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2회
74. 공작님과 세계수 (11)
"휴마누스, 아니꼽긴 해도 저쪽이 계약서를 가진 갑이니까, 잘 어르면서 점수 좀 따 봐요. 손질도 잊지 말고 꼬박꼬박 잘해 주고요. 성검이 녹슬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성의라는 게 있잖아요? 손질하면서 칭찬도 한마디씩 날려주면 성검도 휴마누스에게 마음이 기울겠죠."
나는 휴마누스에게 검의 환심을 사는 법에 대해 조언을 건넸다.
하지만 휴마누스는 무슨 생각에 그리도 깊이 빠졌는지, 내 말을 듣지 못한 듯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휴마누스?"
"으, 응?! 불렀어?"
내가 어깨를 툭 건들며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휴마누스가 상념에서 벗어났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저기,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성검의 주인 자격 조건에는 순결이 있잖아···?"
휴마누스가 머뭇머뭇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며 세르펜스를 힐끔거렸다.
그 시선을 따라, 나는 세르펜스를 쳐다보았다. 녀석이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거리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휴마누스를 벌레 보듯 노려보았다.
"세상에 해도 될 말이 있고, 해선 안 될 말이 있습니다. 지금 어린애한테 그, 그런···! 휴마누스는 대체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는 겁니까? 어렸을 때부터 발랑 까져서는 세르펜스에게 이상한 지식을 주입하더니, 이제는 하다 하다···."
"진정하고 잘 생각해 봐! 세르펜스 나이면 그리 어린 나이도 아니고, 고위 귀족인 데다가 후계자도 아닌 가주잖아? 성검만 아니었어도 진작 결혼해서 후사를···."
"녀석의 얼굴을 똑바로 보고도 어디 그런 말이 나오나 봅시다!"
나는 그렇게 외치며 손가락으로 세르펜스를 가리켰다.
세르펜스가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라고 말하는 듯, 맑고 순수한 눈망울을 초롱초롱 빛내며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 모습을 본 휴마누스는···.
"어, 그게···, 그러니까. 세르펜스 네가 말이지···? 네가······. 내가 미안해. 잘못했어."
죄악감을 느끼며 무너져내렸다.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은 채, 고개를 숙이고 쭈그려 앉은 그 모습이 무척이나 초라해 보인다. 그래도 휴마누스를 일으켜 줄 생각 따윈 없다.
나니까 이렇게 말로 끝내는 거지, 윈스톤이었으면 대뜸 검부터 휘둘렀을 게 분명하다.
경멸의 눈초리로 휴마누스의 뒤통수를 내려다보며 한참을 씩씩거리던 그때.
{저···, 그 방법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성검의 주인이 순결해야 한다는 건 교단의 성직자들이 그러하기에, 성검의 주인도 그래야 한다는 인식이 생겼을 뿐입니다.}
세계수가 얼떨떨하다는 목소리로 이 세상의 숨겨진 진실을 꺼냈다.
죄악감에 시달리던 휴마누스가 고개를 번쩍 들어 올리고, 흔들리는 눈동자로 세계수를 올려다보았다.
선택의 날.
많은 이들에게 둘러싸여 격려의 말을 듣던 그때의 기억이라도 떠오른 것일까?
휴마누스의 얼굴에 억울함이 차올랐다.
나는 혀를 쯧쯧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어쨌든 휴마누스가 제시한 방법은 소용이 없다는 게 밝혀졌으니, 제가 말한 대로 성검에게 아부를···."
{성검이 두 분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는 건, 호감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말하는 도중에 세계수가 끼어들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원인을 알아야 하는 법이다. 나는 휴마누스에게서 관심을 끄고 세계수를 바라보았다.
"그럼 대체 왜 그러는 거래요?"
{여러분도 보셨지 않습니까. 세르펜스가 성검을 잡았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 말을 듣자마자 말문이 턱 막혀왔다.
그러고 보면 세계수는 성검과 더 강하게 연결된 건 세르펜스라고 말했다.
휴마누스는 성검을 들고 다녀도 괜찮고, 세르펜스는 그렇지 않은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인 걸까?
"설마 휴마누스가 유일한 성검의 주인이 되면, 세르펜스가 그랬던 것처럼 이전 회차의 자아가 튀어나오는 겁니까?"
