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617화 (617/925)

617회

74. 공작님과 세계수 (6)

* * *

"룩스메아를, 만났어요···?"

내 물음에 휴마누스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긍정의 의미다.

이어진 휴마누스의 설명에 의하면, 룩스메아는 자신과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했다.

'완전히 똑같지 않은 건,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이 달랐기 때문이라나?'

어떤 색이었냐고 물으니, 휴마누스는 자신의 검집에 박힌 화이트 오팔을 닮은 보석을 가리켰다.

저런 신비하고 은은한 색상의 머리칼과 눈동자를 지닌 휴마누스라니. 잘 상상이 안 간다.

'어쨌든, 휴마누스한테는 나타났다 이거지? 솔레르티아 씨도 룩스메아와 만났다는 모양이고.'

이제 와서 어째서 나를 이곳에 보낸 거냐고 룩스메아에게 따질 생각은 없다.

즐거운 추억도 생겼고 소중한 친구들도 생겼으며, 상처받고 버려진 아이를 구할 수 있었으니까.

그래도 억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미리 얘기라도 해 주지.

"그래서, 룩스메아가 무슨 말을 했는데요?"

"정말로 세르펜스를 대신해서 성검의 주인이 되고 싶은 거냐고 묻더라. 그래서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고."

휴마누스가 씁쓸하게 웃으며 답했다.

어딘지 모르게 어두운 그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질문이 튀어나왔다.

"혹시 지금 후회해요?"

"지금의 내가 내린 선택이 아니니까, 후회하고 말고 할 것도 없지. 그래도 내가 세르펜스를 대신해서 성검의 주인이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만약 지금 나에게 다시 한번 선택권이 주어진대도, 그때의 나와 같은 선택을 할 거야."

"그런데 왜 그렇게 풀이 죽어 있어요?"

"그게···, 세르펜스 아직 안 깨어난 거 맞지?"

휴마누스가 무언가 말하려다 말고 세르펜스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것 같지만, 혹시 몰라 녀석의 눈꺼풀을 까뒤집어 보았다. 의식은커녕 깨어날 기미조차 없다.

그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휴마누스가 하다 만 말을 이었다.

"그때의 나는 너무···. 낙관적이었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오만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내가 성검의 주인이 되면 모든 게 다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나 봐. 하지만 결과는···. 나보다 네가 더 잘 알겠지."

휴마누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그의 옆모습을 통해, 억지로나마 끌어올렸던 입꼬리가 축 처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성검의 선택을 받고 나서. 내게 세르펜스를 신경 쓸 여유가 있었다면, 상황이 그렇게 극단적으로 치닫진 않았을 거야."

"일이 그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사람들이 세르펜스에게 너무 큰 기대를 걸었던 탓이죠. 휴마누스의 잘못이 아닙니다."

"나도 사람들의 비교하는 시선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것 같아. 아마도? 직접 경험한 게 아니다 보니 조금 긴가민가하지만···. 응, 그랬어. 사람들이 반대하든 말든 내가 세르펜스와 함께하길 바라고, 그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면 분명···."

[성검의 주인]을 읽은 나는 알고 있다.

성검을 받은 그가 얼마나 혼란스러워했는지. 그리고 갑자기 두 어깨에 올려진 무거운 책임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했는지.

1회차에서 성검의 주인이 되겠다고 결심한 건 후회하고 말고 할 게 아니라고 했으면서.

휴마누스는 2회차의 일을 후회했다.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휴마누스가 돌연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탄성을 발했다.

"아!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같이 가자고 제대로 제의했는데도 거절당했으니까, 함께하는 건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었나? 이럴 줄 알았으면 어렸을 때부터 제대로 단련해 둘걸."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세르펜스가 동료 제안을 거절하면서 한 말은 그냥 핑계일걸요? 녀석이 제국에 남겠다고 한 건 저와 떨어지기 싫어서입니다. 한창 보호자 품이 좋을 때잖아요."

"뭔가 엄청나게 억울하면서도 어처구니없고, 한편으로는 고마워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휴마누스가 이마를 짚으며 골치 아프다는 듯이 말했다.

그의 두통을 줄여주고자, 나는 그에게 답을 알려주었다.

