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4회
75. 공작님과 백부님 (2)
세르펜스의 말인즉.
에일리히 뿐만이 아니라, 교단 측 또한 해당 사건이 널리 알려지길 원치 않았을 것이라는 뜻이다.
"가장 쉽게 떠올려 볼 수 있는 가능성이라면···. 네가 이대로 우리 일행에 합류하여 나와 함께 힘을 합치는 대신, 제국으로 귀환해 버릴까 봐 숨기려 했다는 것 정도려나? 하지만 사건 자체를 완전히 은폐한 건 아니 것 같으니, 우리가 제국에 들르게 되면 바로 들키게 될 텐데···."
휴마누스가 골똘히 생각에 잠기며 반쯤 독백에 가까운 말투로 중얼중얼 말했다.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곧장 입에 올린 것인지, 끝에 가서는 자신의 추측을 자신이 반박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그럼 그 이유가 아닌가 보죠. 애초에 그딴 이유로 숨겼다가 나중에 들키면, 세르펜스에게 반감 사기 딱 좋잖아요."
"그렇지 않아도, 그런 이유로 아닐 것 같다는 말을 하려던 참이었어."
내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자, 휴마누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가장 중요한 대사를 빼앗긴 것이나 다름없는데도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그는 찜찜한 것을 털어버린 듯 개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긴. 앞선 회차를 말아먹은 게 사람들의 이기심 때문인데, 가장 중요한 아군이라 할 수 있는 룩스메아 교단까지 글러 먹으면 큰일이지.'
그러고 보면 주교는 세르펜스를 안심시키듯, 에일리히와 공작저 사람들의 안전만 강조했을 뿐.
'악숭이들이 공작저를 테러하긴 했지만, 신경 끄고 네 할 일에나 집중해라.' 따위의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비록 자세히 캐묻기 전까지는 자세한 설명을 꺼려하긴 했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그조차도 진실을 숨기려 했다기보다, 걱정으로 인한 망설임에 가까웠던 것 같다.
자신이 집을 비운 사이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알면, 순진무구한 세르펜스의 얼굴이 충격으로 하얗게 질릴까 봐.
그래서 선뜻 입을 열지 못했던 게 아닐까?
'그도 그러할 게,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세르펜스의 표정이 오죽 순수했어야 말이지···.'
나 같아도 쉽게 입을 떼지 못했으리라.
그리고 이런 시련을 들게 한, 룩스메아를 한 대만 때릴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를 올렸겠지.
녀석이 그런 연기만 안 하고 의젓하게 굴었다면, 오히려 사건의 내막을 더 빨리 들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교단은 세르펜스가 아니라 다른 쪽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요?"
"다른 쪽?"
유지스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운을 떼자, 휴마누스가 곧바로 관심을 보였다.
"네. 성검의 주인인 휴마누스를 제외하면, 세르펜스는 악마 숭배 세력과의 싸움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람이잖아요."
"응, 그렇지."
"프라시더스 가문은 아무런 피해 없이 테러를 막아냈지만, 과연 다른 가문들도 그게 가능할까요?"
"불가능하겠지. 세르펜스의 삼촌은 교단에서도 손꼽히는 강자들로만 구성된 이단 심문관 중 하나였고, 그런 강자는 흔치 않으니까. 그렇다는 건···."
휴마누스는 유지스의 질문에 답한 뒤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 고민이 깊어질수록, 그의 미간에 잡힌 주름의 골 또한 점점 깊어졌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판판하게 펴졌다.
"아! 이해했어! 이번 테러 사건이 널리 알려지면, 그것을 일종의 본보기로 생각하는 사람이 나올까 봐. 그래서 교단이 조용히 넘어가려 하는 것 같다는 얘기지?"
"네, 맞아요! '프라시더스 가문은 힘이 있기에 나설 수 있는 거다.' 그런 인식이 생겨버리면, 악마 숭배 세력과 싸우는 건 모두가 힘을 합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닌. 힘 있는 소수가 떠맡아야 할 책임이 되어버릴 거예요."
눈치는 없어도 휴마누스는 황태자 신분으로 고등 교육을 받아온 엘리트 중의 엘리트다.
그 덕분일까?
휴마누스는 평균치보다 한없이 뒤떨어진 눈치에도 불구하고, 유지스가 낸 문제의 답을 알아내었다.
"어때?"
어째서인지 휴마누스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내게 밑도 끝도 없는 말을 날렸다.
