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619화 (619/925)

619회

74. 공작님과 세계수 (8)

방을 나서기에 앞서 휴마누스는 성검을, 세르펜스는 침대를, 나는 세르펜스를 묶었던 밧줄과 녀석의 침으로 축축해진 손수건을 챙겼다.

그렇게 뒤처리를 모두 마친 뒤, 우리는 일행이 모여있는 거실로 향했다.

도착한 거실에는 우리 일행들만 있을 뿐.

세계수의 마지막 잎새(였던 것)을 잔인하게 으스러트린 매정한 하이 엘프. 줄여서 매하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라? 매하엘 님은 어디 갔어요?"

"미하엘이 누군데?"

이제 슬슬 내 줄임말에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휴마누스는 매하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로도 모자라, '미하엘'이라고 잘못 발음했다.

줄임말이 아니라 이름으로 착각한 것이다.

실로 눈치 없는 행동이었으나 그를 타박할 생각은 없다.

눈치가 없으면 어떠한가. 그는 친구를 진정으로 생각할 줄 아는 의리파였으니.

오늘 하루 한정으로, 나는 휴마누스의 모든 행동을 너그럽게 이해하고 넘어가 줄 생각이다.

나는 인자하게 웃으며 매하엘의 어원과 그런 별칭을 붙이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그리고 하이 엘프는 그 수가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한두 명밖에 없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저희를 안내해 준 하이 엘프를 따로 구분할 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이유라면, 그냥 이름을 알려달라고 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에드나가 의문을 제기했다.

내 시선이 그녀에게 닿자, 에드나가 '앗, 깜빡했다!' 하고 혼잣말하며 뒤늦게 손을 들어 올렸다.

"죄송해요. 마탑에서는 토론을 할 때마다 상대방의 말에 바로바로 반박을 하다 보니, 그게 버릇이 되어서···."

마탑의 전통이 그렇다면야. 이해해 줄 수밖에.

신성 루멘 제국의 자문회 전통에 비하면 그 정도는 애교다.

"그럼 어쩔 수 없죠. 어쨌든 매하엘 님에게도 이름이 있을 텐데, 어째서 매하엘 같은 별칭으로 부르는 거냐고 물으셨죠? 그건 다 이유가 있습니다."

"세계수의 사도님을 '매정한 하이 엘프'라고 부르는 건 저도 너무하다고 생각하지만, 선우가 아무 이유 없이 그분께 별칭을 만들어 붙인 건 아니에요."

유지스가 나를 질책하는 것인지, 두둔해 주는 것인지. 도통 분간이 안 가는 말을 했다.

복잡한 심경을 눈빛에 담아 유지스에게 전했건만. 유지스는 그런 내 눈빛을 튕겨내며 설명을 끝마쳤다.

"모든 사도님들은 세계의 나무, 영겁의 화로, 무궁의 심해에서 태어나죠. 그렇기에 부모가 지어준 이름도, 부모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성도 존재하지 않아요. 오직 세례명만이 존재할 뿐이죠."

요약하자면, 이름이 곧 세례명이라 함부로 알려줄 수 없다는 뜻이다.

[성검의 주인]을 통해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들으니 그때와는 느낌이 매우 달랐다.

'영겁의 화로와 무궁의 심해는 무생물이니 그렇다 쳐도, 세계수는 말할 수 있잖아? 하이 엘프는 세계수의 열매에서 태어난다고 하니, 따지고 보면 그들의 부모는 세계수 아닌가?'

애들 이름 좀 지어주지, 정말 너무하다.

세계수 인성 나무 설이 또다시 머리를 든 순간이다.

"아무튼, 그래서 집주인인 매하엘 님은 어디 가시고 여러분만 거실에 모여 계시는 겁니까?"

나는 세계수의 인성에 관한 고찰은 나중으로 미루고, 일행에게 매하엘의 행방을 다시 물었다.

내 질문을 이어받은 이는 일행 중 누군가가 아닌, 때마침 돌아온 집주인 매하엘이다.

"제 이름이 미카엘이라는 걸, 신의 사자께서 어찌···?!"

몹시나 공교롭게도 집주인의 세례명은 '매하엘'과 발음이 엇비슷한 '미카엘'이었나 보다.

매하엘. 아니, 미카엘의 은빛 눈동자가 당혹에 물들어 불규칙적으로 일렁거렸다.

