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627화 (627/925)

627회

74. 공작님과 세계수 (16)

- 쾅!

무사히 방문이 닫혔다.

반쯤은 휴마누스가 제 발로 걸어 나간 것에 가까웠지만, 어찌어찌 그를 내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제 남은 건 속상해하는 세르펜스를 마저 달래는 일뿐이다.

이건 휴마누스를 방 밖으로 밀어내기보다 더 쉬웠다. 즐거운 일을 떠올리게 하면 되니까.

마침 적당한 주제도 있었다.

나는 세르펜스를 의자에 앉히고 질문했다.

"그건 그렇고, 유지스한테 세례명 말하고 온 거죠? 반응 어땠어요?"

"양손으로 귀를 붙잡고 상체를 둥글게 말았다."

"······."

유지스는 대체 뭘 한 걸까?

모르겠다. 이상한 사람 같다.

나는 유지스를 이해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세례명을 알려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이런 걸 받았다."

세르펜스가 손가락을 목깃 안쪽으로 넣어 가느다란 은색 체인 줄을 빼냈다.

그러고는 맞은편에 앉은 내게 잘 보이도록 테이블에 반쯤 기대듯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아까 윈스톤도 세례명을 대신하여 드릴 것이 없다는 소리를 했었지? 세례명이 없는 사람은 그것을 대신할 무언가를 선물로 주는 건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세르펜스가 내 쪽으로 내민 무언가를 잡았다.

그리고 만지작거리며 요리조리 살폈다. 목걸이 줄에 걸린 그것은 아무리 봐도 반지였다.

"이거···, 반지네요?"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혹시 유지스가 이것과 비슷한 디자인의 반지를 하나 더 가지고 있던가요?"

"음···. 그렇지는 않을 거다."

세르펜스가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건 왜 묻냐는 세르펜스의 질문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해준 뒤 마음 놓고 반지를 구경했다.

백금으로 된 몸체는 두 가닥의 잎줄기가 꼬여있는 형태로, 그 중앙에는 청록색 보석이 박혀 있었다.

디자인이 살짝 여성용 같긴 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남자 귀족들도 화려한 디자인의 반지를 왕왕 끼고 다녔다.

게다가 세르펜스는 워낙 예쁘장하게 생긴지라, 뭘 껴도 어울릴 테다.

나는 반지와 세르펜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냥 어울리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 찰떡이다.

언젠가 세르펜스에게 주면서 프러포즈라도 할 생각으로, 유지스가 미리 맞춰둔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반지의 크기가 꽤 작았다.

굳이 세르펜스의 손가락에 끼워보지 않아도 맞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거, 세르펜스가 끼기에는 좀 작을 것 같은데요?"

"유지스가 조모님께 물려받은 반지라 하니, 그럴 수밖에."

"아하! 가뜩이나 엘프는 뼈대가 얇은데, 원래 여성이 끼던 거였으니 작은 것도 당연하겠네요."

다행히도 세르펜스에게 주려고 미리 맞춘 게 아니라, 그냥 유지스가 가지고 있던 물건이었나 보다.

'잠깐, 다행이 아니잖아?!'

나는 화들짝 놀라 반지에서 손을 떼어냈다.

이 반지를 직접 본 건 오늘이 처음이지만, 이 반지에 대한 언급은 예전에 들은 기억이 있다.

암흑가에서 유지스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노예상이 뺏어간 할머니의 유품을 찾아야 한다고 간절히 얘기했고, 세르펜스가 되찾아 주었다.

'그런 반지가 이제는 세르펜스의 것이 되었다니, 참···.'

세르펜스에게 반지 선물은 함부로 받으면 안 된다고 얘기해 줘야 하나 싶었지만, 마음이 바뀌었다.

저 반지는 세르펜스와도 인연이 있는 물건이니까.

'어차피 당장 낄 수도 없을 테고.'

사이즈의 문제가 아니다. 세르펜스의 손가락 둘레에 맞춰 수선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당분간은 검 쓸 일이 자주 생길 테니까.

녀석의 검이 한손검이라고는 하나, 간혹 왼손으로 암기 같은 걸 던지기도 한다. 그러니 손가락에 끼는 악세사리는 방해만 될 뿐이다.

"그보다 세례명만 알려주고 온 것치고는 꽤 늦은 것 같은데, 무슨 얘기를 그렇게 오래 한 겁니까?"

