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7회
75. 공작님과 백부님 (15)
"짐이라면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진짜 시온이 쓰던 물건들이요."
어차피 이곳은 응접실이라 방음은 문제가 되지 않기에, 나는 알타르의 질문에 주저 없이 대답했다.
내가 시온이 아니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에일리히. 그리고 내 정체가 누구누구에게 까발려졌는지 전부 알고 있는 세르펜스.
이 두 사람을 제외한 모두가 당황을 금치 못했다.
"그런 얘기를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해도 됩니까?"
"대체 몇 명에게 들킨 거예요?!"
"에드나, 그건 또 무슨 얘긴가요? 대체 몇 명에게 들킨 거냐니···. 혹시 알타르 님 말고도 아는 사람이 더 있어요? 가능성이 있는 건, '시온'의 가족인 제온 님이려나요? 그러고 보니 작년에 악마 숭배자가···."
"후우···."
알타르가 가장 먼저 내게 질문했고, 그 얘기를 들은 에드나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으며. 그 소리를 들은 유지스가 분석 및 추측에 들어갔다.
그리고 윈스톤은 골치 아프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시다시피 저는···. 아, 에일리히 님은 아직 모르시는구나? 아무튼 저는 신 룩스메아께서 이 대륙을 지키기 위해, 시온의 몸에 집어넣은 존재잖아요?"
어쩐지 신의 사자로서의 내 사명이 '세르펜스 우쭈쭈'였다가, '대륙 구하기'였다가. 오락가락 하는 느낌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원래 아이들이 곧 이 세상의 미래니까.'
일행들도 내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넘어갔다.
에일리히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어리둥절하고 있었지만.
"시온 경, 잠깐···. 그 말씀은 즉, 작년에 제가 잡아들였던 악마 숭배자의 말이 사실이었다는 뜻입니까?"
"저와 제온을 수도 변두리의 저택으로 유인했던 그 악숭이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네, 맞습니다. 아! 전부 맞는 건 아니고 반절만요. 제가 시온이 아니라는 건 맞고, 시온의 영혼이 아직 이 몸 안에 남아있다는 말은 틀렸고. 이제 이해되셨죠?"
"······."
내 대답에 에일리히가 멍하니 눈을 슴벅거리다가 죄 없는 알타르를 노려보았다.
이렇게 중요한 사실을 왜 자신에게는 알리지 않고, 혼자서만 알고 있었냐고 따지는 듯한 눈빛이다.
"시온 님의 정체에 관한 건 교단에서도 극비 중의 극비입니다. 게다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에일리히 님께서 교단을 나가신 이후라서 더더욱 말씀드릴 수 없었습니다."
알타르가 정중하고 조심스러운 어투로 '그러게 누가 교단을 박차고 나가랬습니까?'라는 뜻을 전했다.
그에 할 말을 잃은 에일리히가 공연히 헛기침해대며, 알타르를 노려보던 시선을 거뒀다.
"시온 님, 이제 됐으니 계속 말씀해 주십시오."
뭐가 됐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알타르가 개운하다는 표정으로 하다 만 설명을 계속해 달라고 말해왔다.
평소 에일리히에게 쌓인 것이 많았나 보다.
"아, 예···. 어쨌든 시온의 물건들은 제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데다가, 세르펜스가 더 좋은 물건들을 사 줘서 쓸 일이 없거든요. 그래서···."
나는 시온의 짐을 리벨론 가로 보내기로 마음먹은 이유를 설명했다.
오늘만 벌써 세 번째다. 같은 설명을 반복한 게.
제온과 에드나 앞에서 한 번. 그리고 윈스톤에게 한 번. 그리고 지금.
그 탓에 지루함이 얼굴에 드러나기라도 한 것일까?
세르펜스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삐죽 입술을 내밀었다.
이런 문제를 자신에게 상담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먼저 얘기한 것이 불만스러운가 보다.
"기왕 짐을 보내실 거라면, 그냥 전부 보내버리십시오. 악마 숭배 세력은 신의 사자께서 진짜 '시온 리벨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쪽을 배려하느라 물건을 분류하여 보내는 것보다, 쓸모없는 것을 전부 치워버린다는 느낌으로 행동하는 편이 차라리 낫습니다."
내 얘기를 끝까지 경청한 알타르가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리벨론 가로 보낼 물건들을 분류하느라 애쓴 시간이 허공에 날아가는 소리다.
그 고생을 했는데 전부 헛짓거리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허망함이 나를 덮쳤다.
"그렇다면 차라리 전부 버려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아! 진짜 버리라는 건 아니에요. 그냥 버리는 척만 하고, 나중에 모든 일이 끝난 뒤에 숨겨 놨던 물건들을 리벨론 가로 보낸다면···."