설마하니 자신의 눈치가 이만큼 늘었다고 자랑하는 건가?
안타깝지만, 방금 그가 유지스의 의도를 알아낸 건 눈치가 늘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냥 어릴 적부터 받아온 교육의 승리지.
"교단의 의도가 궁금하면, 다시 주교를 찾아가서 물어보는 게 제일 정확할 텐데. 왜 우리가 이러고 있는지, 생각해 본 적 있어요?"
"어···? 그건···. 왜지?"
"가장 먼저 추론을 제시한 휴마누스가 모르면 어떡합니까?"
"그건 세르펜스가 먼저···. 어? 그러고 보니, 세르펜스 너는 왜 아무 의견도 안 내는 거야?"
참 빨리도 알아차린다.
휴마누스는 내게 지적을 받고 나서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세르펜스를 바라보았고, 세르펜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그저 교단도 나름의 이유가 있을 거라고 말했을 뿐. 그것에 관해 탐구하자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선우의 말대로 그냥 물어보면 알 수 있는 일이잖습니까?"
"···교단이 나쁜 의도를 품고 테러 사건을 숨긴 건 아닐까, 의심했던 거 아니었어?"
"그런 적 없습니다."
세르펜스가 즉답했다.
의심병 말기 환자인 세르펜스가 교단을 의심하지 않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교황이 나를 천계에서 온 천사의 영혼이라 믿고 있으니까.'
게다가 나는 교황 앞에서 세르펜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내가 녀석을 얼마나 아끼고 있는지도 보여줬다.
그러니 교단이 프라시더스 가문과 관련된 테러 사건을 숨긴 건, 말 그대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뿐. 나쁜 의도 같은 게 있을 리가 없다.
"유, 유지스. 너도 헷갈렸지?"
휴마누스가 당황했는지, 물귀신처럼 유지스를 붙잡고 늘어졌다.
아무래도 유지스가 자신처럼 세르펜스의 말을 곡해하여, 교단에 대해 추론을 내놓았다고 착각했나 보다.
눈치도 없이···.
"아니요."
"유지스는 원래 추리하거나 음모론을 제기하는 걸 좋아합니다."
유지스가 짧게 대답했고, 나는 거기에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하늘 높이 떠올랐던 자신감이 단숨에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친 탓일까?
평소의 눈치 없는 행동에 비하면 이 정도는 새 발의 피라고 생각했건만. 휴마누스는 자신감을 잃고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반면에 세르펜스의 표정은 살짝 밝아졌다.
휴마누스가 교단보다 자신의 말을 신뢰해 준 것이 기뻤나 보다. 비록 그 신뢰가 착각에서 기인한 것일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휴마누스가 그것을 눈치채는 일은 없었다.
"지금 저희가 고민해 봐야 할 문제는 교단의 의도가 아니라, 악마 숭배 세력의 의도입니다."
세르펜스가 다시금 어두운 낯으로 돌아오며 입을 열었다.
교단과 달리 이번에는 물어볼 사람도 없다.
테러를 일으킨 악숭이를 생포했는지 어쨌는지 미처 확인하지 못했지만, 생포했더라도 악숭 세력의 작전을 곧이곧대로 설명해줄 리는 없을 테니까.
"역시 유지스가 말했던 대로 본보기였던 게 아닐까요?"
"그건 교단이 염려할 만한 것을 추론하여 낸 의견이었어요. 만약 악마 숭배자들의 목적이 그러했다면 벌써 소문이 퍼져서, 아무리 교단이 숨기려 했어도 소용없었을 거예요."
"하지만 놈들은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고 실패했잖습니까? 그 바람에 자기네 입으로 떠들고 다니기 부끄러워서 닥치고 있는 걸 수도 있잖아요."
"그건 조금···. 가능성이 있네요."
유지스가 솔깃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듣기에도 내 의견이 꽤 그럴듯했나 보다.
그러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는 듯, 짧은 탄성을 질렀다.
"앗! 그래도 그게 주목적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냥 본보기만이 목적이었다면 굳이 프라시더스 가문이 아니더라도, 제국 수도의 귀족 저택 중. 아무 곳이나 공격해도 상관없으니까요."
"굳이 실패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프라시더스 공작저를 노릴 만한 이유라면···."
에일리히가 한스의 얼굴에 냅다 주먹을 꽂았던 날에 오갔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런 일이 벌어진 결정적인 계기는 알타르가 심문한 악숭이의 입방정 때문이었다.
