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644화 (644/925)

644회

75. 공작님과 백부님 (12)

"에드나 씨는 아니마 씨를 참 좋아하시나 봐요."

"당연하죠. 그렇게 착하고 순수하고 귀여운 아이를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내가 가볍게 툭 던진 말에 에드나가 팔불출적인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세르펜스를 찬양하는 공작저 식구들을 향해, 아니마가 더 대단하다며 똑같이 자랑으로 맞받아친 사람답다.

나도 모르게 '와···.' 하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 아이가 선우 씨에게 모나게 굴어도,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아주세요."

그렇게 말하며 에드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내가 탄성을 흘린 이유를 오해한 모양이다.

'아니마가 착하고 순수하고 귀엽다는 말이 어이없어서 그랬던 게 아니라, 에드나의 팔불출 기질이 놀라워서 그랬던 건데···.'

세르펜스는 내 절친 자리를 위해서라면 이간질도 불사하겠다는 의사를 숨기지 못했다.

심지어는 녀석이 내 앞으로 온 청혼서를 몰래 폐기해버렸다는 소식까지 접한 참이다.

그러니 고작 툭툭거리며 새침하게 구는 것쯤이야.

아무런 위협도 안 되고, 어린아이 장난질처럼 느껴질 뿐이다.

"괜찮아요, 이해합니다. 저는 에드나 씨와 함께 다니는데, 자신은 그러지 못하니 뿔이 나서 그런 거겠죠."

"그런 이유도 있기야 하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에요. 그 아이는 예전부터 제게 접근하는 사람이 생기면 경계하는 게 습관이 됐거든요."

세르펜스도 내가 누군가를 조금만 챙겨준다 싶으면 경계부터 했다.

무척이나 공감되는 이야기라, 우리 집 애도 그렇다는 말을 막 꺼내려는 순간.

"가족 하나 없는 어린 여자애라고 저를 함부로 대한다거나, 친절한 척 다가와서 제 연구 성과를 빼돌리려 한다거나···. 그런 사람들을 하도 많이 봐서요."

이어진 그녀의 말에 나는 꺼내려던 말을 고이 접어 꿀꺽 삼켰다.

경계하는 건 같았으나 그 이유가 달랐던 것이다.

배은망덕한 느낌이 없잖아 있는 세르펜스와 달리, 굉장히 기특한 이유였다.

잘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에드나는 보육원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으니까. 아니마는 일찍이 에드나를 독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테다.

'하지만 에드나를 지켜줄 수 있는 건, 아니마뿐이었겠지.'

그럴 능력이 있다는 것이 보육원의 아이들과 아니마의 결정적인 차이다.

그렇기에 에드나에게 조금만 해가 된다 싶으면, 무턱대고 공격성을 드러내는 게 아닐까 싶다.

'에드나는 어째서 아니마가 자기 없이도 꿋꿋하게 잘 살 수 있을 거라 확신하는 건지, 늘 의문이었는데···.'

이제야 실마리가 잡혔다.

아니마는 자신을 보호해 줄 정도로 강한 아이니까, 그렇게 생각해서 그랬나 보다.

"그런 일이 잦았나 봐요?"

"네. 아시다시피 마법은 특출난 이들만 배울 수 있는 학문이잖아요? 그중에서도 특별한 이들만 모아 놓은 곳이 마탑인 거고. 그렇기 때문에 탑의 마법사들은 하나같이 자존심이 세요. 그래서 저 같은 고아가 자신들보다 실력이 뛰어나다는 걸 인정하지 못하나 봐요."

에드나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조소를 한껏 머금었다.

마치 그런 같잖은 놈들에게 기죽을 수 없다고 말하는 듯한 몸짓이다.

"그래서 제 실력을 그 아이 덕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주제에 열등감 때문에 그 아이를 꺼리고···. 그러면서도 그 덕을 같이 보자며, 제 노력의 결과물을 빼앗으려 들죠"

가시가 잔뜩 돋아난 비아냥거림을 듣고 있자니, 마탑에 방문했던 날. 에드나를 향해 '시녀' 운운하던 마법사의 발언이 떠올랐다.