"그건 너무 극단적입니다. 시온은 그동안 자신의 정체를 의심받지 않고자, 직접 리벨론 령에 방문하거나 동생을 프라시더스 가에 취직시키는 등. 적극적으로 '시온 리벨론'을 연기해 왔습니다."
"아! 그렇다면 갑자기 모든 물건을 버리는 건, 되려 리벨론 가문을 보호하기 위한 행동으로 비칠 수도 있겠네요. 적당한 거리를 유지가 관건이려나···."
내가 허탈해하느라 잠시 넋 놓은 사이.
유지스와 세르펜스가 대화를 주고받으며, 시온의 물건을 버려서는 안 되는 이유를 토론했다.
제온을 취직시킨 게 나라는 세르펜스의 헛소리는 무시해도 상관없다.
하지만 그 얘기를 듣고 나니, 내가 리벨론 가로 다달이 보내는 돈이 떠올랐다.
"혹, 매달 리벨론 가로 보내는 돈 때문에 걱정되십니까?"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세르펜스가 귀신처럼 알아채고 질문해 왔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이 안심하라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거라면 괜찮을 겁니다. 공작저에 비하면 리벨론 영주성의 경비는 허술합니다. 그런데도 이제까지 악마 숭배 세력이 리벨론 가를 건드리지 않고 있는 거로 보아, 놈들은 그 돈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을 겁니다. 기껏해야 '육체를 빌려 쓰고 있는 것에 대한 대가'쯤으로 생각하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즉, 악숭이들은 저를 '남의 귀한 자식 몸을 멋대로 빼앗아 놓고, 돈으로 퉁치려 하는 놈'이라고 생각한다는 거네요?"
세르펜스의 말을 요약해 놓으니, 세상에 쓰레기도 이런 쓰레기가 없다.
무슨 정수기 렌탈하는 것도 아니고.
'사람 몸을 빌려 쓰면서 정기적으로 돈을 내는 신의 사자'가 가당키나 한 문장인가?
"그뿐만 아니라, 제게 리벨론 가의 막내를 후원하도록 지시하셨잖습니까."
"지시가 아니라 부탁이긴 한데···. 아니, 그럼 악숭이들은 저를 '남을 부려서 제 마음의 빚을 갚는 놈'으로도 보고 있다는 겁니까?!"
막상 내뱉고 나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애초에 세르펜스에게 비비를 후원해 달라고 부탁했던 게, 내 마음의 빚을 덜기 위함이었으니까.
"앞서 이단 심문관님께서 말씀하셨다시피, 그들이 당신의 진짜 가족이 아니라는 사실은 악마 숭배자들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인질이 될 수 없다 여겨 그들을 건들지 않고 있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시온 리벨론'의 신체를 쓰는 것에 대한 보상은 충분히 했으니. 이제는 리벨론 가의 일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멋대로 몸을 빌려 써 놓고, 멋대로 보상을 떠안겼으니. 그다음은 나 몰라라 할 차례라는 건가?
삼위일체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쓰레기가 되라는 권유였다.
'하지만 리벨론 가문의 안전을 생각하면 그게 최선이긴 해.'
공작가에 취직해서 공작의 신임을 받고 나니, 가문을 무시한다며 시온을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생길지도 모르지만.
그건 비비가 억울해할 일이다.
"그러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우선 짐을 치워야 할 정당한 사유를 만들어야 합니다."
"안 쓰는 물건이라는 이유만으로는 부족해요?"
"그러기에는 짐을 너무 오래 방치했습니다. 더는 방에 둘 공간이 없어서, 처치가 곤란해져 리벨론 가로 보내는 것처럼 보이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방을 채울 만한 물건들은 제가 알아서 준비해 둘 테니, 당신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짐 정리에 쓴 시간과 노동력이고 나발이고, 슬슬 짐을 보내지 않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자신한테 먼저 상담하지 않았다고, 날 곤란하게 하려고 이러는 건 아니겠지?'
무척이나 후회스럽다.
내가 어쩌자고 짐을 치우겠다는 소리를 해대서 이런 지경까지 오게 된 걸까?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아공간 주머니에 처박아 두든, 창고가 된 동쪽 별관에 짱박아 놓든 했을 텐데.
"···갑자기 공작이 보좌관 방을 선물로 꽉꽉 채우는 게 더 부자연스럽지 않아요?"
"저희가 신경 써야 하는 건, 당신이 '신께서 이 세상에 내려보낸' 신의 사자라는 사실을 아는 악마 숭배 세력입니다."
나는 평범한 신의 사자가 아니니. 그 정도의 대우를 받는 게 당연하다는 뜻이다.
