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630화 (630/925)

630회

74. 공작님과 세계수 (19)

나름대로 치열했던 지상전과 달리 공중전은 세르펜스가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다.

그렇기에 적당히 봐주는 것이 가능했고, 그 덕분에 큰 부상 없이 대련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무사히 대련을 마친 세르펜스가 우다다 달려와서, 나와 유지스 사이로 쏙 들어와 앉았다.

그러고는 금방이라도 '오늘 유치원에서 친구가 나 괴롭혔어, 히잉···.' 하고 우는소리를 늘어놓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 녀석의 얼굴을 마주하자 짠한 마음이 솟구쳐 올랐다.

나는 세르펜스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유지스가 나를 따라 은근슬쩍 세르펜스의 뒤통수를 매만지며 사리사욕을 채웠다.

"···맞은 건 난데, 왜 세르펜스 네가 위로를 받는 거야?"

세르펜스에게 신나게 얻어터지고 돌아온 휴마누스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공중전 연습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수도 없이 풀밭 위를 나뒹군 탓에, 그의 모습은 무척이나 꼬질꼬질했다.

하지만 불쌍하지는 않았다.

"휴마누스가 세르펜스에게 친구를 때리도록 강요했잖아요. 세르펜스가 얼마나 마음 여린 녀석인지 뻔히 알면서, 그런 짓을 해요?"

"때리도록 강요하다니? 그건 대련이었어."

"무슨 대련이 그렇게 살벌해요?"

"살벌하게 맞은 건 난데···."

휴마누스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끝을 흐렸다.

멋쩍어하는 그 행동으로 보아, 본인이 자초해서 처맞았다는 사실을 잘 파악하고 있긴 한가 보다.

"그건 그렇고···. 미안해, 선우야. 모처럼의 생일 파티인데 분위기를 망쳐버려서."

"됐어요. 휴마누스가 눈치 없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인가?"

"오늘은 반박할 말이 없네. 진짜 잘못했어, 미안."

눈치 없다는 말에도 저렇게 반응하는 걸 보면 진짜 미안한가 보다.

거듭 사과하며 저자세로 나오는 사람을 상대로 더 이상 화내기도 뭐하다.

"용서해 줄 테니까, 치료나 하세요."

"하하하, 고마워!"

휴마누스는 직접 자신의 상처를 돌보는 대신 리에나에게 가서 치료를 부탁했다.

세르펜스에게 처맞으면서 이미 신성력과 체력을 많이 소모한 까닭이리라.

리에나의 신성력 치료에 이어 아니마의 청결 마법까지 받고 나자, 휴마누스는 다시 말끔누스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세르펜스가 넌지시 휴마누스에게 말을 붙였다.

"이제 만족하셨습니까?"

"응?"

"제게 확실한 패배를 당하고 싶으셨던 것 아닙니까?"

"그럴 리가! 대체 누가 지는 걸 좋아하겠어? 기왕이면 대등하거나 이기길 바라지."

어안이 벙벙하다는 휴마누스의 얼굴에는 티끌만 한 거짓도 보이지 않았다. 진심으로 그리 생각한다는 뜻이다.

그에 세르펜스가 불만스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왜 그런 행동을 하신 겁니까?"

"응? 그런 행동이라니, 뭘···. 아! 상처를 입고도 대련을 멈추지 않았던 것 때문에 그래? 그 이유라면 아까도 얘기했잖아."

"저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자신의 몸에 파고든 상대의 검을 붙잡고 반격하는 건, 실전에서도 최대한 지양해야 할 최후의 수단입니다. 굳이 그런 방법을 쓰지 않아도, 휴마누스 정도라면 자신의 실력쯤은 정확히 파악할 수 있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제가 그 공격을 막을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하셨으면서···. 일말의 여지없이 확실하게 패배하기 위함이 아니라면, 대체 왜 그러셨던 겁니까?"

따지듯 말하는 세르펜스의 목소리에서 희미한 원망이 묻어났다.

나와 유지스에게 쓰다듬을 받고 있는데도, 영 기분이 안 풀리나 보다.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인데···?'

아무래도 세르펜스 우쭈쭈에 동참해 줄 사람이 더 필요할 것 같다.

나는 녀석의 머리를 계속 쓰다듬으며, 적절한 인재를 물색했다.

