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1회
74. 공작님과 세계수 (10)
나는 고개를 돌려 내 뒤에 선 녀석의 표정을 살폈다. 시야에 들어온 건 내가 예상했던 표정이 아니다.
불안, 초조, 걱정. 그런 감정이 아예 보이지 않는 건 아니었으나, 세르펜스의 표정에서 가장 강렬하게 느껴지는 건 '혼란'이었다.
그리고 녀석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휴마누스가 서 있었다.
'휴마누스는 원래 저런 얘기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지, 참.'
자신이 겪은 고통은 용서할지라도, 남이 겪은 고통을 대신 용서하겠다고 나서는 건 휴마누스가 할 만한 행동이 아니다.
네가 이만큼 아팠으니까, 남을 이만큼 아프게 한 것쯤은 괜찮아.
그런 소리를 할 만한 성격은 못 된다는 뜻이다.
'아니지? 2회차에서 고통받은 사람 중에는 휴마누스도 끼어있었으니까, 남의 고통이 아니구나?'
그냥 끼어있는 수준이 아니다. 휴마누스는 그중에서도 최대 피해자였다.
1회차의 일로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화가 많이 났나 보다.
2회차에서 타락펜스가 제국을 멸망시키고 대륙을 뒤엎은 것을 이해해 버릴 정도로.
세르펜스가 타락한 원인이 자신을 포함하여,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탓이라 생각한 것일 수도 있고.
휴마누스가 대의를 위해 모든 걸 버릴 수 있는 고결한 성인(聖人)이 아닌, 타인보다 자신의 친우를 더 소중히 여기는 범인(凡人)이라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하물며 그 타인이 자신들을 지켜주는 이에게 악의를 퍼붓는 어리석은 자들임에야···.'
비록 이간질에 놀아났다고는 하나, 그 기저에는 희생양을 원하는 이기심이 깔려있었으니.
그 이기심이야말로 이 세상이 두 번이나 망하게 된 진정한 원흉이다.
{1회차···?}
세계수의 맑은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덕분에 나는 끝없이 이어질 뻔했던 생각을 끊어낼 수 있었다.
"그냥 저희끼리 편의상 쓰는 용어입니다. 매번 '세르펜스가 성검의 주인이던 시기'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요?"
{그때를 기준으로 잡고 1회차, 지난번이 2회차, 현재가 3회차···. 이런 식으로 부르는 게 맞습니까?}
"네, 맞아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기억해 두도록 하죠.}
나로서는 기억하고 자시고 할 게 있나 싶었지만, 세계수는 몹시 진지한 음성으로 그리 말했다.
이것이 바로 신조어를 대하는 어르신들의 태도라는 걸까?
감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아득한 세월을 살아온 이 나무가, 새로 배운 단어를 신나게 써먹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적중했다.
{그러고 보니 두 성검의 주인께서 합심하여 저를 치유해 주신 것도 그렇고···. 여러분께서는 1회차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있었던 일을 모두 알고 계시는가 봅니다.}
"네, 뭐. 어찌어찌하다 보니?"
나는 자세한 설명을 생략하고 대충대충 대답했다.
어차피 세계수가 성검을 통해 모든 걸 전달받을 수 있다는데, 입 아프고 시간 아깝게 떠들 필요가 있나 싶었기 때문이다.
세계수 또한 자세히 캐물으려 하지 않았다.
{혹시 제가 알게 되면 곤란한 것이라도 있습니까?}
"······."
"······."
"······."
2회차에서 타락펜스가 엘프들을 분열시켰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앞서 괜찮을 거라고 말했던 휴마누스마저 말문이 막혀 멈칫했다.
'지금 성검이 휴마누스를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건, [성검의 주인]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거잖아? 그런데도 휴마누스는 마왕펜스를 물리쳤으니까···.'
그런 낙관적인 생각이 떠올랐다.
그때 세르펜스가 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성검은 마왕과 악마들을 물리치기 위한 핵심 병기입니다. 그런 물건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서야 대륙의 위기를 초래할 뿐입니다. 그리고 또···, 으음···. 저는, '현재'가 없었던 일이 되어버리는 건 원치 않습니다. 이번이 마지막 시도이길. 그리하여 모든 것을 끝내고, 다 함께 평화로운 세상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었으면 합니다."
세르펜스의 말은 조심스럽게 시작하여 간절함으로 끝맺음 되었다.