그게 정말로 당연한 게 맞는지는 나도 모른다.
"신의 사자께서는 리벨론 가문이 많이 신경 쓰이십니까?"
알타르가 넌지시 질문했다.
이제까지 오고 간 대화를 들어 놓고 몰라서 묻는 건 아닐 테고.
단순한 확인 절차이자, 대화에 끼어들어 화제의 방향성을 바꾸기 위한 물음이다.
"아무래도 그렇죠. 제가 이 몸에 들어온 탓에 악숭 세력에게 노려지면 너무 미안하잖아요."
"알겠습니다. 그럼 교황 성하께 말씀드려, 조치를 취해 보겠습니다."
"어···, 정말요?!"
"티 나게 보호하면 되레 역효과만 날 뿐이니, 리벨론 령으로 많은 병력을 보내진 못 할 겁니다. 아마도 이단 심문관이나 실력 있는 성기사 한둘을 몰래 보내는 정도에서 그치겠지요."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다.
아니, 알타르의 말대로 많은 병력을 주둔시켜 놓으면 외려 위험해질 뿐이니. 최선의 조치를 다 하겠다고 약속한 셈이다.
"그건 그렇고,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하세요."
"신의 사자께서는 리벨론 백작가와 이곳에 모여 계신 분들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하십니까?"
알타르가 이단 심문관으로서 내게 질문했다.
만약 악숭이들이 리벨론 가문의 누군가를 인질로 잡고 협박한다면.
세르펜스를 비롯한 일행을 위험에 빠트리더라도, 그들을 구할 용의가 있느냐는 물음이다.
그 물음을 듣자마자, 머릿속에 답이 떠올랐다.
"그야 여기 있는 사람들이죠."
당연한 얘기다.
리벨론 가 사람들에겐 정말 미안하지만. 내겐 더 긴 시간을 함께하고 가까이에서 동고동락한 이들이 더 소중했다.
"그러니까 리벨론 가문 사람들이 위험에 처하는 일이 아예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쩐지 입안이 쓰다.
기분에 의한 거라서 청량한 세계수 잎 차로 입안을 헹궈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리벨론 가로 보낼 편지는 또 어떻게 쓴담?'
안 그래도 뭐라고 써야 할지 고민스러웠는데 더 어려워졌다.
인상을 있는 대로 구기며 포크로 컵케이크를 푹푹 퍼먹고 있자니, 새 컵케이크 하나가 리필되었다.
내 앞접시에 컵케이크를 리필한 사람은 세르펜스였다.
단것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니까, 하나 더 먹으라는 뜻일 테다. 기특해 죽겠다는 눈으로 쳐다보자 녀석이 살포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알타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보다 몇 개월 전 일어난 악마 소환에 관해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혹시 그 악마들의 행방에 관해 아시는 바가 있으십니까?!"
그들을 처치했다는 말도 아직 하기 전이건만. 알타르가 반색하며 눈을 빛냈다.
악마가 둘이나 연속으로 소환된 것만으로도 사람들이 불안해하기에 충분한데, 그 행방까지 알 수 없으니.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끌어안고 있는 심정이었겠지.
그러니 알타르가 저렇게 좋아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앞으로 악마를 처치하면 제때제때 보고해야겠네···.'
내가 속으로 반성하는 동안.
세르펜스는 어제 에일리히에게 말했던 그대로 조작된 보고를 올렸다.
그렇게 조작된 보고 내용을 또 한 번 조작하여, 휴마누스가 악마들을 처치한 것처럼 공표해 달라는 말과 함께.
녀석의 보고가 끝나자, 알타르는 잔에 남은 세계수 잎 차를 단숨에 비워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는 오늘 들은 얘기들을 보고하러 나갔다 오겠습니다. 다시 올 땐 정식 방문이 아니라 몰래 숨어들 예정이니, 이따 자정쯤에 후문 쪽 경비를 느슨하게 조정해 주셨으면···."
"저, 부탁이 있습니다."
세르펜스가 알타르의 말을 끊었다.
용건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자기가 멋대로 일어나 버렸다고 생각했는지, 알타르가 머쓱해 하며 도로 자리에 앉았다.
"아직 하실 말씀이 남아있었군요. 죄송합니다, 악마가 처치되었다는 이 기쁜 소식을 빨리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습니다."
"앞으로는 바로바로 보고하겠습니다."
"탓하려고 한 말이 아닙니다. 바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요. 그보다 부탁할 일이라는 건 무엇입니까?"
"이번에 악마들과 싸우며, 제 실력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제가 저택에 머무는 동안 대련에 응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세르펜스의 말인즉.
대련하게 되면 사람들 눈에 띌 수밖에 없으니, 매일 정문으로 출퇴근해 달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