"그럴 땐 그냥 고맙다고 하시면 됩니다."

"갑자기 고마운 마음이 사라졌어."

내가 알려준 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휴마누스가 정색했다.

그냥 조용히 있을 걸 그랬나 보다. 나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심정으로 뒤늦게라도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사이. 휴마누스는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다시피 거칠게 긁적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째 머리가 복잡하네···."

슬슬 진정될 만도 하건만.

볼타 산맥에서 2회차의 기억을 보았을 때 이상으로 그는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아무런 대비도 없이 이전 회차의 기억을 보았던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미리 해 뒀을 텐데도 말이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나?'

그의 말에 따르자면 1회차의 황제누스가 성검의 주인이 되길 희망한 건, 세르펜스의 희생을 막기 위해서다.

그러나 [성검의 주인]에 해당하는 2회차에서의 그는 세르펜스를 제 손으로 죽였다.

세르펜스를 희생으로 내몰았던 이들을 한 명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서.

그러니 충격이 더 큰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아주 만약에. 내가 처음으로 성검의 주인이 되었을 때···. 그러니까 네 표현을 빌리자면 2회차 때 말이야. 내게 1회차의 기억이 있었다면···. 아니, 아니다."

2회차 시작 시점에 휴마누스에게 1회차의 기억이 있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거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정작 말을 꺼낸 휴마누스의 견해는 다른 듯했다.

굉장히 찜찜하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사정없이 구기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뭐가 아닌데요?"

"···사람이 말하기 싫어하는 것 같으면, 모르는 척 넘어가 주면 안 돼? 너는 눈치 좋잖아."

휴마누스가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나를 흘겨보았다. 그런 그의 눈시울은 아직도 붉었다.

굉장히 낯선 모습이다. 휴마누스 본인도 그런 자신을 낯설어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걱정스러웠고, 그렇기에 차마 넘어가지 못하겠는 걸 어쩌겠는가.

"그게 어딜 봐서 넘어가 달라는 태도입니까?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니까 더 캐물어 달라는 태도지."

"하여간, 말이나 못 하면."

"그럼 큰일 나죠! 만약 제가 말을 잘하지 못했다면 세르펜스의 신용도 못 얻었을 겁니다!"

"그거 정말 큰일이잖아?!"

휴마누스가 돌렸던 고개까지 바로 하며, 내 말에 적극적으로 동의를 표했다.

당연한 반응이다. 내가 세르펜스의 신용을 얻지 못했다면 현재는 2회차를 반복했을 테니까.

"그래서 무슨 말을 하려던 건데요?"

"그게 그러니까 말이지···. 저번이랑 다르게 이번에 꿈에서 본 기억은 아주 짧기도 하고, 여러모로 힘든 시기라서 내가 잠깐···.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을 품었던 걸지도 모르지만···."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서두를 저리도 장황하게 늘어놓는지 모르겠다.

다행히도 휴마누스는 내가 지겨움을 느끼기 전에 본론을 꺼냈다.

"1회차 때의 나는 지독한 인간 불신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 같아···.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하지? 그때 나를 찾아온 존재가 룩스메아 님이 아닌 다른 존재였다면···. 아! 지금이야 그분께 감사하고 있지. 내게 기회를 두 번이나 주셨으니까. 하지만 그때는 대륙의 안위고 뭐고 장례를 반대하는 자들을 죄다 숙청해버릴까, 그런 생각까지 한 모양이라···."

어쩐지 조금 이상하다 했다.

세르펜스는 이전 회차 기억을 보고 나서도, 한바탕 울어 젖히고 나면 금방 정신을 추슬렀다.

하지만 휴마누스는 계속 혼란스러워했다. 아무래도 가치관 자체가 흔들렸나 보다.

그런 과격한 생각을 떠올렸다는 게 여간 충격이 아니었는지, 휴마누스는 내게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독백처럼 주절주절 떠들어댔다.

이쯤 되면 대화가 아니라 고해성사에 가까웠다.

[성검의 주인]에서 여러 왕국이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비난의 말을 퍼부을 때도. 휴마누스는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려 애썼다.

그런 그의 곁에는 항상 든든한 동료들이 있었다.

