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642화 (642/925)

642회

75. 공작님과 백부님 (10)

"나 로베르토 가의 데릴사위로 들어가기로 했어."

어디서 많이 듣던 가문명이다.

그냥 많이 듣기만 한 정도가 아니라, 한때는 그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떨 정도로 싫어했었고 지금도 싫었다.

'로베르토 가라면 한스의 가문이잖아?!'

세상에 기어 들어갈 집구석이 없어서, 한스네 가문 데릴사위로 들어갈 결심을 하다니.

제온의 정신 상태가 미심쩍을 정도로 경악스럽다.

"나는 이 결혼 반댈세!!"

"왜?"

"왜냐니! 나야말로 묻고 싶다, 진짜. 어째서 그 집안이랑 결혼하려는 건데?"

"한스 님께서 은퇴하시며, 로베르토 가에서 관리하던 사업을 내가 이어받게 됐잖아."

그렇게 말하며 제온이 또다시 에드나를 곁눈질했다.

로베르토 가에서 관리하던 사업이라면, 프라시더스 가문 산하 정보 단체를 말하는 걸 테다.

그 얘기를 에드나 앞에서 해도 될지 말아야 할지 몰라, 에둘러 표현한 게 분명하다.

"저는 없는 셈 치고, 편히 말씀 나누세요."

제온이 자기 눈치를 보는 걸 알아챘는지, 에드나가 손바닥으로 자신의 귀를 덮으며 말했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거나 다름없는 행동이다.

진짜 우리의 대화를 듣지 않을 생각이라면 자신은 빼고 방음막을 쳤어야 한다.

나는 에드나가 신경 쓰이긴 했지만, 일단은 눈앞의 문제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 얘기가 갑자기 왜 나와? 네가 외부인이라 후계자로 못 받아들이겠다며 사람들이 집단 파업이라도 하든? 그래서 데릴사위로 들어가시겠다?"

"파업은 안 했지만 비슷해. 다들 이올렌 님께서 그 사업을 이어받길 바라시는데, 그분은 사람 관리나 서류 작업 같은 건 질색하셔서···. 내게 로베르토 가로 들어와 달라고 청혼하셨어."

제온이 사무적인 내용의 말을 늘어놓으며 쑥스럽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그러면서 몸을 비비 꼬는 모습이 실로 가관이다.

저 반응으로 보건대 정보 단체 어쩌고 하는 건 그냥 변명일 뿐이고, 이올렌에게 반한 게 틀림없다.

'데이트라는 설정으로 정보를 수집한다며, 같이 여기저기 쏘다닐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성실한 사람인 줄 알았던 제온이 일 핑계로 데이트를 하고 다녔을 줄이야.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고양이도 아닌 네가 그럴 줄은 몰랐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그래서 편지는 써 줄 거야, 안 써줄 거야?"

"이올렌 씨가 그렇게 좋아?"

"좋으니까 결혼하지, 싫으면 하겠어?"

당연한 걸 왜 물어보냐는 듯, 제온이 부끄러워하며 눈을 흘겼다.

완전히 푹 빠졌나 보다. 저 모습을 보니 조금 걱정스럽다.

아무리 제온이 똑 부러지는 아이라고는 하나, 상대는 프로 정보원이자 한스의 손녀다.

"이올렌 씨는 네가 좋아서 청혼한 거래?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동안 네게 서류 작업을 떠넘길 생각이라거나, 한스 그 양반이 강요했다거나···."

"떠넘기는 거 아니야. 나도 이 일이 재밌고 좋아. 더 잘해 보고 싶다는 욕심도 나고, 한스 님께서 재능도 있다고 하셨어. 그리고···."

"그리고 뭐?"

"이올렌 님은···, 그게···. 내가 귀여워서 좋대···."

제온이 부끄럽다는 듯,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못 볼 것을 본 기분이다.

대체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남의 결혼에 참견해서 이런 꼴을 봐야 하는 걸까?

"그, 그래···. 편지 써줄게, 행복하게 잘 살아라."

"고마워."

"아, 그리고 편지를 보내는 김에 시온의 짐도 리벨론 가로 보낼 수 있을까? 가족 초상화까지 보내는 건 의심을 살 테니 안 되겠지만, 옷이나 장신구 같은 거···. 나에게는 필요 없는 물건이지만, 너희 부모님이나 비비에게는 소중한 물건일 수도 있잖아."

