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8회
75. 공작님과 백부님 (16)
* * *
알타르가 떠나고. 우리는 차와 컵케이크를 마저 즐긴 뒤, 응접실에서 나와 각자 할 일을 하기 위해 흩어졌다.
나는 세르펜스에게 예전 서류들을 가져와 달라고 부탁해 놓고 방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녀석이 오기를 기다리며, 리벨론 가로 보낼 편지 초고를 작성해 둘 요량으로 빈 종이를 펼쳐 놓았다.
"받는 사람은···."
펜을 꺼내 들고, 나는 무심결에 '리벨론 백'까지 썼다가 흠칫 손을 멈췄다.
어지간히 사이가 나쁘지 않고서야 자기 부모를 성과 작위로 지칭하는 자식은 없다.
나는 방금 쓴 글자에 줄을 죽죽 그어 까맣게 지워버렸다.
그러고는 펜을 고쳐 잡고 다시 글자를 적었다. 아니, 적으려고 했다.
"······."
어머니, 아버지께.
그 몇 글자를 쓰는 게 왜 이렇게 힘든지. 손가락은 고작 'ㅇ' 하나만 적어놓고, 우뚝 멈춰버렸다.
"이게 뭐라고 어렵냐···."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건만.
왠지 모르게 무안한 기분이 들어, 펜 꽁무니로 머리를 긁적이며 혼잣말을 중얼거려 보았다.
"시간 날 때, 부모님이랑 누나한테 편지나 써 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써 봤자 보낼 수 없는 편지지만. 나중에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때, 가지고 갈 수도 없겠지만.
그래도 그냥 그들에게 내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원래 세상에 돌아가고 난 후에도. 이곳에서 내가 겪은 일들은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겠지···?'
소설 속에 들어갔다 왔다는 얘기만으로도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서 최종 보스를 어르고 달래 함께 마왕을 물리치고, 효도까지 받고 왔다는 소리를 한다?
꿈꿨냐는 소리만 들으면 차라리 다행이지.
'어차피 돌아가서도 할 수 없는 얘기라면,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편지로 적자. 기왕이면 내가 살던 세상의 언어로.'
그렇게 마음먹긴 했으나 바로 행동에 옮길 수는 없다.
당장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나는 입가에 번지는 쓴웃음을 무시하고, 펜을 돌리며 굳은 손가락을 풀었다.
방금 썼던 'ㅇ'에다가 가위표를 치고 이번에는 '부모님께'라고 적어보았다.
이것도 먹먹한 기분이 없잖아 있지만, '어머니, 아버지께' 보다는 쓰기 수월했다.
아직 본격적인 내용은 쓰지도 못했는데 벌써 기운이 쭉 빠졌다.
-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고 몇 초 뒤. 세르펜스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세르펜스가 오기 전에 초고를 완성해 둘 생각이었건만, 정작 적은 건 고작 네 글자뿐이라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선우?! 무슨 일이라도···, 음···."
당황하며 다가온 세르펜스가 내 앞에 놓인 종이를 보고 침음을 흘렸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 녀석은 안절부절못하며 내 주변을 기웃거리다가, 테이블 위에 올려진 내 손을 꼭 붙잡았다.
'주인이 우울해하고 있으면, 슬그머니 다가와 손등을 핥거나 머리를 비비며 위로해 주는 고양이도 있다던데···.'
세르펜스의 행동이 딱 그러해서,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제야 세르펜스는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 앉았다.
"리벨론 백작가로 보낼 편지를 쓰고 있었던 건가? 예전 서류를 가져와 달라고 한 것도 그 때문이었군."
줄을 죽죽 그어 까맣게 덧칠해 놓았는데도, 세르펜스는 용케 글자의 원형을 알아보았다.
"눈치도 좋고 눈썰미도 뛰어나고. 누구네 집 아이인지, 참 잘났네요."
"선우가 보기에, 내가 그렇게 잘났나?"
"네, 정말 잘났죠. 그런데 이렇게 잘난 아이가 대체 왜 그랬을까?"
"음?"
세르펜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순진무구한 얼굴로 보아, 그간 청혼서를 폐기해 왔다는 사실을 내게 들켰다는 걸 아직 모르나 보다.
무턱대고 화내지 말아야지.