그들의 존재는 이 세상에 아직 선한 사람이 남아있고, 휴마누스 자신을 믿어주는 이가 있다는 증명이었다.

반면에 황제는 고독한 자리다.

곁에 의지할 사람이 필요했던 건 황제누스도 마찬가지였겠지. 그도 사람인 이상, 지치고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다.

마지막 방아쇠가 된 것이 바로, 성검펜스의 죽음과 그것을 대하는 사람들의 이기적인 태도였을 테다.

'이렇게 생각해 보니, 황제누스의 자아를 가지고 성검의 주인이 되는 건 좀 위험했을지도···.'

진작에 멘탈이 바스러진 세르펜스와 실시간으로 아작나는 휴마누스의 대륙 구원기라.

그건 또 어떠한 파국을 만들어냈을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그런데 왜! 이 망할 놈의 시발검은 자꾸 과거 회차의 기억을 보여주냐고!'

속에서 천불이 끓어올랐다.

황제누스의 과격한 숙청 의지가 무척이나 공감되었다.

어차피 룩스메아는 신이니까 쉽게 죽지도 않을 텐데. 마음 같아서는 세르펜스를 두 번이나 찔러 죽인 시발검으로 콕콕 찔러주고 싶다.

사람이 이런 일 저런 일을 당하다 보면, 아무리 착한 사람일지라도 폭력적인 충동에 시달릴 수도 있지.

암, 그렇고말고.

"그래도 폭군은 되지 맙시다, 휴마누스."

"으응···."

"전부는 말고, 일부만. 그중에서 정말 인륜적으로 글러 먹었다 싶은 놈들만 살짝궁 솎아내자고요. 종교 재판을 주장한 놈들 얼굴, 똑똑히 봐 뒀죠?"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일이니까, 용서해 주자고 말하려던 거 아니었어?"

"마왕의 존경심을 살 것 같은 악의 종자들을 용서해 주다니! 그런 건 신의 사자로서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 그래···."

휴마누스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농담으로 받아들이고 웃으며 한 귀로 흘린다거나, 정의감을 불태우며 강력하게 동의하거나.

둘 중 하나는 할 줄 알았는데, 여전히 힘이 쭉 빠진 모습이다.

세르펜스의 말에 따르자면 과거의 기억이 현재의 자아를 침식할 정도는 아니라 했으니.

지금 당장은 혼란스러워하고 있지만, 휴마누스는 금방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테다.

그렇게 믿으며. 나는 휴마누스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보다 성검의 선택을 받은 게 아니라 성검을 선택한 사람이 되었는데, 지금 심정이 어때요?"

"내가 선택한 길이니, 더 열심히 해야겠다···?"

휴마누스다운 대답이라 안심이 됐다.

"사람들의 민낯에 실망한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나는 누군가가 괴로워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아. 이번에는 정말, 기필코···! 세르펜스도, 이 대륙도. 제대로 지켜내고 싶어."

휴마누스가 아주 조심스레, 자신의 생각을 입 밖에 꺼내놓았다.

성검의 주인이 어떠한 고난과 역경에 시달릴지 알면서도, 친구를 위해 그 길을 택한 사람답게.

잠시 흔들리긴 했어도 휴마누스는 역시나 휴마누스였다.

"그런데 세르펜스는 대체 언제 깨어나는 거야?"

"그러게나 말입니다. 이제까지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꿈속에서 충격적인 일을 겪고 끙끙거리기 전까지는 무슨 짓을 해도 안 일어나는 것 같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확실하지는 않지만, 지난번 꿈에서 깰 때 '이게 꿈이라면 깨고 싶다.' 하고 벗어나고자 간절히 바랐던 것도 같아."

지난번이라 하면 볼타 산맥에서 2회차 꿈을 꿨을 때 얘기일 테다.

잘 생각해 보니 깨워야 일어나는 세르펜스와 다르게 휴마누스는 혼자서도 잘 일어났다.

이번에는 성검과 접촉한 기간이 워낙 짧아서, 볼 게 없으니까 일찍 일어난 것 같지만.

그래도 몹시나 그럴듯한 가설이다.

다른 시기의 세르펜스가 무언가를 강하게 바라지 못한다는 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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