원래는 제온을 외진 곳에 따로 불러내서 하려던 말이었다.

하지만 에드나가 방음 마법도 펼쳐 주었으니, 지금 해치우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바로 얘기를 꺼냈다.

"그래야 마음이 편할 것 같으면 그렇게 해. 그럼 형은 내일까지 본가로 보낼 물건들 정리하고, 편지도 써 줘."

"어···, 그래."

내가 진짜 시온이 아니란 걸 아는 에드나 앞에서, 제온에게 형이라 불리니 괜히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나와 제온을 바라보는 에드나의 묘한 시선이 신경 쓰였다. 이럴 거면 대체 귀는 왜 막은 건지 의문이다.

"마법을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편히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별말씀을요. 대화가 끝나셨다면 이제 마법을 거둬도 될까요?"

"네."

에드나가 마법을 거두고 나자, 제온은 에드나가 자신에게 맡긴 편지를 부치러 간다며 저택을 나섰다.

"그럼 저는 이만 짐을 정리하러···."

"아, 신경 쓰이네···."

내가 5층으로 올라가 보겠다는 말을 하려던 찰나.

에드나가 고민된다는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세르펜스가 내 청혼서를 처분한 것에 대해 조언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아니면 제온이 나를 형이라 부른 것 때문에? 그것도 아니라면 어쩌다가 제온에게 내 정체를 들킨 건지 궁금해졌나?'

첫 번째 이유라면 내가 에드나를 붙잡고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다.

그리고 나머지 이유 중 하나라면 지금 얘기를 해두는 편이 나을 것 같다.

별것도 아닌 일로 계속 신경 쓰이게 만들기도 뭣하고, 딱히 숨길 일도 아니니까.

"저는 다시 5층으로 올라갈 건데, 에드나 씨는 어쩌실래요?"

에드나가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 고개를 들어 올려, 본관 건물을 우러러보았다.

그러고는 마치 계산식이라도 외는 것처럼, '계단 한 칸에 4초의 수명이라는 건, 2초에 한 칸을 오르면 2초의 이득이···.' 하고 중얼거렸다.

"같이 가요."

에드나가 결의에 찬 표정으로 씩씩하게 대답했다.

정말 마음을 굳건히 다잡았는지, 에드나는 빠르게 계단을 오르면서도 단 한 번도 멈춰 서지 않았다.

마법으로 몸을 띄우는 꼼수도 부리지 않았다.

5층에 발을 딛고 나서야 에드나는 계단 난간을 붙들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마에 흐르는 땀줄기가 안타까운 한편. 끝까지 걸음을 늦추지 않은 그녀의 정신력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다섯 층계를 오르면서 저렇게까지 헉헉거리는 건 인간적으로 너무하다.

제온도 저 정도는 아닐 텐데.

"마법 연구도 좋지만, 기초 체력은 키워놔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누나가 그러는데, 오래 앉아있는 일을 하는 사람일수록 부지런히 운동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정작 그렇게 말한 누나 본인은 안 지켰지만.

그것을 지키지 않았을 때의 후폭풍을 몸소 보여주었다.

"헉, 허억···. 누나가, 있었어요···? 아니, 것보다··· 헥···. 복도에서 그런 얘기를 해도···."

"에일리히 님이라면 집무실에서 일하고 있으니까 괜찮아요."

"하아···, 그렇···."

숨이 가빠 말조차 제대로 못 하는 에드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우리 누나보다 더한 후폭풍이 그녀를 덮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이건 그냥 심하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심각하다고 표현해야 한다.

'보육원에서는 운동을 안 하는 만큼, 사소한 일에 부지런히 움직이던 사람이었는데···.'

테러 소식을 접한 뒤.

공작저로 돌아오는 내내 온종일 마차에 처박혀, 옴짝달싹 못한 것이 치명적으로 작용한 듯하다.

"연구실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한 것도 아니고, 밖에 나가 고생하다 돌아왔는데 체력은 더 떨어지다니···!"

호흡이 가라앉고 나자 억울함이 치밀었는지, 에드나가 난간에 몸을 기대며 서러워했다.

나는 딱하다는 눈길로 에드나를 바라보며 손수건을 건넸다.

에드나가 손수건을 받아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냈다.

"앞으로 제가 체력 단련을 받을 때, 에드나 씨도 같이 운동합시다. 아이를 돌보는 데 가장 중요한 건 뭐니 뭐니 해도 체력이잖아요."

