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632화 (632/925)

632회

74. 공작님과 세계수 (21)

한참을 그렇게 세계수의 그늘에서 놀다 보니 어느새 하늘이 어둑해졌다.

우리는 잊지 않고 뒷정리를 깔끔히 마친 후 세계수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볼게요."

{아···, 이제 작별이로군요. 그대들의 앞날에 신의 은총이 가득하길 기원합니다.}

"세계수도 몸 건강히 잘 지내세요. 그리고 일 끝나면 또 놀러 올 테니까, 너무 아쉬워하지 말고요."

{하루빨리 그날이 오기를 기대하겠습니다.}

세계수가 가지를 흔들며 인사했고,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며 세계수가 있는 들판을 떠났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소리가 점점 멀어지다가 더는 들리지 않게 되었을 무렵.

"세계수 님께서 저렇게나 즐거워하시는 모습은 처음 봤습니다."

미카엘이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렇지 않아도 미카엘을 비롯한 하이 엘프들에게 해 줄 말이 있었는데 잘됐다.

"그렇겠죠. 놀아주는 사람 하나 없이, 매일 같은 자리에서 같은 풍경만 보고 서 있는데 얼마나 심심하겠습니까? 이제부터라도 다른 하이 엘프들이랑 같이 세계수 앞에서 재롱이라도 부려 봐요. 그런 거 보는 낙이라도 있어야 세계수도 살맛이 나지. 안 그래요?"

"재, 재롱···."

한 번도 재롱을 부려본 적이 없다는 것을 광고라도 하듯. 미카엘이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하이 엘프들이 돌아가며 세계수 곁을 지킨다고는 하나, 어차피 세계수 관리 말고는 딱히 하는 것도 없는 양반들이다.

먹고 살기 바쁜 것도 아닌데 부모나 마찬가지인 세계수와 놀아주지도 않는다니.

완전 불효자식들이 따로 없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미카엘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로 노력을 했는지 어쨌는지는 나중에 다시 찾아오면 알게 될 테다.

아르케 왕실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식사를 하며 우리가 내일 아침 일찍 떠나겠다고 그 뜻을 밝히자, 유지스의 가족들은 크게 아쉬워했다.

하지만 우리가 바쁘다는 것을 알기에 붙잡지는 않았다.

그래도 유지스를 그냥 보내기는 아쉬웠는지, 유지스의 부모님은 남은 시간을 셋이서 단란하게 보내길 바랐다.

그렇게 유지스는 식사를 마친 뒤 부모님을 따라갔고, 나와 세르펜스와 휴마누스는 응접실로. 나머지 일행은 각자의 방으로 이동했다.

우리 셋이 응접실로 이동한 건 엘프 왕과 따로 대화를 나누기 위함이다.

닼숭이 문제에 관해 세계수에게 조언을 받으면, 그에게 알려주기로 약속했으니까.

'고작 말 몇 마디 전하려고, 셋씩이나 우르르 몰려갈 필요가 있나 싶긴 하지만···.'

누군가 한 명이 대표로 찾아가려면, 성검의 주인인 휴마누스나 신의 사자인 내가 나서는 게 예의에 어긋남이 없다.

그런데 휴마누스는 너무 눈치가 없어서 걱정이고, 나는 세르펜스가 혼자 보내려 하지 않으니.

그냥 셋이 함께 가기로 한 것이다.

"잘하면 그 다크 엘프가 문제를 일으키기 전에, 세계수 님께서 먼저 그자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휴마누스가 대표로 말을 꺼냈다.

세계수가 닼숭이의 정체에 관해 감을 잡은 건, 1회차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회차에 관한 건 비밀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엘프 왕에게 해야 할 말을 미리 정리했고, 그 서문이 지금 휴마누스의 입을 통해 나온 거다.

어떻게 먼저 발견할 수 있다는 건지 근거가 쏙 빠져버렸지만, 엘프 왕은 반색했다.

"정말 세계수 님께서 그리 말씀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안심이로군요."

"그래도 확실한 건 아니니까, 왕실 측에서도 검문에 주의를 기울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말도 하셨습니다."

정확히는 세르펜스가 낸 의견이었지만.

할 말을 미리 준비해둔 덕분에 휴마누스가 눈치 없는 소리를 덧붙이지 않았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세계수 님께서 그자를 발견한다는 것은 곧, 그자가 세계수 님의 영역권 내로 들어왔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까? 이 나라에 해를 끼칠 수 있는 위험한 자가 아르케 숲의 중심부에 다다를 때까지, 그냥 손 놓고 지켜볼 생각은 없습니다."

