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7회
75. 공작님과 백부님 (5)
"말을 맞추다니···?"
세르펜스의 중얼거림을 들은 에일리히가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냥 일어난 일을 고스란히 보고하면 될 텐데. 말을 맞추고 자시고 할 필요가 무에 있느냐는 의문일 테다.
아무래도 이 전직 이단 심문관님은 단 한 번도 거짓 보고를 올린 적이 없는가 보다.
'한 번도 이상하게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우리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곧이곧대로 보고한 적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새삼스레 우리가 악숭이보다 아군을 더 많이 속여 먹었구나 하는 깨달음이 찾아왔다.
아무리 적을 속이려면 아군을 먼저 속여야 하는 법이라지만, 그런 레벨은 진작에 뛰어넘었다.
이제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편의에 따라 입맛대로 정보를 수정하여 거짓 보고를 해 왔음을.
"그게 실은···. 악마와 싸우는 도중 제가 실수를 하는 바람에 그만, 생명을 위협할만한 공격에 노출될 뻔하였습니다."
세르펜스가 오늘도 거짓말을 하기에 앞서, 우선 가볍게 진실을 말하며 운을 뗐다.
하지만 녀석의 삼촌은 그 내용을 가볍게 넘기지 못했다.
"뭐?! 그, 그게 사실이니?! 다친 곳은? 치료는 잘 받았고?! 지금은 괜찮은 것이냐?"
분명 세르펜스는 '다칠 뻔했지만, 그러지 않았다.'라는 뉘앙스로 말하였건만. 어째서인지 에일리히의 귀에는 그냥 '다쳤다.'로 들린 모양이다.
에일리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제 조카의 몸을 이곳저곳 살피며 무사함을 확인했다.
그러고도 불안했는지 세르펜스에게 신성력을 퍼붓기까지 했다.
"아···, 네. 괜찮습니다. 악마의 공격에 당할 뻔했지만, 휴마누스가 저를 보호해 준 덕분에 하나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진정하십시오."
"세상에, 룩스메아 님이시여! 다행이로구나, 정말 다행이야···! 다음번에 황태자 전하를 만나 뵙게 되면 꼭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구나."
"네···."
당황했는지 세르펜스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제 삼촌을 바라보았다.
다쳤다고 말한 것도 아닌데 에일리히가 이렇게까지 걱정할 줄은 몰랐나 보다.
'세르펜스가 새하얀 신관복을 새빨갛게 물들일 정도로, 피를 철철 흘렸다는 걸 알면 진짜 졸도해 버릴지도 모르겠네.'
세르펜스도 그렇게 생각해서 하나도 다치지 않았다는 거짓말을 한 걸 테다.
아군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하얀 거짓말은 계속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흠, 흠! 아무튼 그 덕분에 저는 다치지 않았지만, 저 대신 공격을 받은 휴마누스가 크게 다치고 기절해 버리는 사고가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저런···!"
이어진 설명을 들은 에일리히가 짧은 탄식을 흘렸다.
안타까움이 담겨 있기는 했지만, 세르펜스가 다칠 뻔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와 비교하면 퍽 심심한 반응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를 비난할 수만은 없다. 원래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니까.
"그래도 다행히 악마들은 이미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상태였습니다. 때마침 저희를 포위했던 악마 숭배자들도 정리가 되었던 터라, 저와 이곳에 모인 제 동료들. 그리고 성검 일행이 힘을 합쳐 그 악마들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음···. 그런 일이 있었구나."
없었다.
그냥 성검펜스 혼자서 팔팔하게 날뛰는 악마들을 단칼에 처리했다.
하나 그것을 사실대로 말할 수 없기에. 그리고 자신의 공이 더 이상 휴마누스를 앞지르면 안 되기에, 녀석은 그런 거짓말을 꾸며낸 걸 테다.
"그런데 지금 그 이야기를 교단에 알리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니?"
이미 한 번 각색된 이야기를 들은 에일리히가 또다시 의문을 제기했다.
"과정보다는 결론에 관심을 가지며,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게 사람이라지 않습니까? 사람들의 입을 오르내리다 보면, 휴마누스가 저를 구하려 몸을 던졌다는 사실은 잊히고. 악마들을 처치하던 순간, 그가 기절해 있었다는 것만 사람들의 뇌리에 남을 겁니다."
"그럴 리는 없다···고 믿고는 싶지만. 그래, 그렇겠지. 진실을 있는 그대로 알리려 노력한들, 악마 숭배자들이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
에일리히가 알고 있는 것은 이미 '있는 그대로의 진실'과 멀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 부분을 지적할 수 있을 턱이 없다.