성검 일행은 아직 세르펜스와 충분한 친밀감을 형성하지 못했으므로 패스. 에드나에게는 이미 돌볼 아이가 있었으므로 열외.

휴마누스는 세르펜스의 기분을 상하게 한 당사자였으므로 해당 사항 없음.

남은 건 윈스톤 뿐이다.

내 의중을 알아챈 것인지, 나와 눈이 마주친 윈스톤이 사색이 된 채 고개를 내저었다.

"음···. 듣고 보니,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겠네."

"정말 아닙니까?"

"응, 정말로. 패배할 거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부딪혀보고 싶었을 뿐이야. 어차피 안 될 거라는 생각에 시도조차 안 해보고 도망치듯 결정을 내리는 건, 성미에 안 맞아서."

"······"

휴마누스도 나름 타당한 이유가 있어서 그랬다는 걸 이해한 것인지, 그를 바라보는 세르펜스의 눈빛이 살짝 누그러졌다.

무척이나 다행스러운 일이다.

윈스톤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선우가 얘기한 바에 따르면, 지금쯤 나는 성검 없이도 너를 이길 만한 실력을 갖췄어야 해. 네가 선택의 날에 각성했다는 것을 고려하더라도, 제대로 된 공격을 단 한 번도 성공시키지 못했다는 건 여러모로 문제가 많아."

[성검의 주인]에서 휴마누스가 타락펜스를 꺾었던 건, 암흑가의 악마를 처치한 이후. 즉, 올해 1월 말에서 2월 초 즈음이다.

그리고 지금이 11월 초니까, 성장이 1년 가까이 늦춰진 셈이다.

"너와 전력으로 부딪혀 보니까 알겠더라. 현재의 나는 전투 감각과 검술 숙련도···. 그 모든 게 부족해. 신성력을 다루는 건 혼자서도 연습할 수 있지만, 실전 감각이 뒤떨어지는 건 혼자서 어쩔 수 있는 게 아니야."

자신이 말하면서도 속이 갑갑한지 휴마누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의 상황을 RPG 게임에 빗대어 표현하자면, 최종 보스를 잡으러 가는 길에 잡몹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경험치가 되어줄 잡몹을 만날 수 없어 레벨업을 하지 못하니, 최종 보스가 다 뭐란 말인가.

중간 보스만 마주쳐도 생사가 위태로워진다.

이렇게 상황을 정리해 놓고 보니, 마왕을 향한 분노가 치솟는다.

'마왕 이 개새끼가···! 용사가 가는 길에 잡몹을 깔아서 성장을 도모하는 건, 마왕의 본분 아닌가?'

테네브리오, 그 새끼는 마왕이라 불릴 자격조차 없다.

일을 이따위로 처리하는 주제에 무슨 신을 한다고 이 난리를 피우는지 모르겠다.

더럽고 치사한 범대륙적 민폐쟁이 같으니.

"아무튼 내 행동으로 세르펜스, 네가 상처받았다면 미안해."

"···휴마누스가 그런 행동을 할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하여, 그저 놀랐을 뿐입니다."

"그럼 놀라게 해서 미안해."

또다시 사과의 말을 내뱉는 휴마누스를 향해, 세르펜스가 눈을 흘겼다.

마치 미안한 걸 아는 사람이 왜 그랬냐고 타박하는 듯한 시선이다.

하지만 녀석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다른 내용이었다.

"휴마누스는 저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참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내가 너한테 미안할 행동을 많이 하긴 했나 봐."

"과거의 일은 이제 됐습니다. 그보다···. 결정하신 겁니까?"

"응."

휴마누스가 홀가분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을 결정했는지 되묻지 않는 거로 보아, 정말 단단히 결심한 모양이다.

'진정한 성검의 주인이 되기로···.'

그러려면 이전 회차의 기억을 받아들여야 한다.

세계수가 조심스레 언급한 2회차의 마지막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나도 모르게 휴마누스를 걱정스럽다는 눈으로 바라봤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이미 3회차이기도 하고 신께서도 많은 힘을 소진했을 테니, 다음 기회 같은 건 없을지도 몰라.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선우는 다른 세상에서 왔으니, 다음 기회가 주어졌을 때도 함께할 거라는 보장이 없고···."

