송두리째 사라져 버렸을 때.
그 이후로도 보통 사람이라면 버티기 힘든 사건들이 연이어 그를 괴롭혔고.
성검의 주인을 지지해야 할 이들의 날 선 목소리가 그를 사정없이 난도질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휴마누스는 꿋꿋하게 버티며 일행들 앞에서 밝게 웃었다.
그랬던 그가 지금 울고 있다.
너무 충격적인 일이라, 뇌가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내가 굳어있는 동안에도 휴마누스는 꿈속을 헤매며 끊임없이 사과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그때 휴마누스가 천천히 눈을 떴다.
눈물로 흐려진 자색 눈동자가 내 쪽을. 정확히는 세르펜스의 얼굴을 향했다.
기절한 세르펜스의 모습을 확인한 휴마누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일갈했다.
"네 놈! 세피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것이냐?!"
"세피가 아니라 세르펜스요! 그리고 이건 상호 합의하에 진행되는 일입니다!!"
나는 다급히 소리쳤고, 눈 깜짝할 새에 다가온 휴마누스의 주먹이 허공에 멈춰 섰다.
그대로 내질렀어도 세니어의 결계가 막아줬을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갑작스러운 위협에 심장이 벌렁벌렁 뛰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어···, 미안. 눈 뜨자마자 보이는 게 이런 광경이라, 나도 모르게 그만···."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자니, 뒤늦게 제정신을 되찾은 휴마누스가 멍한 표정으로 눈을 끔벅이며 말했다.
'대체 꿈속에서 뭘 봤길래 이런 반응이 나오는 거지?'
적어도 지난번 보았던 2회차의 뒤 내용을 본 게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랬다면 내가 세르펜스의 입에 손수건을 물리든 입마개를 씌우든, 지금처럼 화내지 않았을 테니까.
"사과는 됐고, 이 주먹이나 좀 치워주세요."
"으응···."
휴마누스가 주먹을 거두고 침대로 돌아가 자리에 앉고 나서야, 세니어의 결계가 해제되었다.
나는 세르펜스의 입에 손수건을 마저 쑤셔 넣으며, 다음부터는 휴마누스도 묶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아니지! 애초에 다음 같은 게 있어선 안 되잖아!'
나는 고개를 흔들며, 무심코 떠올려버린 불온한 생각을 떨쳐냈다.
"무슨 일이에요?!"
똑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 너머에서 유지스를 비롯한 일행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실에 모여 있다가 휴마누스의 외침을 듣고 놀라서 뛰어온 모양이다.
나와 휴마누스는 아무 일도 없다고 입 모아 대답했다. 다들 물러났는지 밖은 다시 조용해졌다.
본의 아니게 방음 테스트를 해버렸고, 결과는 처참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아공간 주머니에서 방음 스크롤 한 장과 손수건 하나를 꺼내어, 스크롤은 찢고 손수건은 휴마누스에게 건넸다.
"이건 왜?"
"눈물 닦으라고요."
"···어? 어어?!"
내 말을 듣고 나서야 자신이 울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나 보다.
당황한 휴마누스가 내 손수건을 빼앗듯 가져가,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훔쳐냈다.
"뭘 그렇게 부끄러워합니까? 사람이 울 수도 있지."
"그래도 못 본 거로 해 줘."
휴마누스가 민망하다는 표정으로 손수건을 돌려주며 말했다.
그리 어려운 부탁도 아니기에, 나는 알았다고 대답하며 손수건을 돌려받았다.
"그런데 대체 꿈에서 뭘 봤기에 세르펜스에게 사과하며 울기까지 한 겁니까?"
"혹시 내가 잠꼬대라도 했어?"
"그런 게 아니면 제가 어떻게 알고 있겠어요?"
휴마누스의 잇새로 끄응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비밀로 해 주겠다고 약속했는데도, 우는 모습을 들킨 게 어지간히도 부끄러웠나 보다.
'그러고 보면 세르펜스도 처음 내 앞에서 울었을 땐 민망해 했···었나?'
아니다. 그 녀석은 처음부터 뻔뻔했다.
나는 세르펜스가 두 시간 내리 울었던 그 날을 떠올려 버렸고, 그렇게 추억 미화는 실패로 돌아갔다.
왠지 모를 머쓱함을 느끼며, 나는 김밥펜스가 올려진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번에 내가 본 건, 세르펜스가 성검의 주인으로 선택받았을 때···. 크흠! 그가 죽고 난 이후에 있었던 일이야."
목이 메는지 휴마누스가 말하는 도중에 목청을 가다듬었다.
나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작은 물통을 꺼내어 그에게 던졌다. 휴마누스는 물통을 깔끔하게 잡아채고 목을 축인 후 고마움을 표했다.
"그러니까 1회차의 기억을 봤다는 거죠? 하지만 그때 휴마누스는 성검과 접촉할 일이 없었을 텐데요? 지난 회차에서의 성검 접촉 여부는 꿈이랑 아무 상관도 없는 거였나? 아니, 그보다 어째서 세르펜스가 죽은 이후의 기억을···."
"왜냐하면 그때 내가 성검과 접촉했으니까?"
"예···?"
아무래도 이 얘기는 자세하게 들어봐야 할 것 같다.
* * *
[[♤]]
세피가 죽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믿지 않았다.
그의 시신을 마주한 후에도, 믿을 수가 없었다.
성검의 힘 때문인지 그의 시신은 조금도 부패하지 않았다. 그건 내가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더구나 황제라는 자리는 온갖 사치를 누릴 수 있으면서, 친우의 죽음을 애도할 시간은 누릴 수 없는 사치로 치부되었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네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나 봐···."