{성검의 주인이 된다는 건, 신의 영혼 조각이기도 한 성검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신의 힘으로 왜곡된 현상의 영향에서 벗어날 테지요. 저와 성검의 경우에는 신의 영혼 조각으로부터 파생된 존재이기에 기억뿐만이 아니라, 이전 회차에서 입었던 피해까지 고스란히···.}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던 후유증일까? 아니면 원래 말이 많았던 걸까?
세계수가 주절주절, 설명을 참 길게도 늘어놓았다.
역대 성검의 주인에게 조언해 준 건, 세계수가 수다를 떨고 싶어서 그랬던 게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떠올랐다.
"결론만 말씀해 주세요."
{성검의 주인이라면, 이전 회차들과 현재의 기억 및 자아가 통합되는 수준일 겁니다. 하지만 세르펜스는 온전한 성검의 주인이 아니기에 한 번 더 완화되어, 다른 회차의 자아가 의식의 수면 위로 잠시 떠 오른 것에 그친 게 아닐까 합니다.}
"뭐, 그런 씨···입···!"
나는 내 입을 막으려 다가오는 세르펜스를 향해 손바닥을 펴 보이며,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억눌렀다.
그러니까 지금 하마터면 우리 집 애가 '성검펜스+타락펜스+현재펜스'의 결과물이 될 뻔했다는 건가?
정신이 아득하다.
{그런 이유로 조언하건대, 이 상태를 유지하는 쪽을 추천합니다.}
이 말을 좋게 해석하면 지금이 최선이라는 뜻이고, 나쁘게 해석하면 이 상태로 어떻게든 잘 해보라는 소리였다.
어처구니를 잃고 멍하니 서 있는데, 세계수가 또다시 조언이랍시고 이상한 말을 내뱉었다.
{정히 누군가를 온전한 성검의 주인으로 삼아야겠다면, 그건 세르펜스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 와서 세르펜스에게 성검을 다시 쥐여 주라니? 요즘 나무는 멍멍하고 개처럼 짖을 줄도 아는가 보다.
'아차, 세계수는 오래된 나무였지?'
그럼 옛날에는 나무가 멍멍하고 짖었나 보다.
지금 세르펜스가 성검의 주인이 되어버린다면, 세르펜스만 고생하는 게 아니다.
'남들 앞에서 성검의 선택을 받았던 휴마누스는 대체 뭐가 되겠어?'
사정을 모르는 이들의 눈에는 휴마누스에게 결격 사유가 생겨, 그 자격을 박탈당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휴마누스는 성검의 주인이 아니더라도 제국의 후계자였고, 그런 그를 욕되게 할 기회를 악숭이들이 놓칠 리가 없다.
'대체 왜? 성검을 제외하고 보면 세르펜스가 월등히 더 강하니까? 기왕 성검의 힘을 온전히 끌어낼 거면, 최대 효율을 뽑아내는 선택을 하라는 건가?'
앞서 현상 유지를 추천한 것도 의심스러워졌다.
현 상태를 유지하면, 여차했을 때 성검펜스의 힘을 빌릴 수 있을 테니. 그런 계산이 밑받침된 말이 아니었을까?
"그런 이유는 아닐 겁니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세르펜스와 눈이 마주쳤다.
"혹시 제가 실수로 생각을 내뱉기라도 한 겁니까?"
"그런 건 아니나 시온이 표정으로 세계수 님을 욕하고 있길래···."
간단하게 말하자면, 넘겨짚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복잡하게 풀어 설명하자면, '선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한 건 아니지만, 내가 추측한 바에 의하면 세계수가 욕먹을 발언을 한 건 아닌 것 같다.'라는 뜻이었다.
"그럼 세르펜스는 세계수가 어떤 의도로 그런 말을 했다고 생각한 건데요?"
"당신이 알고 있는 끝은 그나마 행복한 방향으로 각색된 것이잖습니까. 2회차의 휴마누스는 저를 용서하지 못하고, 필시 죽이려 할 겁니다. 반면에 저는 휴마누스에게 살의나 악의를 품고 그런 죄를 저지른 건 아닐 테니···. 그리고 당신도 있으니까 어떻게든 제어할 수 있을 겁니다."
각색. 잠시 잊고 있었다.
세르펜스의 말도 일리가 있다.
세계수는 성검을 통해 정보를 전달받았으니, 각색되지 않은 진짜 2회차의 결말도 알게 되었을 테니까.