엘프 왕은 닼숭이가 세계수의 영역권 안에 들어오기 전에, 놈을 잡고야 말겠다며 열의를 불태웠다.

닼숭이가 숲의 중심부까지 와서 깽판을 친다는 보장도 없는 만큼 매우 훌륭한 자세다.

"그리고 세계수 님께서 그 다크 엘프를 붙잡게 되더라도, 정체는 밝히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악마 숭배자들에게 이용당한 것뿐인데, 그자의 이름이 일족의 배신자로 알려지는 건 너무 가엾다고···."

"동감합니다. 나쁜 것은 어디까지나 악마 숭배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이용당하며 고통받고 있는 이에게까지 증오를 보낼 필요는 없습니다. 외부의 적이 아닌 내부를 향해 가시를 세우면 어떻게 되는지, 그 결과는 신의 사자께서 받은 계시 속. 우리가 본래 맞이했어야 할 미래의 모습이 답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엘프 왕이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았지만, 그 요지는 간단했다.

내부의 누군가에게 증오를 보내면 옹호하는 자도 있을 테니. 서로 치고받고 싸우다 보면 결국 2회차 꼴을 못 면한다는 얘기다.

'엘프 왕도 그렇고 세계수도 그렇고. 적과 아군을 명확히 구분할 줄 알아서 다행이네.'

세르펜스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안심하는 기색이다.

비록 짧은 대화였지만, 귀찮다고 방에서 뒹굴거리지 않고 쫓아온 보람이 있다. 녀석의 정서 안정에 도움이 되었다는 점에서 말이다.

* * *

아르케 왕국에서 테라룸 왕국으로 가는 최단 경로는 펠로 왕국을 횡단하는 것이다.

우리는 펠로 왕국에 입국하여, 그곳 신전에서 하룻밤을 신세 지기 전.

기름지고 맛있는 식사를 하기 위해 찾아간 식당에서 뜻밖의 소문을 접하게 되었다.

"자네, 최근 악마 숭배자가 제국 수도에서 테러를 일으켰다는 얘기 들어 봤는가?"

귀에 쏙 파고든 목소리에 우리 일행은 전원 멈칫했다.

슬쩍 곁눈질로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살피니, 술잔이 가득한 테이블에 둘러앉은 두 중년 남성의 모습이 보였다.

"단체석이 있는 방은 이쪽입니다."

"어···, 잠시만요."

나는 단체석으로 안내해 주겠다는 직원에게 기다려 달라고 부탁한 뒤, 일행의 모습을 빠르게 눈으로 훑었다.

9명이나 되는 대인원이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으면 너무 수상해 보인다.

시기가 시기니만큼, 악숭이 신고가 들어올지도 모른다.

그래서 얼굴이 너무 눈에 띄는 세르펜스와 유지스. 덤으로 휴마누스까지. 이렇게 세 사람만 후드를 쓰고 나머지 일행은 얼굴을 드러냈다.

물론 머리칼은 모두 염색약으로 색을 바꾼 상태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시선이 쏠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인원수가 많다는 사소한 문제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윈스톤의 덩치는 옷으로 어떻게 숨길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래도 우리의 정체를 확정 지을 만한 결정적인 요소는 잘 숨겼다.

그 덕분에 식당 내 사람들은 우리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다가, 이내 테러 얘기가 나온 테이블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나는 처음 듣네만. 어디서 그런 헛소문을 주워듣고 온 게야?"

"아, 글쎄 들어 봐! 내 친구 녀석이 제국과 교역하는 큰 상단에서 일하는 거 알고 있지? 그 친구가 한 말이라고. 제국과 관련된 소문에 귀가 밝으니, 절대 거짓말이 아닐 거야."

중년인은 술에 거나하게 취한 탓인지, 사람들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아니면 남들이 모르는 정보를 알고 있다는 우월감에 취한 까닭이거나.

"에이~, 그 친구가 잘못 안 거겠지. 정말 그런 일이 있었다면 여기저기 소문이 퍼지고 난리가 났을 텐데,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거야 피해 규모가 컸을 때 얘기고!! 악마 숭배자들이 나타나서 테러를 시도하긴 했는데, 금방 제압당했다지 뭔가?"