'그놈 이름이 뭐였더라? 어감이 벌레랑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중요하지도 않은 놈의 이름을 기억하느라, 소중한 뇌용량을 낭비할 수는 없다. 그냥 벌레 마법사라고 치자.

아무튼 그런 벌레 마법사와 똑같은 사고방식을 지닌 놈들이 한둘이 아니었나 보다.

"제가 그 아이 곁에 당당히 서있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에드나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예전이라면 그냥 '열심히 살았나 보다, 대단하네. 훌륭한 보호자야!' 정도의 감상만 떠올렸을 텐데.

그 말이 지금은 표면적 의미 그대로, 아니마와 함께 있고 싶어서 노력했다는 뜻으로 들렸다.

'자신의 피보호자에게 집착하는 건 에드나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이걸 지적 해야 해, 말아야 해?'

고민스러웠지만, 일단은 좀 더 지켜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때로 아니마에게 단호하게 군다거나 개인 시간을 갖는 등의 노력을 하는 걸 보면, 아주 모르는 건 아닌 것 같으니.

'하지만 아니마 말고는 기댈 곳이 없으니까, 나아지는 것 없이 계속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던 거겠지.'

사람이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 당당하게 개인으로서 존재하려면, 곁에 더 많은 사람이 필요하다는 게 참으로 역설적이다.

그런 아이러니를 느끼며. 나는 짐짓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척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명색이 마탑의 마법사란 자들이 참 옹졸하고 못났네요."

"제 잘난 맛에 사는 사람들이 더는 잘남을 뽐내지 못하게 되어버렸으니, 갈수록 옹색해진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긴 해요. 그렇다고 이해해 주고 싶진 않지만요."

아니마의 천재성 앞에서 주눅 들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온 에드나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그녀라면 그들을 이해하지 않을 자격이 있다.

"아! 갑자기 한탄을 늘어놓아서 죄송해요. 이럴 생각으로 얘기를 나누자고 한 게 아니었는데···."

"괜찮습니다. 대화의 흐름이라는 게, 원래 어디로 튈지 모르는 거잖아요?"

"선우 씨와 얘기하다 보면 유독 더 그런 것 같네요."

얘기가 삼천포로 빠진 경험이 별로 없는 건지 에드나가 장난처럼 받아쳤다.

그녀의 입가에 유쾌한 미소가 잠시 번졌다가 오래지 않아 일그러졌다.

"이상하네요. 그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얘긴데···. 아니마, 그 아이에게는 물론이고 원장님에게도···."

내가 세르펜스에게 가족들이 그립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던 것처럼, 에드나도 그랬나 보다.

아니마는 에드나가 겪는 부조리함과 연관이 있었고, 보육원의 원장 선생님은 에드나가 마법을 배울 수 있도록 지원해 준 사람이다.

양쪽 모두 한탄을 늘어놓기에 적합한 상대가 아니다.

"아무튼, 들어줘서 고마워요."

에드나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감사를 전했다.

저 미소도 마탑에 방문했던 날 보았던 거다.

그때는 자세한 사정을 묻지 말아 달라는 말과 함께 저런 미소를 지었는데, 이제는 그 반대가 되었다.

"괜찮습니다. 들어주는 정도가 아니라 같이 욕도 해 드릴 수 있으니까, 대화 상대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편히 얘기해 주세요."

"선우 씨도 털어놓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얘기가 생긴다면 제게 말씀해 주세요."

"네, 그럴게요."

"그냥 반사적으로 생각 없이 대답한 거 아니죠?"

미심쩍다는 듯 에드나가 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로 그 말대로였던지라, 나로서는 뜨끔하며 어깨를 들썩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말을 한 귀로 흘리면서도 입으로는 '네, 네.' 잘도 대답하는 아이들을 많이 봐 와서요."

이것이 바로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라는 것인가 보다.

"이곳에 오래 머무르고 싶다는 마음은 진심이겠지만, 역시 가족들이 많이 보고 싶은가 봐요."

"갑자기 왜 이렇게 예리해지셨지? 혹시 에드나의 탈을 쓴 유지스세요?"