녀석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아니, 꼭 설득을 해야 하는 것인지 고민했었는데.
자신을 걱정하느라 망설이던 나를 향해, 세르펜스는 괜찮다고 말하듯 작게 미소를 지었다.
'겁도 많으면서···.'
그만큼 현재가 소중하다는 거겠지.
소중함은 간절함을 동반했고, 그 간절함은 용기가 되어 녀석을 나아가게 했다.
툭하면 도망가려 들던 과거의 모습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매우 기꺼운 변화다.
오늘 자 육아 일기에 적을 내용이 생겼다.
"하하하! 그렇네. 현재의 관계가 사라지는 건 나도 원치 않아. 그리고 세상을 지킨다면 조금이라도 더 평화로운 모습을 유지하는 편이 좋겠지."
휴마누스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그러고는 우리가 결정을 내리는 동안 기다려준 세계수를 향해 다가갔다.
"그냥 갖다 대기만 하면 되는 겁니까?"
{제 몸에 기대어 두고 뒤로 물러나 주세요.}
세계수가 시키는 대로, 휴마누스는 검집에서 성검을 뽑아 세계수에 기대어 세워 놓은 후. 다시 나와 세르펜스의 곁에 섰다.
곧이어 세계수의 전신에서 은빛이 섞인 연녹색 기운이 흘러나와 성검을 감쌌다.
가지가 가늘게 떨리고, 나뭇잎이 서로 스치며 사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1회차에서 세계수가 불탄 이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많은 양의 정보를 전달해야 하는 까닭인지 그 상태는 꽤 오래 유지되었다.
"저러다 기껏 돋아난 잎이 죄다 떨어지는 거 아냐?"
"쉿···."
내가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세르펜스가 검지를 입술 앞에 가져다 대며 조용히 하라고 눈치를 줬다.
하기는 말이 씨가 될 수도 있으니까.
나는 그러겠다는 뜻으로 입에 지퍼를 채우는 듯한 동작을 했다.
"저 손동작은 무슨 의미야?"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겠다는 뜻일 겁니다."
"그런 뜻이라면···, 바늘로 입을 꿰는 동작을 형상화 한 거였나? 엄청 살벌하네."
세르펜스의 대답에 휴마누스가 무시무시한 추측성 발언을 내놓았다.
이상하게도 이 세상에서는 의복에 잘 쓰이지 않지만, 지퍼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어째서 저런 해석이 나오는 것일까?
'잠깐만? 지퍼를 채우려면 일단 달아야 하고, 그러려면 어쨌든 바느질을 하긴 해야 하니까···.'
괜히 상상했다. 이게 다 휴마누스 때문이다.
오늘 하루는 휴마누스가 뭘 하든 너그러이 넘어가 줄 생각이었는데. 자꾸만 그 결심이 흔들리려 한다.
{아···.}
떨림이 멎고, 세계수가 탄식을 흘렸다. 정보 전달이 끝난 모양이다.
세르펜스가 바짝 긴장하여 표정을 굳히고 거대한 세계수의 모습을 올려다보았다.
{이건···, 비극이로군요.}
만약 나무도 울 수 있다면, 지금쯤 세계수는 눈물을 흘리고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참담한 음성이 머릿속을 울렸다.
세계수의 가지가 축 처지고 나뭇잎이 열댓 장가량 떨어졌다.
그래도 세계수의 이파리는 여전히 무성했지만,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데에 부족함은 없었다.
무슨 나무가 이렇담 싶을 정도로 감정 표현이 참 풍부하다.
'그래도 비극으로 받아들였다는 건, 타락펜스의 행동을 이해해 주겠다는 거려나···?'
전달받은 정보를 정리하기라도 하는 건지, 세계수는 한참이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세계수가 말문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어째서 성검이 휴마누스 그대를 인정하지 않았는지. 아니, 이 경우에는 그대가 성검을 인정하지 못했다고 봐야겠지요.}
엥 소리가 절로 나오는 얘기였다.
나와 세르펜스가 나란히 휴마누스를 바라보았고, 휴마누스가 당황한 표정으로 손바닥을 내젓는 동시에 고개까지 홱홱 흔들어댔다.
"아, 아니야! 그런 적 없···."
{불가항력.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다.
잊고 지냈던. 혹은 잊으려 애썼던 그 말이 다시금 화두 되자 휴마누스가 몹시 괴로워했다.