바쁜 일과를 마치고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침실로 향해도 잠이 오질 않는다.
취하고 싶은 기분이라, 홀로 술잔을 기울였다.
그러나 아무리 술잔을 비워보아도 머릿속은 비워지지 않았다.
그의 시신이 발견된 장소는 차가운 동굴이라고 보고 받았다.
'마법 시약에 필요한 재료를 캐러 다니는 채집꾼이 비를 피하려다가, 우연히 발견한 거라고 했던가?'
대륙을 구하기 위해 홀로 싸움을 이어나가던 영웅은, 내 친우는. 그 죽음마저도 외롭고 쓸쓸했다.
그리고 그 죽음을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무척이나 비정했다.
세피의 시신은 제국으로 이송되었다.
이는 대륙을 구하다 죽음을 맞이한 영웅을 기리기 위해, 고향으로 돌려보내겠다는 인도적인 이유가 아니다.
악을 무찌를 힘을 지닌 성검이 악마 숭배 세력에 넘어가면 안 되기에.
그의 시신을 검집 삼아 성검을 옮겨 왔을 뿐이다.
'대체, 어느 쪽이 악이란 말인가···.'
언제나 단정하고 정갈한 몸가짐을 유지하며. 결코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 없던 그였는데.
오랜만에 마주한 친우는 피 칠갑을 한 채로, 다 해진 옷을 걸치고 있었다.
얼마나 힘든 싸움을 반복해 왔는지 증명이라도 하듯 온몸은 상처투성이였다.
그리고 목 한가운데를 꿰뚫은···.
그의 시신이 눈앞에 아른거려 눈을 질끈 감았다.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차단된 시야는 기억을 더욱더 생생하게 만들 뿐이었으니.
술잔을 움켜쥔 손아귀가 아릿하다.
눈을 뜨고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신성력으로 치유할 수 없는 흉이 그곳에 남아있었다. 성검에 의한 상처다.
내 친우의 안식을 위해서였다. 후회는 없다.
'달리 후회가 있다면···.'
이 흉터가 생긴 게 무려 일주일 전의 일이다.
하지만 아직도 세피의 장례는 그 준비조차 시작되지 않았다.
반대하는 이들이 너무나도···. 끔찍스레 많았다.
'세피의 살아생전에도 그를 괴롭게 하더니···.'
사람들은 그가 죽은 이후에도 그를 비난하고, 희생양으로 삼았다.
그를 죽음으로 몰아가 놓고는. 이제는 죽은 그의 시신을 종교 재판에 회부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당장은 그들의 목소리를 억누르고 있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함께 세피의 장례를 주장해 줄 만한 혈연이라도 남아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교단에 입적한 친척 어른이 한 명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세피가 죽었다는 소식이 알려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는 모양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변명에 지나지 않겠지. 적어도 세피, 너에게는···."
밤하늘에 떠오른 은빛의 달이 꼭 세피 너 같아서, 나도 모르게 달을 향해 말을 걸었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걸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미안해, 세피. 미안···, 정말로··· 미안해···."
말을 거는 행위를 멈출 수가 없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만 같아서, 반복적으로 사과의 말을 토해냈다.
그렇게 끊임없이 뱉어내는데도, 자꾸만 무언가 울걱울걱 치밀어 올랐다.
"단 한 명이라도, 네 곁에 의지할 사람이 있었더라면···. 너는 다른 선택을 했을까?"
세피가 성검의 선택을 받고 제국을 떠났을 때.
실은, 나도 그를 따라나서고 싶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억지를 부려서라도 그를 따라갈걸 그랬다.
"그러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워."
황태자와 공작이라는 신분을 벗어던지고 함께 여행하고 싶었다.
새로운 것을 접하며 놀라워한다거나. 등을 맞대고 싸우며 우정과 신뢰를 쌓고 싶었다.
그렇게 함께 성장하며 나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에 나는 너무 약했다.
함께 나아가기는커녕, 그의 발목만 잡을 것이 너무나도 자명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황태자라는 신분은 위험한 여정에 동반한다는 선택지 자체를 앗아가 버렸다.
그래서 떠나는 그를 웃는 얼굴로 배웅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성검의 선택을 받은 게 네가 아니라 나였다면···. 좋았을, 텐데···."
나는 성검의 주인이 된 내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런 내 옆에는 세피가 있었다.
"필시 즐거울 테지···."
처음 길을 나설 때에는 내가 그의 짐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세피는 그런 미숙한 내가 성검의 주인으로서 제 몫을 다 할 수 있도록, 성심성의껏 가르쳐 줄 것이다.
간혹 야영을 하게 될 때마다, 모닥불을 피워 놓고 그 옆에서 세피에게 검술 지도를 받게 될 테다.
그러다 차츰 실력이 쌓이면 직접 검을 맞대어 대련하는 거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세피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우는 날이 오겠지.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오지 않는다.
만약을 가정한 상상은 달콤했고, 그 뒤에 마주해야 하는 현실은 잔혹했다.
내일이 오는 것이 두렵다.
해가 뜨면 나는 세피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더 나아가 그 뒷수습을 논해야만 한다.
그리고 또다시 은빛의 달이 휘영청 떠오르는 밤이 되면, 그의 죽음을 부정하는 나날이 이어질 테다.
"미안해···, 미안···."
나는 갈 곳을 잃어버린 사과의 말을 토하듯 뱉어냈다.
이 잔혹한 현실을 바꿀 수 있는 한 줄기 빛이, 기적이 찾아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