"제가 보육원에서 얼마나 많은 아이를 봐 왔는데 그걸 몰라보겠어요? 자신을 버린 가족들 따위 필요 없다며 떵떵거리는 아이일수록, 외려 가족들을 더 그리워하더라고요."

"전 버려진 거 아닌데···."

"그냥 비유가 그렇다는 거죠."

내 머쓱한 중얼거림을 놓치지 않고 에드나가 반박했다.

정곡을 제대로 찔린 탓에 어색한 웃음이 자동으로 흘러나왔다.

"아하하···. 그게 사실 제가 너무 갑자기 이 세계로 불려온 터라, 가족들에게 인사를 못 했거든요. 마음의 준비는 당연히 못 했고···."

"네?! 대체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예요?"

"어쩌다가고 자시고, 그냥 '자고 일어나보니 이세계였다.'라는 전개입니다."

차원 이동 소설 같은 게 존재하지 않는 이 세상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전개였던 걸까?

에드나가 어안이 벙벙하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인상을 찡그렸다가 하며 내 말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저···, 선우 씨를 이곳으로 불러온 건 룩스메아 님 아니에요?"

"그럼 마왕이 저를 불러서 세르펜스를 우쭈쭈해 주라고 시켰겠습니까?"

"···룩스메아 님은 '우쭈쭈'를 주문하신 거예요?"

"사실 우쭈쭈는 제 선택입니다."

"그렇···군요."

내 이실직고에 에드나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세르펜스의 세례명을 생각해 보면, 룩스메아도 나 못지않게 세르펜스를 우쭈쭈해 주고 싶은 것 같던데.

그냥 룩스메아가 시켜서 그랬다고 할 걸 그랬나 싶다.

"어쨌든 갑자기 불러왔다니, 룩스메아 님께서도 정말 너무하시네요. 최소한 다녀오겠다는 인사 정도는 할 시간을 주시지···."

함께 욕해 주겠다는 말을 꺼낸 건 나였건만. 그 약속을 먼저 지킨 건 에드나였다.

물밀듯 감동이 왈칵 밀려들었다.

"에드나 씨···, 지금 제 편을 들어주려고 신을 욕하신 겁니까?"

"네? 저는 욕 비슷한 단어도 안 썼는데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에드나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하다는 말을 욕설로 치부하기에, 에드나가 알고 있는 육두문자의 폭이 너무 넓고도 방대했나 보다.

감동으로 찔끔 흘러나올 뻔했던 눈물이 쏙 들어가 버렸다.

그래도 누가 내게 공감해주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긴 했다.

"아무튼 고맙습니다. 욕은 안 했지만, 공감해 주셔서."

"···룩스메아 님께 악감정이 많으신가 봐요?"

내 말을 '욕해주지 않아서 아쉽다'쯤으로 받아들인 걸까?

에드나가 고민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혹시 지금 제 신앙심을 시험해보는 거 아니시죠?"

"그런 거 아닙니다."

"정말 죄송해요. 신의 사자 앞에서 신을 욕한다는 건 아무래도 조금···. 신앙심 이전의 문제랄까요···?"

"저 말고 다른 사람 앞이면 괜찮은 겁니까?"

"······."

내 물음에 에드나가 입을 꾹 다물고, 괜히 방안을 둘러보는 척했다.

방에 들어온 지가 언젠데. 이제 와서 방을 구경한다는 핑계가 먹힐 리가 없다.

"에드나 씨, 룩스메아를 욕한 적 있구나?"

"···삶이 지치고 힘들 때,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존재가 바로 신 아닐까요?"

에드나가 그윽한 표정으로 천장 모서리를 올려다보며 아련하게 말했다.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룩스메아를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겼다는 소리다.

하긴 내가 살던 세상에서도 무슨 일이 생기면, 사람들이 '신이 있다면 대체 왜!' 하며 신을 탓하곤 했으니.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 세상은 신이 확실하게 존재하니까, 멘트가 조금 다르긴 하겠지.

나라면 '신 새끼, 너 일 제대로 안 할래?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라도 있어?' 같은 말을 외칠 것 같다.

그리고 에드나라면 내가 상상조차 못 할 욕설을 퍼부었을 게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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