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625화 (625/925)

625회

74. 공작님과 세계수 (14)

* * *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하고 울려 퍼지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뒤늦게 긴장감이 밀려들었다.

내가 심호흡을 하며 두근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는 것보다 빠르게 유지스가 문을 열었다.

"세르펜스? 어쩐 일이에요? 그것도 혼자서···."

기척을 통해 선우가 없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텐데도, 유지스는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믿지 못할 만큼, 내가 혼자 찾아온 것이 의외였나 보다.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십니까?"

"물론이죠! 들어오세요."

유지스가 흔쾌히 대답하고는 내가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나는 안으로 들어서며 무심결에 방 내부를 둘러보았다.

살아있는 나무로 이루어진 갈색 벽에 담쟁이덩굴이 달라붙어 싱그러운 녹색을 더했다.

그 탓에 흡사 숲 한복판에 가구를 놓은 듯 보였고, 그러면서도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나와 선우가 배정받은 손님용 방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는 묘한 온기가 감돌았다.

누군가가 생활하고 관리하다 보면 자연스레 배어나는. 그런 따스함이 느껴졌다.

이 방의 주인이 오랫동안 이곳을 떠나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려 본다면, 무척이나 이상한 일이다.

"이쪽에 앉으세요."

유지스가 쿡쿡, 낮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자리를 권했다.

예고 없이 방에 찾아온 것만으로도 모자라 방을 관찰하다니. 결례를 저질렀다는 생각에 면구스러워,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죄송합니다."

"겨우 방 안을 둘러본 것뿐인데 죄송하기는요. 그런 거로 사과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렇···습니까?"

"그럼요!"

유지스는 개의치 않다는 듯 웃었다.

그러고는 되려 방을 둘러본 소감이 어떠하냐는 질문을 던졌다.

"따스하면서도 생기가 넘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유지스처럼···."

갑자기 유지스가 양 주먹을 불끈 말아쥔 채로 눈을 꼭 감는 둥, 영문 모를 행동을 했다.

그 행동에 놀라 나도 모르게 말을 멈추고 말았다.

"조, 좋네요! 특히 마지막 감상이 마음에 들었어요! 그게, 방이 방 주인을 닮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니까요!"

잠시 후 눈을 뜬 유지스가 귀를 쫑긋거리며 말했다.

변명처럼 이유를 덧붙인 것도 그렇고 어째서인지 부끄러워하는 것 같다.

"아차! 방에 찾아온 사람에게 차도 안 내오고, 나도 참 뭐 하는 짓이람?"

유지스가 불쑥 혼잣말을 내뱉고는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주전자에 물을 채웠다.

괜찮다고 얘기할까 했지만,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모습이 즐거워 보여서 그냥 지켜보기로 했다.

불현듯 그녀와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선우의 말에 따르자면, 당시에 유지스가 나를 향해 쏟아낸 거친 언사는 호의를 표현한 것이라 하였다.

그때는 믿지 못했지만.

유지스를 알게 된 지금은 그 말이 사실임을 안다.

'그러고 보면 유지스는 그때의 일을 사과한 이후로 단 한 번도 그런 표현을 쓴 적이 없군.'

새삼, 그녀도 많이 변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변한 건 유지스뿐만이 아니지.'

윈스톤과 휴마누스. 그리고 바스툴 왕국의 새로운 국왕 또한 참 많이 변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많은 변화가 있었던 건 바로 나 자신이다.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경악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무진히 많이도 변하였다.

'선우가 이 세상에 온 날을 기점으로···.'

이제는 변하기 이전의. 선우가 없는 예전의 삶이 너무나도 까마득한 옛날의 것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그는 자연스레 스며들어,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될 삶의 일부가 되었다.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지금의 삶은 선우가 닦아낸 기틀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가 언제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때마다, 나는 불안정하게 휘청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끝까지 함께해 주기로 약속했으니까.'

나는 그를 믿기로 했다.

"오래 기다렸죠?"

유지스가 내 앞에 따뜻함이 가득 담긴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노랗고 투명한 액체 속에 잠긴, 둥근 형태로 얇게 저며 썬 유자가 어딘지 모르게 태양과 닮아 보였다.

"아닙니다. 불쑥 찾아온 것도 죄송한데 이렇게 차까지 대접해 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 식으로 예의 차리지 않으셔도 돼요, 우리 사이에···. 그렇죠?"