{성검과 그 주인의 관계는 어느 한쪽의 선택만으로 강제되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한쪽이 거부해 버렸으니, 둘 사이의 연결이 어설플 수밖에요.}
그냥 성검의 주인으로 선택되면 끝이 아니었나? 그렇다면 역대 성검의 주인은 전부 불만 없이 성검을 받아들인 건가?
그런 의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처음에는 제가 성검의 선택을 받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습니다. 이제껏 성검의 선택을 부정했던 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니까요.}
당혹과 후회, 죄책감 등으로 감정이 격해진 휴마누스의 뾰족한 말을 감싸 안듯. 세계수가 그의 말을 끊고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보통은 그대처럼 시간이 지나 성검을 받아들이게 되면 해결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 문제가 되는 건, 성검의 주인으로서 선택받은 자가 한 명 더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무의식적으로 시선이 세르펜스에게로 향했다.
세르펜스가 으음 하고 낮게 침음을 흘렸다.
{1회차에서 차라리 본인이 성검의 주인이 되고 싶었노라 말했으면서, 막상 선택을 받게 되니 거부감을 드러내는 모습에 배신감을 느낀 모양입니다. 게다가 그 이후에는···. 성검의 주인이 되어 자신의 친우를 지키겠다던 그 약속마저도 지키지 못했지요.}
세계수의 음성에서 슬픔이 가득 묻어났다.
그 목소리는 휴마누스를 탓한다기보다는 비극적인 일에 통탄하는 것에 가까웠다.
휴마누스가 분하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짓씹었다.
{하여 성검은 이전의 연결을 남겨두었고, 그 누구도 온전한 주인이 아닌 현재의 구도가 형성된 것입니다.}
"그 누구도 온전한 주인이 아니라면···."
{놀랍게도 성검은 두 분 모두를 주인으로 인지하고 있습니다. 하나 검이 어디 두 명이 함께 쓰는 물건이던가요. 본래의 주인인 세르펜스 쪽과 더 강하게 결속되어 있기는 하나, 두 분 모두 제대로 된 성검의 주인은 아닙니다.}
요약하자면 결국 성검이 문제라는 건가?
휴마누스에게 거부당하고 약속도 안 지켜졌는데 주인으로 인지한다니까, 괜히 불쌍해졌다.
하지만 전 주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이도 저도 아닌 상태가 되었다니. 그건 또 그거대로 곤란해서···.
'뭔가, 전 주인의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다른 집에 입양된 강아지 같네.'
현재의 주인이 잘해주기는 해도 역시 전 주인이 그립다. 대충 그런 개념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더군다나 전 주인인 세르펜스가 외로움이 오죽 많아야지. 이래저래 상처도 많이 받았고.
{어쨌거나 성검이 두 분을 모두 인정했으니 어느 한쪽이 목숨을 잃는다면, 성검의 의도와 무관하게 남은 한 명이 온전한 주인이 되겠지만···.}
"무슨 그런 개, 읍···!"
강아지 생각을 해서 그런가, '개' 소리가 자연스럽게 튀어나와 버렸다. 덕분에 나는 또다시 세르펜스에게 입이 틀어막힌 신세가 되었다.
나는 입이 막혔고, 세르펜스는 나를 말리느라 바빴으니.
세계수와 대화를 하는 건 휴마누스의 몫이 되었다.
"절대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건 성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한 명이 죽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성검이 어느 한쪽과의 연결을 끊으면 됩니다만···.}
생각 외로 쉽고 간단한 방법이었지만, 아직 해결되지 못한 난제이기도 했다.
'양다리는 안 된다고 따끔하게 혼내줘야 하나? 검을 상대로?'
에고 소드는 판타지의 로망 중 하나라고 생각했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제대로 자아가 확립된 것도 아닌 성검이 이렇게나 사람을 피곤하게 할 줄이야.
역시 도구는 그냥 도구일 때 쓰임을 제대로 하는가 보다.
'설마 세니어도 성검처럼 내가 느끼는 것을 함께 느끼는 걸까? 단순히 위기 감지 능력만 있는 게 아니라?'
나는 허리춤에 매달린 세니어를 내려다보았다. 잠잠했다.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니 평소에 손질을 잘 해줘야겠다. 하루에 한 번씩 칭찬도 해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