"시, 신의 사자께서는 그런 것도 아시는군요···. 과연 신의 사자···네요. 하지만···, 그래도 타인의 세례명을 함부로 남들에게 알리는 건···. 정말 너무하신 처사입니다···."

졸지에 친하지도 않은 사람. 그것도 무려 9명이나 되는 대인원에게 세례명을 들켜버린 미카엘이 울상을 지었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내게 원망의 눈길을 보내는 건 그만둬 줬으면 좋겠다.

나는 그를 매하엘이라고 불렀을 뿐. 진짜 세례명을 밝힌 건 미카엘 본인이다.

즉, 이건 자업자득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을 앞에 두고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인정을 베풀어 미카엘을 위로해 주기로 했다.

"그래도 자신이 없는 곳에서, 얼굴조차 모르는 남에게 세례명이 알려진 누구누구누구보다는 낫잖아요?"

"저와 같은 피해자가 세 명이나 더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미카엘은 충격이 가라앉기는커녕 혼란이 더해진 표정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휴마누스가 그런 미카엘을 딱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전에는 내게 리에나의 세례명을 멋대로 알리더니, 너 아주 상습범이구나? 어, 잠깐만···. 그때 네가 입에 담은 세례명이 나와 리에나와 레니에의 것이니까···. 으응?!"

"휴마누스 님. 볼타 산맥에서의 일이 끝나고 나서, 저희를 모아 놓고 갑자기 세례명을 알려주신 게 설마 그런 이유였어요?"

"나만 네 세례명을 알고 있기 미안하니까···.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시온 너, 우리 세례명을 대체 누구에게 알려준 거야?!"

미카엘의 혼란은 휴마누스와 리에나에게까지 번졌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던데. 어째서 나는 미카엘을 달래겠다고 나서서 일을 키운 것일까?

후회스럽긴 했으나 어쩌겠는가.

한번 뱉어버린 말은 엎어진 물보다 주워 담기 어렵다.

이렇게 된 거, 나는 그냥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휴마누스와 리에나. 그리고 오풀렌스 영애의 세례명은 제 존재의 증명으로 쓰인 것이니, 너무 고깝게 생각하지 마세요. 신의 사자가 대업을 하다 보면, 신께서 내린 세례명 한둘쯤은 잠시 빌릴 수도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제가 빌린 건 둘이 아니라 셋이었지만. 엄한 사람에게 알린 것도 아니고, 교단 사람들에게 알린 거니까 괘념치 마시죠!"

내 말에 리에나, 미카엘이 나란히 침묵했다.

'신의 사자' 카드가 제대로 먹혀든 것이다.

비록 휴마누스는 다소 불만이 남은 듯했지만.

"세르펜스의 세례명은 지켜주려고 했으면서, 이건 차별이야!"

그러게 지난 회차에서 세례명을 좀 더 소중히 여기지 그랬냐는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하지 않았다.

세계가 다시 시작되었음을 모르는 미카엘이 동석하기도 했고, 오늘 하루는 휴마누스의 모든 행동을 이해하고 너그러이 넘어가 주기로 마음먹었으니까.

놀리는 것도 참기로 했다.

"그래서 미카엘은 어디 갔다 왔어요?"

"···아, 저는 세계수 님 곁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세계수 님께서 깨어나셔서 여러분께 알리러 온 겁니다."

내가 처음 세례명으로 불렀을 때 불편해하던 세르펜스와 달리.

미카엘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내 물음에 대답했다. 어딘가 모르게 단념한 듯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하긴, 세례명 말고는 이름이 없으니까.'

하이 엘프들끼리 서로를 부를 때. 혹은 세계수가 그들 중 누군가를 특정할 때는 세례명으로 부를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다 보니 세례명으로 불리는 것 자체에는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걸 테지.

나는 그렇게 이해하며 호칭 문제를 대충 넘기고, 미카엘에게 질문했다.

"정신을 차렸다니 잘됐네요. 그럼 바로 만나러 가면 됩니까?"

"네. 아! 하지만 가는 건 성검의 주인과 신의 사자님. 그리고 프라시더스 님뿐입니다."

미카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긍정했다가, 재빨리 설명을 덧붙였다.

그에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일행들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멈칫했다.