지금 우리가 보여야 할 반응은 정해져 있었다.
윈스톤처럼 과묵하게 입을 다물고, 경청하고 있다는 티를 내기 위해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
그렇게 우리는 일제히 윈스톤 흉내를 냈다. 한 녀석만 빼고.
세르펜스는 에일리히의 말에 동의하는 척 근거를 덧붙여, 그가 떠올린 생각을 확신케 했다.
"백부님의 말씀대로 악마 숭배자들은 작은 허점을 크게 키워, 사람들의 불안감에 불을 지피는 데 능숙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녀석은 세 치 혀로 사람의 생각을 주무르는 것에 능숙했다.
에일리히는 순진한 조카가 제 생각을 유도하고 있다는 건,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겠지.
'나중에 혼내줘야 하나? 그치만 아예 없는 말을 한 건 아니라서···. 게다가 숨겨야 하는 얘기도 많고···. 아, 이거 애매하네!'
갓난아기가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대면, 빨리 말이 트여서 정확한 요구를 해 주길 바라지만.
정작 아이가 정신없이 말을 쏟아내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면, 차라리 '가만히 누워서 울기만 할 때가 편했지.'라고 생각하게 된다더니.
그 말은 사실이었다.
예전에는 그냥 어화둥둥 내 새끼야 하며 보듬어 주기만 해도 충분했었는데.
세르펜스가 커갈수록 신경 쓸 게 많아져,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너는 악마들을 처치한 공을 성검의 주인이신 황태자 저하께 돌리고 싶은 거로구나."
"네, 그렇습니다. 저를 구해 준 것에 대한 보답 차원도 있지만···. 그보다 사람들이 휴마누스를 믿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가 얼마나 성검의 주인으로서 적합한 사람인지. 얼마나 강하고 의지가 되는 사람인지,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그가 더는 뜬소문에 괴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세르펜스가 진심으로 휴마누스를 걱정하며, 그를 향한 신뢰를 드러내었다.
그렇기에 녀석이 앞서 한 말들에 거짓이 섞여 있다고는 그 누구도 의심하지 못하리라.
나조차도 진짜 내막을 알지 못했다면 헷갈렸을지도 모르겠다.
'어째서 얘는 무력이 아니라, 진실과 거짓을 아우르며 연기에 진심을 섞어내는 능력이 일취월장하는 거지?'
참 이상한 일이다.
성검펜스가 싸우던 모습을 보면, 분명 무력적인 측면으로도 성장할 여지가 남아 있는 것 같은데.
'설마 나도 모르게 세르펜스의 성장 포인트를 감정 표현 능력 쪽에 몰빵해 버린 건가? 게임 캐릭터도 아니니, 균형 있게 키워야 했는데···.'
이제라도 세르펜스의 전투 능력에 관심을 가져 봐야겠다.
문제는 어떻게 해야 녀석의 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느냐다.
자율 학습은 진작 한계에 다다랐으니, 역시 휴마누스와 대련시키는 게 최선인가 싶다.
그렇게 내가 세르펜스의 성장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동안.
"그래도 교단은 믿을 수 있으니, 사실대로 말한 후 양해를 구했으면 하는데···. 하지만 네가 정히 걱정스럽다면···."
에일리히는 자신의 양심과 조카의 의사를 저울에 올려놓고 괴로워했다.
한편 제 삼촌을 시험에 들게 한 세르펜스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자신 또한 마음이 편치 않음을 어필했다.
"잘 생각해 보니, 제가 지레 겁을 먹은 것 같습니다. 교단이 성검의 주인을 곤란하게 할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불안감 때문에···."
요망펜스가 에일리히의 의견을 수용하는 동시에, 마음 여린 모습을 보이며 연민을 자아냈다.
에일리히의 눈동자 속에서 고마움과 짠함이 뒤섞였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이해한단다. 누군가를 믿는다는 건 큰 용기가 필요하니까 말이다."
그렇게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며, 에일리히는 손가락을 꼬무락거렸다.
세르펜스가 기특하게 느껴져서 머리를 쓰다듬고 싶은데 그럴 용기가 안 나는 모양이다.
그러고는 슬그머니 나를 쳐다보았다.
'설마 자신의 조카를 쓰다듬어도 되는지, 내게 허락받으려는 건 아니겠지?'
믿고 싶지는 않았지만, 내 생각이 맞는 것 같다. 아니, 베일의 왕위를 걸고 장담컨대 내 생각이 정확하리라.