그 악숭이는 악숭 세력은 전대 프라시더스 공작 부부를 죽이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매우 설득력 있는 심증을 제시했다고 한다.
'살아있는 친족만큼 좋은 인질이 없으니 그런 손해 보는 짓은 안 한다···, 였었지?'
그 말에 근거하자면 에일리히는 훌륭한 인질이 될 수 있다.
그래도 에일리히는 강하니까 노려지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건만.
'세르펜스에게 보호받는 나를 납치하는 것보다, 공작저를 지켜야 하는 에일리히를 납치하는 게 할 만해 보였나?'
정말 지독한 놈들이다.
세르펜스에게 하나밖에 없는 혈육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 아니, 알고 있으니까 에일리히를 노린 걸 테다.
지금쯤이면 마왕도 세르펜스가 이전 회차들과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알아챘으리라.
그리고 에일리히를 가문의 일원으로 받아준 것을 보고 이거다 싶었나 보다.
걱정되어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니, 쓴웃음을 머금은 세르펜스의 얼굴이 보였다.
"···선우. 그들은 실패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다."
"예?"
"아까 함께 들었잖은가. 백부님께서는 바위를 막아내시며 내상을 입으셨고, 침입을 막아낸 것은 저택의 기사들과 '마침 근처에 계시던 알타르 이단 심문관님'이라고."
"어···?"
만약 알타르가 그 자리에 없었다면 어떤 상황이 펼쳐졌을까?
에일리히는 내상을 입은 채로도 공작저의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누구보다 앞장서서 싸웠을 테다.
그러다 보면 빈틈이 생길 수밖에 없다.
더구나 악숭 세력은 신성력을 억제하는 물건까지 가지고 있다.
"이 빌어먹을 악숭 새끼들이 진짜···!"
세르펜스가 옆에 없었더라면 더 심한 욕도 쏟아냈을 텐데. 아이 앞이라서 참는다.
지금은 화를 내기보다 세르펜스를 달래는 것이 먼저다.
"어쩌면···, 백부님을 다시 가문으로 받아들인 건 실수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전대 공작이 한 짓 때문에 부끄러워서 성직자를 못 해 먹겠다고 때려치웠는데, 세르펜스가 안 받아줬으면 집 없는 실업자밖에 더 됩니까? 그나마 경비가 철저한 공작저에서 지냈으니까 이제서야 노려진 거지, 매일 광장 벤치에서 노숙했다고 생각해 봐요! 사달이 나도 진작에 났지!"
"내가 받아주지 않았다면, 교단에서 놓아주지도 않았을 거다."
내 호들갑스러운 말에도 세르펜스는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울적하게 말했다.
자신이 내뱉은 자책의 말이 족쇄라도 되는 것처럼. 말을 내뱉고 난 녀석은 그러기 전보다 더 갑갑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차라리 옆에서 부추긴 내 탓을 하지···.'
나는 한숨을 삼키며 녀석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기죽은 녀석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별안간 또 다른 걱정이 떠올랐다.
'에일리히 님도 비슷하게 자책하고 있는 거 아니야? 뒤늦게나마 세르펜스를 지키고 싶어서 가문에 돌아온 건데, 오히려 약점이 되었다고?'
그럴 만한 정도가 아니라 그러고도 남았다.
에일리히가 어떤 사람인가?
지금은 겁 많은 조카가 행여나 놀라기라도 할까, 조곤조곤 다정한 말투를 구사하고 있지만.
전대 프라시더스 공작의 만행을 알자마자 한스에게 주먹을 날리고 은퇴를 선언한, 다혈질적인 양반이다.
행동력도 지나치게 빨라서, 무슨 돌발 행동을 하는 건 아닐까 무척이나 걱정스럽다.
만일 에일리히가 허튼짓을 하려고 하면, 그것을 막을 사람은 세르펜스밖에 없다.
그런데 녀석까지 이 지경이면 안 된다.
"가문으로 돌아와 세르펜스의 곁을 지키고 싶어 하신 건, 에일리히 님의 의지입니다. 그런데 세르펜스가 그렇게 말하면 에일리히 님이 슬퍼하시겠어요, 안 슬퍼하시겠어요?"
"···슬퍼하시겠지."
그동안의 교육이 효과가 있었나 보다.
세르펜스는 애먼 소리로 자신의 잘못을 주장하며, 그것을 나에게 이해시키려 하는 대신. 정답을 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