"세계수 님께서 중요하게 할 말이 있으니, 세 분만 모셔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송하지만 나머지 분들께서는 여기서 더 기다려 주시길 바랍니다."

미카엘이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애초에 세계수가 우리 셋만 부른 건 미카엘의 잘못이 아니었기에, 일행 중 그를 탓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기다리시는 동안 찬장에 있는 차와 말린 과일은 얼마든지 꺼내 드셔도 됩니다."

"아니에요. 괜찮으니까, 저희는 신경 쓰지 마시고 다녀오세요."

유지스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으레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다. 그도 그러할 게 이미 테이블 위에는 빈 접시와 찻잔이 놓여있었으니까.

내가 방 안에서 세르펜스를 묶고, 휴마누스의 주먹에 위협을 당하는 동안. 이들은 한가로이 다과를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참, 이제 슬슬 세르펜스에게 간식 먹일 시간인데···. 아니, 좀 지났나?'

나는 유지스가 거절한 미카엘의 호의를 대신 받아들이기로 했다.

찬장에서 말린 과일을 두 움큼 꺼내어, 세르펜스와 휴마누스에게 한 움큼씩 분배해 주었다.

미카엘의 묘한 시선이 뒤통수에 꽂혔으나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일행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며 미카엘을 따라 그의 집을 나섰다.

마을 어귀를 벗어나 빽빽한 나무숲에 들어서자, 세르펜스가 내게 감말랭이 하나를 양보하며 입을 뗐다.

"시온이 그쪽의 세례명을 알린 건 나쁜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온 건 다름 아닌 내 변호였다.

나는 매하엘의 본명이자 세례명이 미카엘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따라서 나쁜 의도든 좋은 의도든, 그 어떤 것도 담을 수 없다.

그러므로 세르펜스의 말은 거짓 하나 없는 진실이다.

"그런···가요···?"

미카엘이 나를 힐끔거리며 되물었다. 세르펜스의 말을 믿지 못하는 눈치다.

그런 반응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세르펜스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부터 거짓말을 시작하겠다는 신호다.

"시온은 인연을 굉장히 소중하게 여깁니다. 저희와 연이 닿은 엘프 사도는 그쪽뿐이나, 엘프 사도가 그쪽만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그렇기에 다른 엘프 사도와 그쪽을 구분하여, 오롯이 기억에 담고자 했을 뿐이니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 주십시오."

세르펜스가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말투와 목소리는 대외펜스의 그것이건만. 놀랍게도 그 말의 내용에는 거짓이 하나도 없었다.

어찌 되었든 내가 미카엘을 매하엘이라 지칭한 건, 다른 하이 엘프와 미카엘을 구분하기 위함이었으니.

"그러고 보니 시온이 아까 그런 얘기를 하긴 했었지? 하지만 그건···."

휴마누스가 눈치 없는 소리를 뱉으려 한다는 신호가 왔다.

나는 그가 말실수하지 않도록 도와주고자, 재빨리 손가락으로 그의 옆구리를 찔러 들어갔다.

그러나 휴마누스에게 내 공격 따위가 먹힐 리 만무했다.

휴마누스는 가볍게 손을 휘젓는 것으로 내 손을 걷어내어 공격을 무효로 했다.

그래도 그의 입을 막는다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으니.

이 공방(攻防)의 승리자는 나다.

"아! 그런 이유였군요. 제가 소견이 짧아 신의 사자께서 어떠한 의도로 제 세례명을 모두에게 밝혔는지 헤아리지 못하여, 그만 오해하고 말았습니다. 이유를 제대로 설명해 주셨다면 좋았을 텐데···."

"시온은 이래 보여도 부끄러움이 많고 겸손하시어 생색을 내지 않는 탓에, 종종 주변의 오해를 사곤 합니다."

세르펜스가 연이어 옳은 소리를 했다. 나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째서인가 휴마누스가 떫은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 부정하고 싶은 눈치인데, 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 '이래 보여도'가 거슬렸던 걸까?

분명 그랬을 것이다.

우리를 대하는 미카엘의 태도는 한층 누그러졌다. 나를 배려하기 위함인지 걸음 속도 또한 느려졌다.

덕분에 이번에는 세르펜스의 옷을 붙잡지 않고, 발밑과 앞을 고루 살피며 이동할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왔던 길을 거슬러 또다시 세계수 앞에 당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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