"정말 그래야겠어요."

우리는 운동의 중요성을 절감하며 내 방으로 향했다.

방문을 열자 세르펜스가 두고 간 침대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별관에서 생활할 땐 매일 아침 꼬박꼬박 침대를 챙겨갔었는데. 5층은 자신의 공간이니 눈치 볼 거 없다 이거겠지.

"완전한 분리 수면은 못 하셨지만, 잠자리 분리는 성공하셨나 보네요."

"제 잠버릇이 워낙 심해서 처음부터 떼어놓고 잤습니다. 자다가 실수로라도 아이를 깔아뭉개면 엄청난 죄악감이 밀려들 것 같아서요."

"세르펜스 님이시라면 선우 씨가 아니라, 거대한 바위에 깔려도 멀쩡하실 것 같은데···."

에드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내가 세르펜스를 연약한 어린아이로 보는 게 어처구니없는가 보다.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녀석의 체격을 보면 나도 가끔 '내가 너무 싸고도나?' 싶을 때가 있긴 했다.

하지만 어쩌랴, 내용물은 여리디여린 어린아이인데.

몸이 좀 튼튼하고 키가 크다고 해서 아이를 어른으로 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반대로 키와 체구가 작다고 해서 다 큰 어른을 아기 취급하는 것도 좀 아니올시다 싶다.

"그건 그렇고, 집사님도 선우 씨의 정체를 알고 계셨나 보네요."

다 큰 아기를 키우는 에드나가 제온 얘기를 꺼내며 화제를 돌렸다.

세르펜스가 처분한 청혼서 때문이 아니라, 제온에 관한 일이 궁금해서 따라온 건가 보다.

"아무래도 가족이니까, 제가 시온이 아니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던 거겠죠."

"그냥 선우 씨가 소심함과 거리가 멀어서 들킨 게 아닐까요? 본래의 시온 씨는 소심한 사람이었다면서요."

"저도 나름 소심한 사람인데···."

"차라리 악마가 평화를 사랑한다는 말을 믿겠어요."

내가 소심하게 반박해 보았으나 에드나는 조금도 믿어주지 않았다.

안 그래도 억울한데, 예시가 지나칠 정도로 얼토당토아니하여 억울함이 배가 됐다.

"그런데 선우 씨가 형이 아니라는 걸 알고도, 집사님은 선우 씨를 형이라고 부르네요?"

"아무래도 사람들 눈치가 있잖아요. 공석에서는 서로 존댓말을 써야 한다는 공작저 룰 덕분에 티가 안 나지만, 사석에서 데면데면하게 굴면 남들이 이상하게 볼 테니까. 그래서 그냥 가족처럼 지내기로 했습니다."

"혹시 리벨론 가문 사람들은 전부 선우 씨에 관해 알고 있는 거예요?"

"아니요,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제온과 비비뿐입니다. 아는 사람이 많아서 좋을 건 없으니까, 제온이 협조해 줘서 잘 숨기고 있어요."

"그렇구나···."

에드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단 묻는 말에 대답해 주고 있기는 한데, 이런 걸 왜 궁금해하는지 의문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런 건 왜 물어봐요?"

"제가 원래 고아라서 그런가, 아니면 선우 씨가 워낙 밝은 사람이라서 그런가···. 그동안 선우 씨가 가족에 관한 얘기를 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걸 이제서야 깨달아서요."

"그냥 얘기할 일이 없어서 그런 거죠."

"그럴 수도 있지만, 선우 씨는 정이 대단히 많은 사람이잖아요. 저만 해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가족이 보고 싶을 때가 종종 있는데···. 선우 씨는 괜찮아요?"

언젠가 이런 상황이 올 줄 알았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이른 타이밍에 살짝 당황스러움이 밀려들었다.

그래도 감정을 마주하기로 했으니까. 어차피 괜찮다고 거짓말을 해 봤자 들킬 테니까.

게다가 에드나도 가족이 보고 싶다고 말했으니까.

나만 그러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 묘한 위안과 함께 용기를 가져다주었다.

"괜찮을 리가요. 당연히 그립기도 하고, 보고도 싶죠."

"혹시···, 선우 씨. 고향에 두고 온 아이가 그리워서 세르펜스 님에게 그렇게 집착하는 거예요?"

에드나가 몹시 진지한 표정으로 큰일 날 소리를 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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