그 결심을 되새기며, 나는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최대한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제온에게 들었습니다. 제 앞으로 청혼서가 왔었다면서요?"
눈가에 경련이 생길 정도로 한껏 눈웃음을 지어 보였건만.
세르펜스는 '아···.' 하고 탄식과도 같은 소리를 흘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혹시 화났는가···?"
"화나요? 제가? 세르펜스의 눈에는 그래 보여요?"
내 물음에 세르펜스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고 좌불안석하는 꼴이 마치, 무릎을 꿇어야 하나 고민하는 듯 보였다.
도둑이 제 발 저려 하는 듯한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네 죄를 네가 알렷다!'라고 외쳐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오늘은 세르펜스를 다그치지 않고 부드럽게 타이르기로 다짐했다.
나는 녀석이 방금 나를 위로해 준 것과 맛있었던 컵케이크를 떠올리며, 친근감 넘치게 말했다.
"이상하다아~? 화 같은 거 안 났는데, 왜 그렇게 보이는 걸까아?"
"서, 선우···? 이러는 이유가 대체 뭐지?"
"그러는 우리 세르펜스 어린이는 대체 왜 남의 앞으로 온 청혼서를 폐기했을까아~?"
"그냥 평범하게 혼내 주면 안 되는 건가?"
"제게 혼나고 싶어요? 혼내 드릴까?"
그저 평소보다 다정하게 대했을 뿐인데.
돌연 세르펜스가 울상을 짓더니 신발을 벗고 의자 위에 무릎 꿇고 앉았다.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
나는 당황스러움을 애써 가라앉히며, 진지하게 녀석을 마주 보고 말했다.
"자신이 잘못한 걸 알고, 고칠 의사가 있으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꼭 혼나야 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선우의 화가 풀릴 수 있다면, 무릎쯤은 몇 번이든 꿇을 수 있다."
"저 화 안 났는데요?"
"눈가가 파들파들 떨릴 정도로 억지 미소를 지었으면서, 지금 내게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
불신감 가득한 녀석의 목소리로 보아, 아무래도 세르펜스는 화나지 않았다는 내 말을 전혀 믿지 못하고 있는 눈치다.
알아서 척척척 스스로 어린이도 정도가 있지. 녀석은 알아서 혼도 나고, 벌까지 받았다.
급기야.
"내가···, 고양이처럼 울면 만족하겠는가?"
이런 소리까지 해댔다.
크흠 하고 목청을 가다듬기까지 하는데, 정말 본격적으로 고양이 울음소리를 낼 생각인가 보다.
너무 기가 차서 어디까지 할 셈인가 지켜보고 싶지만, 자기반성이 슬슬 도를 넘고 있었다.
가만히 놔두면 자학의 레벨로 넘어갈 것 같아, 나는 녀석을 말리기로 했다.
"진정하세요, 세르펜스. 의자에서도 내려오시고···. 아, 아니! 바닥에 꿇으라는 게 아니라!"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나는 겨우겨우 세르펜스를 정자세로 의자에 앉힐 수 있었다.
얼마나 애를 썼는지 이 한겨울에 진땀이 다 났다.
"저 화 안 났습니다. 하지만 세르펜스가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면 진짜로 화낼 거예요."
"정말···. 아, 아니. 믿겠다."
화나지 않았다고 할 때는 안 믿어주더니.
화를 낼 거라고 협박하고 나서야, 녀석은 내 말을 믿어주었다.
'그냥 처음부터 화낼 걸 그랬나?'
다정하게 타일러 보려다가 이게 대체 무슨 생난리인지 모르겠다.
혹시 내가 화를 내기 전에 먼저 선수 친 게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하지만 물증은커녕 심증조차 없이, 정황만 따져 녀석을 닦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랬다간 화나서 괜한 트집 잡는 거 아니냐는 반박이 되돌아오거나, 역시 화난 게 맞지 않느냐며 오랜만에 녀석이 야옹거리는 모습을 보게 될 테니까.
어느 쪽이든 나는 화난 사람이 되는 거다.
"아무튼 그래서 제 앞으로 온 청혼서는 왜 폐기한 겁니까?"
"내가 집사에게 그 지시를 내린 건 상당히 오래전 일이다."
"지금 오랫동안 저 몰래 청혼서를 폐기해 왔다고 자랑하시는 겁니까?"