{각색이라···. 그렇군요, 그럴 만도 하죠.}
세계수의 목소리에 나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2회차의 진짜 결말이 대체 어떻길래. 각색이라는 표현에 의문을 품는 대신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어쨌든, 세르펜스의 말은 일부 맞습니다.}
"어느 부분이 맞는 건데요?"
{그대라면 세르펜스의 상처를 보듬을 수 있다는 부분에 동의합니다. 성검을 통해 정보를 받아들이고 나니, 정말 그대가 대단하게 보이는군요.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사람을 이렇게나 변화시킬 수 있는지. 그리고 그 변화로부터 시작된 가지가 뻗어 나가, 세상을 이다지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고 있다는 게 무척이나 놀랍습니다.}
내 물음에 세계수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세르펜스 한 사람에 관한 얘기라면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갈 수 있겠는데, 그 범위가 '세상'에 다다르니 부담스럽기 짝이 없다.
거기다 빠른 템포의 호들갑스러운 세계수의 말투도 부담을 더했다.
사람도 아니고 거대한 나무에게 이런 찬사를 받다니.
왠지 모를 민망함에 나는 쑥스럽게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조금 대단하긴 하죠."
"네, 당신은 정말 대단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선우는 정말 대단해요.}
"······."
"······."
나와 세르펜스는 말없이 세계수를 바라보았다.
분명 조금 전에는 나를 '시온'이라 불렀었는데, 어째서 갑자기···.
{성검의 정보에 의하면 그대는 다른 세상에서 온 영혼으로, 본래 이름은 '선우'라고 하기에 그리 불러드렸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지요?}
세계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투로 질문했다.
문제는 없었지만, 성검을 통해 내 개인 정보가 빠져나갔다니 기분이 요상하기는 했다.
만약 내가 쓴 세르펜스의 육아일기를 제삼자가 읽는다면, 세르펜스가 이런 기분을 느끼지 않을까?
아무튼 나는 시온이라는 이름에 연연하지도 않고, 본명으로 불리는 쪽을 더 선호했다.
따라서 세계수가 나를 본명으로 불러도 아무 상관없다.
그에 불편함을 느끼는 건 내가 아닌 세르펜스였다.
"선우가 다른 세상의 존재라는 건, 다른 이들에게는 비밀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르펜스도 제 앞에서는 편하게 선우에게 말을 놓으셔도 됩니다.}
"······."
세르펜스가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며 애써 미소 지었다.
나와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가 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얘기를 이어가겠습니다.}
"아, 네. 그러세요."
{성검의 정보에 따르면, 세르펜스는 2회차에서 성검과 자주 접촉하였습니다. 분명 그 또한 1회차의 기억을 떠올렸을 테지요. 그것도 상당히 많은 부분을 말입니다. 그렇기에 자아가 합쳐졌을 때의 부작용도 훨씬 적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세계수도 다 생각이 있어서, 한쪽을 성검의 주인으로 고른다면 세르펜스가 낫다고 말한 거였나 보다.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속으로 욕설을 퍼부어 댄 게 미안해졌다.
그래도 처음부터 그런 말 자체를 꺼내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뻔했다.
"옛날 나무들은 개처럼 짖는 거냐고 속으로 욕해서 죄송합니다."
{···사과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슨 욕을 했는지까지는 말씀해 주시지 않았더라면, 지금보다 더 감사했을 겁니다.}
나는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을 세계수에게 고스란히 돌려주는 것에 성공했다.
그리하여 생겨난 것은 만족감이 아닌 어색함이었다.
"다른 회차의 기억을 보는 것으로 부작용을 줄일 수 있다는 건···. 혹시 기억을 전부 보고 난 뒤에 온전한 성검의 주인이 되면, 현재의 제 자아를 지킬 수 있습니까?"
어색한 공기를 뚫고 목소리를 낸 건, 아까부터 조용히 있던 휴마누스였다.
{어디까지나 예상이 그렇다는 얘기였습니다. 이런 상황은 대륙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인지라···.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휴마누스에게는 추천해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절대 세르펜스를 해치지 않을 겁니다. 2회차에서 제가 그를 적대하긴 했지만, 그래도 1회차에서는 그에게 미안함을 느꼈으니···."
{그렇기 때문입니다. 2회차에서 그대가 친우의 목숨을 끊어, 온전한 성검의 주인이 되어버린 순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버렸으니까요.}
이런 미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