상대방이 계속해서 불신감을 드러내자 중년인이 흥분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맞은편에 앉은 남성이 뒤늦게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은근슬쩍 화제를 돌려 버렸다.

"하긴, 제국이 달리 제국이겠어? 아이고, 이럴 땐 제국에 사는 사람들이 부럽다니까?"

"그래도 우리 펠로 왕국은 다른 나라들보다 상황이 낫지! 제국 바로 옆에 붙어 있으니, 언제든지 보호를 받을 수 있지 않은가?"

"그렇고 말고! 더불어 다른 이웃 국가인 아르케 왕국과 테라룸 왕국도 믿을 만하지! 절대 먼저 전쟁을 걸어올 리는 없으니까 말일세! 바스툴 왕국은 얼마 전 왕권 다툼이 일어났다는 모양이라, 조금 걱정이긴 하지만···."

"왕권 다툼이라 하여도, 거 망할 놈의 악마 숭배 세력에 가족들을 팔아넘긴 죽일 놈을 몰아낸 거라지 않은가? 우리나라가 다른 건 몰라도, 입지는 참 좋아!"

두 사람은 펠로 왕국이 얼마나 안전하고 살기 좋은 나라인지 금칠을 하며, 불안감을 떨쳐내고 술잔을 부딪쳤다.

그 탓에 제국에 관한 이야기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이제 됐으니까 단체석으로 안내해 주세요."

직원의 안내에 따라 우리는 단체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귀족들만 이용하는 최고급 음식점이 아닌지라, 단체석이 있는 방은 문을 닫아도 웅성대는 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음식을 주문한 뒤 아니마가 방음 마법을 펼쳤다.

그러고 나서도 웅성거리는 소리가 여전한 거로 보아, 내부의 소리만 차단하고 바깥의 소리는 그대로 들여보내는 방식인 듯했다.

언젠가 에드나가 엘로윈 보육원에서 전개한 것과 같은 마법이다.

혹시 밖에서 테러 얘기를 또 할지도 모르니, 그것을 대비한 걸 테다.

내 귀에는 단순한 웅성거림으로밖에 들리지 않지만, 우리 일행 중에는 귀가 밝은 사람이 매우 많으니까. 누군가 한 명은 듣겠지.

"방금 그 얘기, 어떻게 생각해?"

"으음···. 별일이 아니라는 식으로 마무리되긴 했지만, 그래도 혹시 모릅니다. 우선 그 진위를 확인해 본 뒤, 사실로 밝혀진다면 제국에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휴마누스의 물음에 세르펜스가 정석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아, 그래도 휴마누스는 테라룸 왕국으로 가십시오.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습니까?"

"응. 그쪽이 효율적이겠지."

아무래도 사안이 사안인지라 휴마누스는 아쉬움과 걱정을 드러낼지언정, 테라룸 왕국에 들렀다가 함께 가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반면에 아니마는 자신이 아직 아기라는 주장에 근거를 더하려는 것처럼 응석을 부렸다.

"언니야, 우리 또 헤어져야 하는 고얌···?"

"큰 사건이 아니라고 하니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만 확인하고 나면 다시 함께 다닐 수 있을 거야."

에드나가 부드러운 어투로 아니마를 달랬다.

아니마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울상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도 하고, 금방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말에 적당히 타협한 것이리라.

"안 그래도 언제 한번 제국에 들리긴 해야 했어요. 에일리히 님한테 바스툴 왕국 일을 해결하고 돌아온다고 말해 놨잖아요. 괜히 걱정하시지 않게, 직접 얼굴 보고 집을 더 오래 비워야겠다고 얘기해야죠. 그리고 저번에 맞춘 윈스톤의 갑옷도 저택에 도착해 있을 테니까, 그것도 챙겨야 하고."

"아! 그럼 간 김에 황성에 방문해서 아바마마께 안부 좀 전해 줄래? 겸사겸사 내 궁에 있는 검도 가져다주면 더 고맙고."

내가 제국에 들러야 할 이유를 나열하자, 휴마누스가 이때다 싶었는지 심부름을 시켜댔다.

그래도 나는 귀찮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들었죠, 세르펜스?"

휴마누스의 심부름을 들어줄 사람은 따로 있었으니까.

어차피 황제에게 바스툴 왕국에 다녀온 일을 보고해야 했던지라, 세르펜스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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