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641화 (641/925)

641회

75. 공작님과 백부님 (9)

* * *

아침 식사를 끝내자마자 세르펜스는 황성으로 향했다.

황제를 만나 안부를 전하고, 황태자 궁에 두고 온 검을 가져다 달라는 휴마누스의 부탁 때문이다.

'어차피 그 부탁이 아니더라도, 제국에 왔으니 황제에게 얼굴을 비추러 가야 하긴 하지만···.'

아무튼 나는 저택을 나서는 녀석에게 심부름을 하나 시켰다.

외출하는 김에 겸사겸사, 알타르 이단 심문관이 오면 대접할 디저트를 사 오라고.

그러자 세르펜스는 마치 전장에 나서는 장군과도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을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무슨 재밌는 일이라도 있어요?"

복도 한복판에 서서 히죽히죽 웃고 있는 게 이상해 보였는지,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고개를 돌리니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내가 막 공작저에 취직했을 당시, 가장 먼저 친해진 시녀인 메리다.

예전에는 밥도 같이 먹고 그랬는데. 세르펜스와 함께 식사하고 바깥을 돌아다닐 일이 많다 보니, 대화할 기회가 많이 줄었다.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제온···. 아니, 집사님 못 봤어요? 가족끼리 할 얘기가 있거든요."

"앗, 오랜만에 공작님의 멋짐에 관해 보좌관님과 토론할 기회가 생겼나 했더니···."

메리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악숭이들이 공작저에 테러를 일으켰다는 소문을 듣고 급하게 돌아오느라, 기념품도 못 사온 터라 괜히 미안해졌다.

"칫, 이번 기회에 보좌관님을 정통파로 끌어들이려 했는데···."

이어진 메리의 혼잣말을 듣고 나자, 미안함이 싹 사라졌다.

내가 신흥 유지스 계파라 부르는 '혁신파'의 중심은 단연코 유지스다.

그녀는 세르펜스와 사적으로 친밀한 사이였고, 때문에 혁신파의 지지율은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반면에 정통파에는 오랜 역사가 무색하게도 유지스와 견줄 만한 지도자가 없었다.

'그래서 세르펜스의 최측근인 나를 정통파의 간판으로 내세울 속셈이었나?'

당장 메리를 떼어놓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공작저에 머무르는 내내, 정통파 회원들은 나를 끊임없이 회유하려 들 테다.

어울려주지 못할 것도 없으나, 문제는 내가 정통파와 거리가 멀다는 거다.

나는 세르펜스를 어린아이로 보고 있으니. 굳이 따지자면 혁신파의 변형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내가 정통파의 대표로 나선다면 유지스가 정색할 거다.

진지한 논의에 장난으로 끼어들어 물 흐리지 말라고.

고민을 거듭하는 그때.

머릿속에 누군가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런 이유라면 윈스톤에게 가 보는 게 어때요? 그간 지켜본 바에 의하면, 윈스톤은 정통파가 틀림없습니다."

"고마워요, 어서 이 기쁜 소식을 모두에게 알려야겠어요! 그리고 집사님이라면 아까 중앙 현관 쪽에서 봤어요."

메리는 제온의 행적을 알려주고는 유유히 떠나갔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고, 제온을 찾으러 1층의 중앙 현관으로 향했다.

계단을 타고 내려오자 현관문 앞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사이로 제온의 모습도 보였다.

'다들 대체 뭘 보고 있는 거지?'

나는 사람들 사이로 파고들어 바깥을 살폈다.

어째서인가 에드나가 기사와 병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굽신거리고 있었다.

"공작저에서는 창문으로 오가는 게 당연한 관습인 줄 알고···."

"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그렇죠,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죠. 그런데 제가 대체 왜 그랬을까요?"

"그런 걸 저에게 물어보셔도···. 아무튼 자칫 침입자로 오인하여 공격할 수도 있으니, 앞으로 창문을 통해 드나드는 행위는 삼가 주시길 바랍니다."

"네···. 경비 업무를 방해하여 정말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에드나가 창문에서 뛰어내렸다가, 악숭 세력의 테러 건으로 한창 예민해져 있는 기사들에게 발각당했나 보다.

어제는 절대 창문을 이용하지 않을 것처럼 굴더니. 누구보다 당당하게 남들 다 보는 곳에서 뛰어내릴 줄은 몰랐다.

"창문으로 드나들 땐 남의 눈을 피하는 게 상식 아닌가?"

"누가 그런 이상한 소리를···, 하나 했더니. 역시나 보좌관님이셨군요."

제온이 나를 돌아보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는 표정으로 대응했다.

째려보는 눈초리가 제법 날카롭긴 했지만,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다들 뭐 하고 계십니까? 아무 일도 아닌 거 확인했으면, 각자 위치로 돌아가서 하던 일이나 마저 하십시오."

