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626화 (626/925)

626회

74. 공작님과 세계수 (15)

* * *

휴마누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향했다.

그사이 나와 윈스톤은 무구 손질을 마무리 짓고 주변을 정리했다.

"잘 다녀왔어?"

"···네."

반가움이 가득한 휴마누스의 모습에 당황한 것일까?

세르펜스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문 앞에 선 휴마누스를 슬쩍 피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무슨 일 있었냐고 묻는 듯한 시선을 내게 보냈다.

"세르펜스가 유지스에게 세례명을 말하고 왔으니까, 다음은 자기 차례라고 생각하나 봐요."

"······."

내 대답을 들은 세르펜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휴마누스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옆에서 지켜보는 내가 다 부담스러운 시선이다.

"그, 그런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래서 반긴 건 아니고···."

휴마누스가 머쓱해 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자신이 김칫국을 들이켰다는 걸 알긴 아는가 보다.

세르펜스는 그런 휴마누스를 관찰하듯 살펴보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보다 문 좀 닫아주십시오."

"응? 바로 선우를 데리고 돌아가려는 거 아니었어?"

의문을 표하면서도 휴마누스는 세르펜스가 시키는 대로 문을 닫았다.

나도 휴마누스와 똑같이 생각했기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당연히 우리 방으로 이동해서, 유지스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게 자랑하듯 떠들 줄 알았는데.

'이 녀석···, 자신의 성장 발표회를 여기서 할 생각인가?'

에이. 설마하니 그러려고.

아무리 우쭈쭈해 주는 사람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지만, 녀석이 우쭈쭈 받고 싶은 사람 목록에 휴마누스가 있을 턱이 없다.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방금 떠올린 생각을 저 멀리 날려버렸다.

그리고 급식 시간 종 치기 5분 전 상황처럼, 몸을 반쯤 틀고 한쪽 다리를 테이블 밖으로 뻗은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았다.

휴마누스도 조금 전까지 자신이 앉아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방 안에 있던 의자는 두 개뿐이고, 나와 휴마누스가 각자 하나씩 차지하고 앉았으니.

세르펜스는 제가 무슨 보좌관이라도 된 양 내 뒤에 자리를 잡고 섰다.

"잠깐만요, 의자 꺼내드릴게요."

"오래 있을 생각은 없으니 괜찮다."

내가 웃옷 안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말하자 세르펜스가 고개를 저으며 사양했다.

방구석에 뻘쭘하게 서 있는 윈스톤을 생각해서라도 녀석이 앉아줬으면 했지만, 세르펜스 본인의 의사가 그렇다는데 어쩌겠는가.

나는 손에 잡힌 아공간 주머니를 놓고 빈손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나한테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

휴마누스의 물음에 세르펜스는 으음 하고 침음을 흘리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한참을 뜸 들인 끝에 녀석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본의는 아니지만···. 제가 일방적으로 휴마누스의 세례명을 알게 되었잖습니까?"

"응, 그렇지···."

휴마누스가 떨떠름하게 대답하며 나를 흘겨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알 바가 아니다.

지금 내가 신경 쓰이는 건 휴마눈새의 시선 따위가 아니라, 세르펜스가 내뱉은 의미심장한 서론이다.

'어라? 설마, 진짜야? 김칫국이 아니었어?'

나는 놀란 표정으로 세르펜스를 바라보았다.

휴마누스는 내게 리에나의 세례명을 들은 뒤, 미안한 마음에 동료들에게 자신의 세례명을 밝혔다고 했다.

세르펜스도 그 사연을 들었다.

물론 녀석이 휴마누스를 생판 남이라고 생각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현재, 세르펜스는 휴마누스를 친구로 받아들였다. 그것도 몹시 가까운.

생각을 하면 할수록, 세르펜스가 휴마누스에게 세례명을 밝히려 한다는 추측이 확신으로 굳어졌다.

"바로 얘기해도 괜찮은 겁니까? 저는 당연히 얼마간 텀을 둘 거라고 생각했는데···. 유지스가 서운해하지 않을까요?"

"그러잖아도 미리 말하고 온 참이다."

"뭐래요?"

"괜찮으니, 내가 원하는 대로 하라더군."