유지스가 그렇게 말하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우리 사이에 과도한 겉치레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 깊은 곳에서 만족감이 피어올랐다. 자연스럽게 입가가 말려 올라갔다.

'그런데 저 눈짓의 의미는···.'

동의하면 똑같이 한쪽 눈을 깜박여 신호를 보내라는 뜻인가 싶어, 그렇게 했다.

그러자 유지스가 부들부들 떨더니 몸을 배배 꼬기 시작했다.

자주는 아니나 이따금 있는 일이다.

그간의 경험을 통해, 유지스가 저런 행동을 보일 때는 가만히 기다리면 해결된다는 것을 익혔다.

나는 조용히 유자차를 마시며, 유지스가 진정되길 기다렸다.

"후우···! 죄송해요. 그래서 무슨 일로 찾아오셨다고 하셨죠? 아, 아니. 아직 아무 얘기도 안 하셨던가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유지스가 자리에 앉으며 태연하게 질문했다.

"오늘 제가 유지스를 찾아온 데에는 두 가지 용건이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으음···."

충분히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말을 하려니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망설여서가 아니라 긴장한 탓이다.

그래서 나는 곧장 세례명을 말하는 대신, 질문을 건넸다.

"유지스는 세례명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네, 네?! 세례명이요?!"

유지스가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고,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한 것인지 유지스의 얼굴 근육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면서도 두 눈은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이, 이건 그러니까···. 세르펜스의 세례명을 듣기 위한 자격 심사 같은 건가요?"

"그런 거 아니니, 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유지스는 가볍게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그녀의 입이 열린 건, 내가 달곰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유자차를 두 모금째 머금었을 때였다.

"특별한 이름이죠. 신 룩스메아 님께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특별하지만, 그런 이유가 아니라···.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며 조심스럽게 대하고 특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세례명을 더욱 특별한 것으로 만든다고 생각해요."

특별한 것이라서 특별한 것이 아닌, 특별하게 대해서 특별해진 것.

그게 세례명에 관한 유지스의 견해였다.

"세르펜스는 세례명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내가 던졌던 질문이 고스란히 내게 돌아왔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나는 순간 당황했다. 반사적으로 잘 모르겠다고 대답할 수도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그래선 안 된다.

유지스가 진지하게 고민하여 대답해 주었으니까. 나 또한 그래야만 한다.

"한때는 포장지로 잘 감싸진 선물 상자를 보듯, 기대를 품고 그것을 대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기대는 의심이 되었고, 오래지 않아 실망으로 변했습니다. 신께서 무슨 의도로 제게 이런 세례명을 내리신 건지 알 수가 없어 괴로웠습니다."

따뜻함과 달콤함이 가득한 잔을 양손으로 감싸 잡으니, 손바닥을 타고 온기가 전해졌다. 달고 새콤한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그래서인지 말이 조금 더 쉽게 나오는 듯했다.

"그도 그러할 게, 그 이름 속에 담긴 뜻은 제 삶 속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인지라···. 세례명을 받은 제가 그러했듯. 혹은···, 저의 부모님···처럼. 신께서도 제게 기대를 품으셨다가 의심을 거쳐, 결국 실망하셨을 것 같아서···. 두려웠습니다."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유자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약간의 점성을 띤 액체가 입안과 혀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듯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나서도 입안 가득 단내가 진동했다.

어린 시절에는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감각이, 질척하게 들러붙는 과거의 잔재를 밀어냈다.

"제 세례명을 떠올릴 때마다, 그분들이 저의 존재를 부정하고 후회하는 것처럼 느껴졌기에···.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했고, 잊으려 애썼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항상 제 이름 한가운데에 박혀, 항시 존재감을 드러낸 탓에 그러지 못했습니다."

긴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유지스는 나와 시선을 맞춘 채, 조용히 귀를 기울여 주었다.

"지금은 아닌 거죠?"

"네.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선우에게 내 세례명을 알린 건, 반쯤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그가 본명을 포함하여 자기 자신의 비밀을 밝혔으니, 나도 무언가 되돌려 주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침 아무도 모르는 이름이라는 점에서 선우의 본명과 대응되기도 했고.

마침 그가 궁금해하기도 했고.

마침···. 그냥 그러고 싶었다.