"그냥 세례명의 의미에 관해 의견을 나누고···. 그게 전부다. 대화 중간중간 유지스가 몸을 배배 꼬며 몸부림을 쳐서, 진정되길 기다리느라 늦어졌을 뿐이다."

"···이제 슬슬 씻고 잘 준비나 합시다."

유지스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서라도, 자세히 물어보는 건 피해야겠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가서 씻고 나왔다.

세르펜스는 유지스에게 받은 반지가 마음에 들었는지, 내가 나올 때까지 그것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아니···. 반지 자체가 마음에 들었다기보다는 의미 있는 물건을 받았다는 게 기쁜 거겠지.'

소중한 물건을 내어줬다는 건 그만큼 상대방이 소중한 사람이라는 뜻이니까.

세르펜스가 씻는 동안, 나는 공책을 꺼내 녀석의 성장을 써 내려갔다.

쓸 내용이 많다 보니 녀석이 욕실에서 나오고 나서도 한참을 더 적어야만 했다.

그러는 동안 세르펜스는 수건으로 긴 머리를 탈탈 털듯이 말리며, 계속 시계를 힐끔거렸다.

열두 시가 되자마자 내게 생일 축하 인사를 건넬 생각인가 보다. 아까처럼 새치기당하지 않도록.

참으로 어린애다운 깜찍한 발상이 아닐 수가 없다.

"생일 선물로 받고 싶은 건 없는가?"

내가 일기를 다 적고 모르는 척 침대에 눕자, 잠들지 말라는 듯 세르펜스가 말을 붙여왔다.

잠시 생각해 봤지만 떠오르는 건 없었다.

월급도 많이 받으니 어지간한 건 내 돈으로 살 수 있고, 어지간하지 않은 건 경비로 올리면 그만이다.

"딱히 생각나는 건 없는데···. 효도권이나 추가 발급받을까?"

"저번에 받아 간 것도 안 쓰고 있잖은가."

"효도권을 쓰게 하고 싶었다면 포도알 같은 건 닦아주지 말았어야죠."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다 해주는데 효도권이 대체 무슨 소용인가 싶다.

성직자 설정 놀이를 하면서 든 생각인데, 지금은 효도를 받는 것보다 과한 효도를 막는 게 더 급선무다.

"세르펜스가 주는 선물이라면 뭐든 좋으니까, 그냥 주고 싶은 거 주세요."

"그래도 기왕이면 선우에게 더 필요한 물건을 선물하고 싶다."

"제게 필요한 건 마음이 담긴 선물입니다.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어요. 세르펜스가 고민해서 준비한 거라면, 그게 무엇이든 저는 소중히 여길 겁니다."

"음···."

세르펜스가 침음을 흘리며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러는 사이 시계가 열두 시를 가리켰다.

"선우, 생일 축하한다."

"제 생일을 가장 먼저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키야~, 역시 세르펜스밖에 없어요!"

내가 과장되게 기뻐하자, 세르펜스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내게 고맙다고 말했다.

"미안하다. 결국 생일이 됐는데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군. 이제 다른 일행들도 선우의 정체를 알았으니, 공작저였다면 조촐하게나마 파티를 열었을 텐데···."

세르펜스가 씁쓸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어딘가 이상한 얘기다.

우리는 내일 세계수 아래에서 피크닉을 즐길 예정이다. 세계수를 만나고 왕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유지스에게 그 계획을 밝혔으니, 도시락도 걱정 없다.

'그러니까 파티를 못 한다고 아쉬워할 상황은 아니지 않아?'

이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다.

작년의 세르펜스는 내 생일이 되기 몇 주 전부터, 뭔가 필요한 물건이 없느냐고 집요하게 물어 왔다.

하지만 올해의 세르펜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탓에 휴마누스의 입을 통해 내 생일이 먼저 언급되는 참사가 벌어지고 말았다.

세르펜스가 내 생일을 까먹었을 리는 없다.

설령 그랬다면 가장 먼저 내 생일을 축하해 주고 싶었다며 서러워하지도 않았을 테지.

'이 녀석, 설마 깜짝 파티 같은 걸 준비하고 있었나?'

생일을 깜박했다거나, 바빠서 아무 준비도 못 했다거나.

그런 얘기는 깜짝 파티를 열기 전에 유구하게 쓰이는 밑밥 같은 거다.

촉이 왔지만, 나는 짐짓 아쉬운 척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쩔 수 없죠. 악숭이들 때문에 바빠 죽겠는데, 파티할 시간이 어딨겠어요? 그나마 전쟁터 한복판에서 생일을 맞이하지 않은 걸 다행이라 생각해야죠, 뭐."