세르펜스가 당당하게 대답했다.

유지스가 그렇게 말했다면야. 나도 세르펜스의 결정을 응원해 주기로 했다.

"저는 잠시 나가 있겠습니다."

방구석에 처박혀있던 윈스톤이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넌지시 말했다. 자신이 낄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나가려는 그를 저지한 건 세르펜스였다.

"윈스톤 경도 함께 들어주십시오."

"저도···, 말입니까?"

"네."

세르펜스가 살포시 미소 지으며 긍정했다.

윈스톤이 돌처럼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채 쭈뼛쭈뼛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휴마누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저기···. 나 지금 괜한 기대하는 거 아니지?"

놀랍게도 휴마누스 또한 세르펜스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아챈 듯했다. 그다지 확신은 없어 보였지만 말이다.

그리고 나는 눈앞의 상황을 두고 '놀랍게도'를 붙여야 하는 현실에 통탄했다.

"아닙니다."

"내가 기대하는 그게 아니라는 거야, 내가 괜한 기대를 하는 게 아니라는 거야?"

"휴마누스···. 제 세례명을 들을 준비가 안 되었다면 잠깐 나가 주시겠습니까?"

"아니! 싫어! 지금 들을래!"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이면 쫓겨날세라. 휴마누스가 다급히 소리쳤다.

그런 휴마누스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 세르펜스가 나직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리는 게 느껴졌다.

"제 세례명은 '아도르'입니다."

휴마누스와 윈스톤. 두 사람과 두루 눈을 마주치며, 세르펜스가 느릿하되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자신의 세례명을 밝혔다.

"감사합니다. ···세르펜스 님의 그 소중한 이름은 이 가슴과 이 머리에 새겨두겠습니다."

윈스톤이 주먹으로 제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듬직한 모습과는 다르게 고리타분한 대사다. 세례명이 아니라 명령을 받드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드디어 세르펜스의 이름을 실수 없이 한 번에 제대로 불렀으니. 그 사실에 가산점을 주고 싶다.

"듣기만 해도 애정이 넘치는 이름이네! 내 세례명은 이미 알고 있지?"

휴마누스는 들뜬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만면에 웃음을 가득 머금으며 대놓고 기뻐했다.

이 자리에 윈스톤만 없었어도, 세르펜스에게 자신의 세례명을 다시 한번 각인시키려 들지 않았을까 싶다.

"아도르···, 한 번 불러봐도 되지? 아까 세례명으로 불리는 게 좋다고 했으니까."

휴마누스가 은근슬쩍 세르펜스의 세례명을 불러놓고 사후 허락을 받으려 들었다.

그 괘씸한 행동에 돌아온 세르펜스의 반응은 정색이었다.

"휴마누스에게 불리는 게 좋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어?"

"농담이었습니다. 가끔은 불러도 좋습니다. 윈스톤 경께서도 그건 마찬가지입니다."

이어진 세르펜스의 말에 휴마누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싱글벙글한 얼굴로 돌아왔다.

반대로 윈스톤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어떻게'와 '감히'를 번갈아 중얼거렸다.

이제 막 이름 부르기에 적응을 시작했는데, 갑자기 던져진 '세례명 부르기'라는 새로운 과제에 아득해진 모양이다.

그래도 얼굴에 희색이 도는 거로 보아 기쁘긴 한가 보다.

"그런데 저는 세례명 대신 드릴 만한 게 없어서···."

"윈스톤 경은 이미 제게 충성을 바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그거로 충분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윈스톤이 감격스러운 마음을 억누르는 듯, 잠긴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만약 그가 충성 서약을 다시 하지 않았다면.

하다못해 그게 어제가 아닌 일주일 전만 되었더라면, 오늘 또 하지 않았을까 싶다.

'내가 윈스톤이라면 지금 엄청 아쉬워하고 있겠지.'

지금이 충성 서약을 다시 할 최적의 타이밍인데, 그것도 모르고 조급하게 행동했다며 후회했으리라.

그렇다고 지금 윈스톤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었다.

'이럴 때야말로 선배인 내가 나서서 조언을 해 줘야지!'