오늘도 어김없이 나와 유지스 사이에 앉은 세르펜스를 바라보았다.
녀석이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괜찮다는 뜻을 내게 전했다.
나는 에일리히가 세르펜스를 쓰다듬기 편하도록 아예 녀석과 자리를 바꿔 버렸다.
세르펜스가 소파 팔걸이에 상체를 기대며, 상석에 앉은 에일리히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그제야 에일리히는 제 조카의 머리를 쓰다듬을 수 있었다.
행복한 미소가 에일리히의 얼굴에 번져나갔다.
"참. 내일이면 알타르 님께서 저택에 오실 테니, 교단에는 따로 연락하지 않아도 괜찮을 거란다."
"안 그래도 저택을 지키는 데 도움을 주셨다고 하여, 감사를 표하고 싶었는데 직접 오신다고 하시니 마침 잘 되었습니다."
손을 떼야 할 타이밍을 못 잡는 에일리히와 달리, 세르펜스는 아주 익숙하게 쓰다듬을 받으며 답했다.
그 모습에 계속 쓰다듬어도 된다는 확신을 얻은 걸까?
에일리히는 녀석의 머리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꽤 자세히 알고 있구나. 신전에서 들은 거니?"
"네. 하지만 아주 자세한 부분까지는 모릅니다. 그 이단 심문관님께서는 어떻게 하여 공작저에 일이 생기자마자, 바로 도와주실 수 있었던 건지 궁금합니다."
"네가 자리를 비운 사이 악마 숭배자들이 이곳을 공격할까 봐, 매일 변장을 한 채로 이 주변을 오가며 순찰을 하셨다더구나. 참 고마운 일이지."
세르펜스를 쓰다듬는 것에 너무 집중한 탓일까?
에일리히가 흐뭇하다 못해, 흐물흐물 녹아내릴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과연 뇌는 거치고 나서 대답을 하는 건지 의심스러운 모습이다.
'알타르 님이 매일 저택 주변을 순찰한 건, 역시나 에일리히 님이 납치될 것을 염려해서겠지?'
악숭이를 심문하며 놈에게 가족은 좋은 인질이라는 말을 직접 들었으니.
에일리히가 걱정되어 공작저 주변을 맴돌만하다.
'그나저나 악숭 세력이 운이 없어서, 알타르 님이 공작저 근처에 와 있는 날 테러를 일으킨 줄 알았는데. 그냥 알타르 님이 죽치고 계셨던 거였구나?'
나는 머릿속으로 우리가 공작저를 비운 기간을 계산해보았다.
알타르가 몹시 존경스러워졌다.
"백부님과 백부님의 전 동료분께서 공작저를 함께 지켜 주신다니, 무척이나 든든합니다."
"사실 그 사건 이후로 알타르 님께서 저택 내부에 머물고 계시단다. 행여 네가 기분 나빠 하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든든하다 하니 다행이구나. 아! 그래도 본관 5층은 아니니 걱정 말아라. 낮에는 주로 나와 함께 집무실에서 머무르시고, 밤에는 창고로 개조한 별관의 비밀 공간에서 주무시지. 오늘은 네가 와서 가족끼리 편히 대화를 나누라며 자리를 비워주셨단다."
이제 알타르는 아예 공작저로 들어와 밀착 호위를 시작했나 보다.
이해한다. 온종일 밖에서 서성거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겨울이라 춥고 눈도 내리는데 혼자 그러고 있으면, 이러려고 이단 심문관이 되었나 회의감이 들 테니까.
"비밀 공간에서 지내고 계신다면,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겁니까?"
"집사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른단다."
알타르의 잠복 업무는 아직 끝나지 않았나 보다.
내일 알타르를 만나면 세계수 잎 차라도 대접해야겠다.
"그러고 보니, 그날 저택을 습격했던 악마 숭배자들은 생포하셨습니까?"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도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는지, 세르펜스가 그날의 일을 직접적으로 거론했다.
"그랬다면 좋았겠지만···. 전세가 자신들에게 불리해지자 놈들이 곧바로 자결하는 바람에, 제대로 된 심문은 못 했단다."
"그자들의 목적으로 짐작 가는 바가 있습니까?"
세르펜스의 질문에 녀석을 쓰다듬던 에일리히의 손이 멈췄다.
"백부님?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슬슬 식사 때가 되었구나. 영지와 사업에 관한 업무 보고도 해야 하니, 자세한 얘기는 저녁을 먹은 후 따로 얘기하는 게 어떨까?"
에일리히가 손을 거두어들이며 말했다
그러면서 굳은 얼굴 근육을 억지로 움직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