사람들 앞에서 소심한 작은 형과 소심하지 않은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게 부담스러웠던 걸까?

제온이 죄 없는 사용인들을 다그치며 업무를 독촉했고, 현관에 모여들었던 사용인들이 부랴부랴 흩어졌다.

"시온 씨!"

인간 장벽이 사라지자, 기사에게 짧은 훈계를 받고 풀려난 에드나가 나를 발견하고 아는 척을 해 왔다.

뚱한 표정으로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잘못한 게 없는데도 괜히 잘못한 기분이 들었다.

"창문으로 드나들면 된다더니, 안 된다잖아요!"

"앞으로는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좀 더 은밀하게 행동하는 게 어떨까요?"

"그거야말로 진짜 수상하잖아요!!"

"공작님이랑 유지스는 잘만 드나들던데···."

내 대답에 에드나는 향상심을 갖는 대신 체념하는 표정을 지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나는 에드나가 더욱 발전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응원 메시지를 전했다.

"포기하지 마세요, 에드나 씨도 할 수 있습니다!"

"그냥 기척을 죽이고 조심스레 창문을 드나드는 거랑 작정하고 은신 마법을 건 채로 창문을 드나드는 게 어디 같나요? 더군다나 공작님은 이 저택의 주인이잖아요."

듣고 보니 그러하다.

나는 내 실수를 깔끔하게 인정하기로 했다.

"그럼 운동한다고 생각합시다. 계단을 한 칸 오를 때마다 수명이 4초씩 늘어난대요!"

"그거 그냥 늘어난 수명과 계단 오르는 시간을 맞교환한 거 아니에요?"

"지금 계단 오르는 시간을 소비하여, 나중에 태어날 아니마 씨의 자손을 볼 수 있는 시간을 사는 거라고 생각하면 어때요? 훌륭한 거래 아닙니까?"

"그 아이를 똑 닮은 아기라니, 정말 귀엽겠네요."

에드나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내 말에 동의했다.

사고방식을 파악하고 있으니 설득하기도 쉽다.

"그건 그렇고···. 그 아이에게 보내야 할 편지가 있어서 잠깐 나갔다 올까 하는데, 우체국이 어딨는지 아세요?

"그냥 여기 있는 집사님께 맡기면 됩니다."

"···이번엔 진짜죠?"

내 말을 믿고 창문에서 뛰어내렸다가 혼났던 게 크나큰 배신감으로 다가왔나 보다.

에드나가 내 말을 믿지 못하고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제온이 나서서 편지를 맡아주겠다고 말하고 나서야, 에드나가 의심을 거두고 편지를 꺼냈다.

"그럼 잘 부탁드려요."

에드나가 제온에게 편지를 건네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러고는 우체국 갈 시간을 아꼈으니 연구실로 가야겠다는 말을 남기고 몸을 돌렸다.

"아 참. 편지를 보니까 생각난 건데···. 보좌관님, 집에 편지 한 장 써줄 수 있습니까?"

편지를 재킷 안주머니에 챙기던 제온이 불현듯 떠올랐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에드나가 걸음을 멈추고 이쪽을 쳐다봤다. 내가 진짜 시온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괜히 신경 쓰였나 보다.

'제온이 내게 리벨론 가로 편지를 써 달라고 부탁해 온 건 처음 있는 일인데···.'

내가 시온의 몸으로 세르펜스를 따라서 자꾸 외국으로 나도니까, 시온의 부모님께서 걱정이 많으신가 보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예전에 필체가 변하기 전의 서류를 보면서 천천히 한 글자씩 쓰면, 시온의 필체를 얼추 따라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러죠, 뭐. 공작님 따라다니면서 맛있는 거 먹으면서 잘 놀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쓰면 되죠?"

"···부모님께서 보좌관님이 언제 해고당할까 맘 졸이실 것 같으니, 그런 건 자제해 주세요."

잘 먹고 잘살고 있다는 얘기를 빼면 대체 뭘 쓰라는 건지 모르겠다.

뜻밖의 상황에서 창작의 고통을 맞닥뜨리고 괴로워하는 나를 위해, 제온이 편지에 적을 내용을 알려주었다.

"그냥 결혼 생각 없으니까, 동생이 먼저 결혼하는 걸 허락하겠다고만 적어주시면 됩니다. 제가 아무리 편지로 작은 형은 결혼 안 할 거라고 얘기해도 안 믿어 주시더라고요."

제온이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갑자기 결혼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주제에 당황할 새도 없이,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비혼주의자로 둔갑해버린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시온 씨, 비혼주의자였어요? 아이를 좋아하니까 당연히 결혼 생각이 있으신 줄 알았는데요?!"