"그래도 내 생일에는 케이크에 초를 꽂고 축하해 줄 거잖은가."

"당연하죠! 전쟁터가 다 뭐람? 마왕과 싸우는 도중에라도 세르펜스의 생일은 축하해야죠!"

"그건 좀···. 자제해 주었으면 한다."

마왕에게 생일 축하를 받는 건 싫은가 보다.

인정한다. 나 같아도 싫다.

"빨리 평화 시대가 도래했으면 좋겠군. 그때가 되면 작년과 올해, 제대로 축하해 주지 못한 만큼 한꺼번에 축하해 주겠다."

"아이고, 기특하기도 해라!"

"함께 축제를 즐기는 것도 좋겠지."

"와! 축제! 재밌겠네요! 그런데 제 생일에 맞춰 축제를 여는 지역이 있습니까?"

"내게 영지가 있다는 걸 잊은 건가?"

직접 축제를 열겠다는 소리다.

하마터면 깜짝 생일 파티가 아니라, 깜짝 탄신제를 선사받을 뻔했다.

악숭이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겠다.

세르펜스는 축제에서 호두과자도 팔고 싶다며, 내게 호두과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나는 더 이상 내 탄신제가 구체화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빨리 잠이나 잡시다. 내일 휴마누스랑 대련해야 하잖아요. 아무리 이길 자신이 넘쳐도, 최선의 몸 상태로 임하는 게 예의입니다."

"으음···, 알겠다."

드디어 세르펜스가 입 다물고 잠을 청했다.

* * *

오늘은 11월 4일. 이 세계로 와서 두 번째 맞이하는 내 생일이다.

아침 식사를 가볍게 먹은 뒤 우리는 룰루랄라 가벼운 발걸음으로 왕성을 나섰다.

생일 당일이 되었으니 휴마누스가 다시 한번 내 생일을 축하할 만도 하건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일행들에게 내 생일을 알리며, 다 같이 축하해 주자는 말조차도.

마치 하룻밤 만에 내 생일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이쯤 되면 깜짝 파티에 대한 내 추측은 기정사실로 보아도 무방했다.

'어제 유지스와 대화가 길어진 건 내 생일 파티 준비 때문이었나?'

휴마누스가 조용한 거로 보아, 어젯밤 유지스가 일행들 방을 돌며 계획을 공유했나 보다.

티가 나도 너무 나지만, 내게는 세르펜스의 동심을 지켜줘야 할 의무가 있다.

계속 모르는 척 딱 잡아떼야지.

"시온, 오늘따라 즐거워 보이네요?"

유지스가 넌지시 질문을 건넸다.

혹여 내가 깜짝 파티를 눈치챈 것이 아닐지 떠보는 걸 테다.

"피크닉 가는데 날씨가 좋으니 당연히 즐겁죠!"

"그건 그래요!"

짧은 대화가 끝나고.

세계수로 향하는 내내, 나는 머릿속으로 세르펜스가 만족할 만한 리액션을 구상했다.

빽빽한 나무숲에 들어선 뒤에는 발밑을 조심하느라 생각을 멈춰야 했지만.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안녕하세요! 놀러 왔어요!"

오늘도 세계수는 나뭇가지를 흔들며 우리를 반겨주었고, 나도 양팔을 크게 흔들며 같이 인사해 주었다.

미카엘은 길 안내만 해 주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피크닉이든 파티든 사람이 많을수록 좋은 법이지만, 세르펜스가 불편해할 게 뻔하여 붙잡지는 않았다.

{사도들이 매일 찾아오기도 하고 가끔은 엘프들이 상담을 위해 방문하기는 하지만, 놀러 온 적은 없었는데···. 기분이 새롭네요.}

세계수가 다시 한번 나뭇가지를 흔들며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순간,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눈이 가려지기 직전, 내가 마지막으로 본 장면은 세르펜스가 내 뒤에 선 윈스톤을 향해 눈짓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내 인생 최고의 연기를 펼쳐 보이리라 마음먹으며, 어리둥절한 척 입을 뗐다.

"어···, 윈스톤? 갑자기 뭐 하는 겁니까?"

"잠시만 이대로 있어 줘야겠소."

"뭐예요, 그 삼류 납치범 같은 멘트는?"

윈스톤의 어처구니없는 말 때문에, 연기할 것도 없이 얼떨떨한 목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러자 머리 위에서 윈스톤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민망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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