나는 팔을 크게 흔들어 윈스톤의 이목을 끌어온 뒤. 입 모양으로 '세례명! 불러요!'라는 뜻을 전했다.

비록 윈스톤의 이목만 끌어온 게 아니라, 세르펜스와 휴마누스도 나를 쳐다보았지만.

그런 사소한 문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크, 크흠···! 아, 아도르···님. 그 믿음에 배신하지 않고, 평생토록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윈스톤이 몹시나 정중한 태도로 그리 말했다. 그를 바라보는 세르펜스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잘된 일이다.

"와아아~!"

나는 세르펜스의 보호자로서, 그를 축하해 주기 위해 환호성을 지르며 짝짝짝 손뼉 쳤다.

내 박수 세례를 받은 세르펜스가 뿌듯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용건도 끝났으니, 저희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세르펜스가 앉아있는 내 등을 툭툭 두드려 일어나라는 신호를 보내며 말했다.

오래 있을 생각은 없다더니, 처음부터 세례명만 말하고 갈 생각이었나 보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 흔들어 인사하자, 윈스톤은 살펴 가라는 말로 나와 세르펜스를 배웅했다.

그리고 휴마누스는.

"왜 따라와요?"

"나도 세르펜스에게 세례명을 들어야 할 거 아니야? 그래야 교환이 성립하지."

듣고 보니 그 말도 일리가 있다.

세르펜스는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 눈치였지만.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 휴마누스의 의견은 무척이나 타당했다.

결국 휴마누스는 나와 세르펜스가 배정받은 방까지 쫓아왔다. 그리고 세르펜스의 입에서 자신의 세례명이 나오게 하는 것에 성공했다.

"됐습니까, 브라이트? 이제 나가 주십시오."

내가 처음 세르펜스에게 '시온'으로 불렸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다.

세례명을 불리자마자 나가라는 말을 들었는데도, 휴마누스는 고개까지 젖히며 큰 소리로 웃어댔다.

'아까 세계수 앞에서, 내가 세례명으로 불렀을 땐 있는 대로 얼굴을 구겨놓고선···.'

차별 대우에 치사함을 느끼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었다.

열 살 때부터 세르펜스와 세례명을 교환하고 싶어 했다지 않는가.

현재 그의 나이 스물여섯.

살아온 세월의 절반을 훌쩍 넘는 세월 동안 벼르고 벼르던 숙원을 달성했으니, 저리도 기뻐할 만하다.

"으음···."

휴마누스가 너무 좋아하니, 되려 그를 쫓아내려 한 세르펜스가 무안해하며 침음을 흘렸다.

약간 미안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나갈 테니까, 푹 쉬고 내일 보자."

드디어 휴마누스가 '하하하' 말고 다른 소리를 냈다. 웃음은 멎었지만, 여전히 얼굴 가득 웃음기를 머금은 채다.

그 모습에 세르펜스가 피식, 작은 실소를 흘렸다.

"아 참! 선우 너, 내일이 진짜 생일이지? 생일 축하해!"

휴마누스가 문고리를 돌리려다가 갑자기 떠올랐다는 듯이 말했다.

그와 동시에 세르펜스의 얼굴에 슬그머니 자리 잡았던 즐거움이 사라지고, 사색이 깃들었다.

"휴마누스가, 그걸 어떻···게···?"

"어제 선우가 이력서인지 뭔지 쓸 때, 내가 같이 있었잖아. 그때 슬쩍 봤지."

"······."

"왜? 다 같이 축하하면 좋잖아!"

눈치 없는 휴마누스의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세르펜스의 얼굴이 울상으로 변했다.

"그래도···. 제가 가장 먼저 축하한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누가 먼저 축하하면 어때? 순서가 뭐가 중요하다고."

휴마누스는 눈치만 없는 게 아니라 무신경하기까지 했다.

나름대로 세르펜스를 달랜답시고 말하는 것 같은데, 저런다고 달래질 리가 있나. 더 울리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세르펜스, 뚝! 아직 열두 시 안 지났어요. 그러니까 저건 무효입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정말로···?"

"정말이고말고요!"

나는 문을 열고 휴마누스를 복도로 밀어내는 한편, 열심히 입을 놀려 세르펜스를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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