에드나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걸음을 되돌려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그 정도로 의외였나 보다.

하지만 그래 봤자 내가 놀란 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결혼을 두 번 하기는 좀 그러니까, 한다면 내 진짜 몸이 있는 원래 세상에서 하고 싶기는 한데···. 아니, 그 전에 내 혼사를 왜 제온이 멋대로 정하는 거지? 시온에게 정식으로 인수인계받은 몸인데! 까짓,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결혼 좀 할 수도 있지!'

여태껏 결혼 생각은 안 해 봤는데, 남이 멋대로 결혼하지 말라고 하니까 묘한 반발심이 생겼다.

울컥해서 한소리 하려는 찰나.

"그러셨습니까? 혹시 그···. 비비가 신경 쓰여서 안 하겠다고 하신 거면, 신경 쓰지 마세요. 비비도 반대하지는 않을 겁니다."

제온이 에드나의 눈치를 살피며, 목소리를 최대한 낮춰 속닥속닥 말했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비비가 내 사생아라도 되는 줄 알겠다.

다행히도 들은 건 에드나 뿐이었고, 그녀는 비비가 시온의 환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러면 그냥 결혼은 나중에 할 예정이니, 동생이 먼저 결혼하는 걸 찬성한다고만 써 주셔도 됩니다."

"집사님은 제 결혼을 반대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예? 전혀 아닙니다. 기왕이면 지금 당장 결혼해 주셨으면 하는데요. 그래야 부모님께서도 제가 결혼하는 걸 반대하지 않으실 테니."

제온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야말로 영문을 모르겠다.

그저 제온에게 시온의 짐에 관해 얘기하려던 것뿐인데 대체 왜 이렇게 된 걸까?

이게 다 에드나가 꺼낸 편지 탓이다.

"잠깐만요. 저 지금 이해가 하나도 안 되는데요? 그래서 저더러 결혼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하고 싶으면 그냥 하시라니까요?"

"아까는 하지 말라면서!"

"제가 언제 하지 말라고 했습니까?"

나를 비혼주의자로 만들 땐 언제고. 제온이 갑자기 오리발을 내밀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제온을 빤히 쳐다보니, 그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전에 보좌관님께서 자신의 앞으로 오는 청혼서를 전부 폐기해 달라고 부탁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저기···. 그게 신경 쓰인다면서···."

"예?"

"그···, 비비 말입니다."

제온이 다시 속닥속닥 귓속말했다.

그때 갑자기 우리를 둘러싼 얇은 막이 생성되었다. 에드나가 방음 마법을 펼친 것이다.

"저는 시온 씨의 몸속에 다른 사람이 들어있다는 걸 아니까, 편히 말씀하세요."

"···대체 어쩌다 들킨 거야?"

에드나의 선언을 들은 제온이 기막히다는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말하자면 길기도 하고 얘기할 수 없는 내용이 대부분이었기에, 나는 그냥 화제를 돌려버렸다.

"그보다 아까부터 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 건데? 비비가 뭐 어쨌다고."

"작은 형이 비비로 다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기 전에, 남의 몸을 뺏은 것 같다며 미안해했잖아."

"응, 그랬었지."

"그래서 자신의 인생도 아니고 언제 돌아가게 될지도 모르는데, 결혼하는 건 여러모로 예의가 아닌 것 같다며 청혼서를 폐기해 달라고···."

"내가?"

"아니야? 공작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던데···."

이제야 알 것 같다. 모든 사건의 전말을.

세르펜스 이 자식이 나 몰래 내 앞으로 온 청혼서들을 폐기하고 있었던 거다.

에드나도 그 사실을 눈치챘는지 '아···.' 하고 나직한 탄성을 흘렸다.

'그래, 가만 생각해보니 이상하긴 해. 프라시더스 가의 보좌관이면 꽤 괜찮은 혼처잖아? 세르펜스 본인에게는 들이댈 깜냥이 안 되는 가문도 내게는 비벼볼 만도 한데···. 그간 청혼서를 한 장도 받아본 적이 없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거지.'

부모의 재혼을 반대하는 아이가 있다고는 들었는데, 그게 세르펜스의 얘기일 줄은 몰랐다.

애초에 나는 재혼도 아닌 초혼인데.

머리가 아파져 왔지만, 제온 앞에서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어, 미안. 세르펜스한테 그렇게 전해 달라고 얘기해놓고 깜박했네."

"아, 예···."

방음막이 펼쳐지자마자 반말을 하던 제온이 갑자기 정색하며 존댓말을 썼다.

그 태도가 신경 쓰이긴 했지만, 그것 말고도 신경 쓰이는 점이 하나 더 있었다.

"그런데 제온, 너 결혼하려고? 누구랑?!"

제온이 참 빨리도 물어본다고 따지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