"처음 선우에게 그 이름으로 불렸을 때는 무척이나 낯설었습니다. 그런데 불리면 불릴수록, 점차 제 안에서 그 이름이 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아서···. 신기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렇기에 그 이름을 제가 잊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하고, 그렇게 불릴 수 있어서 기쁩니다."

과거의 고민을 늘어놓은 뒤에 이런 얘기를 하니, 어쩐지 쑥스러워졌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곧바로 얘기를 덧붙였다.

"제 세례명은 '아도르'입니다. 유지스도···. 간혹가다 한 번씩, 저를 그렇게 불러 주셨으면 합니다."

"아, 아···!"

유지스가 또다시 이상 행동을 보였다.

팔꿈치를 테이블에 올린 채, 등을 둥글게 말고 양손으로 자신의 귀를 붙잡는 건 선우조차 하지 않을 기행이었다.

"그런 얘기를, 그런 표정으로···! 아으···!"

그렇게 중얼거리는 유지스의 표정에는 번뇌가 가득했다.

도대체 내 표정이 어땠길래 저러는 건지 모르겠다.

'과거 선우의 눈을 가릴 게 아니라, 지금 유지스의 눈을 가렸어야 했나?'

얼굴을 매만지며 고민을 해 보았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유지스가 진정한 건 내가 잔을 모두 비우고 난 뒤였다.

"죄송해요, 이상한 모습을 보여서···."

"익숙하니 괜찮습니다."

"······."

내 대답을 들은 유지스의 얼굴에 옅은 자괴감이 피어났다.

걱정스러웠으나 그 부분을 언급하면 그녀가 더 괴로워할 것 같아서 모르는 체했다.

"참! 저는 세례명이 없으니까, 이거라도 드릴게요."

돌연 유지스가 양손을 목 뒤로 올리며 말했다. 옷 안쪽으로 가느다란 은색 줄이 반짝였다.

유지스의 손이 목걸이의 잠금쇠를 끌렀고, 옷에 가려졌던 나머지 부분이 모습을 드러냈다.

목걸이 줄에 걸린 것은 펜던트가 아닌 반지였다.

눈에 익은 물건이다.

"그건, 조모님께서 남겨주신 유품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맞아요."

"소중한 물건인 줄 알았는데···."

"그러니까 되찾으려고 노력했죠."

"그런 걸 제게 주셔도 되는 겁니까···?"

"세르···. 아도르니까 주는 거예요."

유지스가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문득 방안에 가득 퍼진, 달콤한 꿀과 상큼한 유자 내음이 그녀의 미소에서 비롯된 것처럼 느껴졌다.

'정말로 받아도 되는 건가···?'

저 반지는 유지스가 '세계수의 맹세'라는 위험을 무릅쓸 정도로, 소중하게 여기는 물건이다.

단순히 소중한 것을 넘어, 여러 추억이 담겨 있을 테다. 그런 것을 감히 내가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다.

작고 가벼운 반지가 무척이나 무거워 보였다. 내겐 너무 과분했다.

내가 머뭇거리자, 유지스가 내게 손을 뻗었다.

그 손을 피하는 건 무척이나 쉬운 일이다.

하지만 나는 마지못한 척 그녀에게 손을 내어주었고, 그녀의 손이 힘을 가하는 대로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손바닥 위에 목걸이 줄이 달린 반지를 올려둔 채로.

손가락이 모두 접히고 나서야 유지스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나는 살짝 손가락에 힘을 풀고, 손아귀에서 반짝이는 반지의 모습을 확인했다. 다시 손가락을 접고, 반대 손으로 반지를 쥔 손을 감싸 쥐었다.

그제야 내가 유지스에게 큰 의미가 있는 이 물건을 받고 싶어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감사합니다, 유지스. 항상 몸에 지니며 소중히 여기겠습니다."

"······."

유지스가 나를 지그시 노려보듯 쳐다보다가 자신의 잔을 단숨에 비워냈다.

그러고는 무척이나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도르···는 점점 더 세례명을 닮아가네요."

난해한 말이다.

그 속에 담긴 뜻을 이해할 수 없으니, 답변 또한 할 수 없었다.

나는 유지스와 시선을 맞추고 눈을 깜박였다.

"···그건 그렇고, 세례명 말고 다른 용건은 무엇인가요?"

유지스는 자신의 말을 해석해 주는 대신, 말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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