4회차가 시작된다면 내가 없을 수도 있다는 휴마누스의 말에 세르펜스가 움찔 몸을 떨었다.

어디까지나 현 회차까지 말아먹었을 때를 가정한 말이다.

나는 안심하라는 뜻으로 세르펜스의 정수리를 가볍게 툭툭 두드려 주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휴마누스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게다가 마왕의 기억은 그대로 이어지잖아? 회차를 반복할수록 상황이 악화되면 악화됐지, 절대로 나아질 수 없을 거야. 아니,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나는 지금이 마음에 들어. 현재를 포기할 수 없어. 그러니 이번이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최선을 다하고 싶어."

그렇게 말하는 휴마누스의 표정에서 결연한 의지가 떠올랐다.

그런 그가 걱정스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가장 힘든 역할을 휴마누스에게 떠넘겨 버린 게 아닐까 싶어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만약 이전 회차의 기억과 경험을 내 것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경험 부족 문제도 해결될 거야."

휴마누스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으며 긍정적인 얘기를 꺼냈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성검의 힘을 제대로 끌어내는 것만큼이나 큰 효과를 기대해 볼 수 있다.

하지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도 그러할 게 2회차의 마지막에 관한 건, 세계수도 넌지시 힌트만 주었을 뿐. 직접적인 언급을 피했으니까.

[성검의 주인]에서는 아예 각색해 버렸고.

이런 내 불안을 아는지 모르는지, 휴마누스는 눈부실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말이야. 사람은 좌절과 행복 중 하나를 고르라면, 행복을 고르기 마련이잖아? 나는 절망이 희망을 이기는 건 결코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지금 내가 무슨 얘기 하는지 이해하지?"

그렇게 말하며 휴마누스는 나와 세르펜스에게 한 번씩 눈길을 주었다.

자신이 다른 회차의 기억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현재 자신의 자아를 잃는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하라는 뜻이다.

근거 없는 자신감에 불과할지도 모르나 썩 그럴싸하게 들렸다.

그리고 믿고 싶은 얘기였다.

자세한 건 몰라도 휴마누스가 위험한 선택을 했다는 걸 어느 정도 짐작했는지, 유지스와 푸로르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때 세계수가 갑자기 말문을 열었다.

{휴마누스, 그대의 뜻이 그러하다면 저도 응원하겠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휴마누스가 한 말을 전부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성검에 담긴 정보를 읽었을 때처럼, 세계수에게서 은빛 섞인 연녹색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 기운은 가지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많고 많은 가지 중에서도 하나의 가지에 응축되었다.

빛을 한껏 머금은 가지가 똑 하고 부러져, 아주 느릿하게 떨어져 내렸다.

휴마누스는 두 손을 펼쳐 빛나는 나뭇가지를 받았다.

눈부신 광채는 점차 사그라들었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희미하게 남아 은은한 빛을 흩뿌렸다.

{제 힘과 의지가 담긴 제 일부입니다.}

세계수가 그냥 봐도 알 것 같은 얘기로 서두를 열었다.

{그대의 첫 번째 무구는 성검의 힘을 제어하는 기능이 있지요? 그것의 방향성을 살짝 비튼다면, 그대가 원할 때 이전 회차의 기억을 엿보는 것도 가능해질 겁니다.}

"이 가지에 그런 힘이 있는 겁니까?"

{그런 힘이 있다기보다는 의지를 전달하는 역할이라고 봐야겠지요.}

휴마누스의 물음에 세계수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답했다.

성검의 힘을 제어하는 첫 번째 용사의 무구라면 검집이다.

정보를 읽어낼 때처럼 직접 성검과 연결해서 뭔가 하는 것도 아니고, 검집이랑 나뭇가지로 뭘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의문이 점차 커지는 가운데. 세계수가 그 사용법을 설명했다.

{그것을 영광의 화로로 가져가서 태우세요. 그리고 그 잿가루를 가지고 무궁의 심해로 향하세요. 나머지는 그곳의 사도가 안내해 줄 겁니다.}

사용법이라기보다는 사용처였다. 심지어 이곳에서 매우 멀리 떨어져 있었다.

휴마누스의 얼굴에 고마움 대신 떨떠름함이 먼저 떠오른 건, 그조차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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