"그런 뜻이 아니다."
자신은 실컷 나를 오해한 주제에.
세르펜스는 오해하지 말아 달라고 양손을 내젓기까지 하며, 적극적으로 부인했다.
"그런 뜻이 아니면요?"
"음···. 그것을 설명하려면, 우선 청혼서가 날아들기 시작한 시기부터 얘기해야겠군."
"그때가 언젠데요?"
"재작년 7월이다."
"올해도, 작년도 아닌 재작년?!"
청혼서 폐기를 제온이 맡았으니. 빨라도 선택의 날 즈음인 줄로만 알았거늘 완전 예상 밖이다.
까무러칠 정도로 놀라운 얘기에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그러자 세르펜스가 손으로 내 턱을 받쳐 입을 닫아줬다. 하나도 안 고맙다.
"그 전달인 6월에 세미타 거리 사건이 있었잖은가. 그때 자문회에서 사건에 관해 진술하는 선우의 모습을 눈여겨 본 듯하다. 다만 그 직후가 아닌 7월이 되어서야 청혼서를 보내기 시작한 건···."
"뭐 바빠서 그랬겠죠. 혹시 그 이유도 중요한 내용입니까?"
"그건 아니다."
"그럼 넘어가요."
얘기가 무려 재작년 7월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그런 마당에 청혼서를 보낸 귀족가의 사정까지 일일이 알고 싶지 않다.
"세미타 거리 사건 이후, 그달 말에 함께 암흑가에 방문했던 것을 기억하나?"
"아, 네. 유지스를 처음 만난 것도 그때였죠."
"그래. 그리고 선우는 그곳에서 내 실체를 알고도, 나를 무서워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단언했지."
"그랬었죠."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라서 좋긴 한데, 얘가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이어진 세르펜스의 말 때문에 그 의문은 순식간에 증발해버렸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전 집사가 당신 앞으로 도착한 청혼서를 내게 건넸다. 그것을 보낸 가문의 정보와 함께."
"거, 웃긴 양반일세?! 제 앞으로 온 청혼서를 왜 세르펜스에게 준답니까?"
"세미타 거리 사건도 당신이 편지를 받고 나가서 그렇게 된 거잖은가? 그래서 혹시 몰라 뒷조사를 해 봤다고 하더군."
"이유를 듣고 싶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청혼서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정략혼 같은 건 하고 싶지도 않았으니, 내가 받았어도 그냥 무시했을 거다.
그런데도 내가 세르펜스에게 청혼서 얘기를 꺼낸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 이유는 이 녀석이 나를 독점하고 싶어서 이러나 걱정되어서다.
그래도 이건 애정 결핍 아동이 보이는 흔한 행동 중 하나니까, 이해해 줄 수 있다.
'심지어 재작년 7월이라잖아?'
진짜 문제가 되는 건 두 번째 이유.
남의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대는 것은 나쁜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옆에 붙어 있던 나쁜 어른 하나가 화근이었다니···.'
한스, 그 양반이 문제였다. 뒤늦게라도 공작저에서 쫓아내서 다행이다.
제온에게도 한스는 나쁜 어른이니까 조심하라고 경고해 줘야겠다.
"그래서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어요?"
"그런 건 없었다. 다만, 당신을 이용하여 내게 연줄을 대려는 속셈이 훤히 보이기도 했고···.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성검의 선택을 받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게 뭐가 어쨌는데요?"
"막 결혼한 사람을 데리고, 전 대륙을 떠돌 수는 없지 않은가?"
이 녀석이 성검의 선택을 받으면, 나를 저택에 두고 혼자 훌쩍 떠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이런 게 바로 괜한 걱정이라는 건가 보다.
'신혼부부를 떨어뜨리지 않겠다는 그 마음씨는 고우니, 용서해 줘야 하나? 하지만 결혼을 못 하게 방해한 건 이 녀석인데? 그래도 나는 어차피 결혼할 생각이 없었고···.'
나는 띵해져 오는 머리를 부여잡고 고뇌했다.
그러나 세르펜스는 내가 계속 고뇌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선택의 날 이후에는 선우가 진짜 '시온 리벨론'이 아니라는 사실과 그로 인해 괴로워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어서···. 청혼서가 도착했다는 걸 알면, 타인의 삶을 빼앗았다는 자괴감이 더 심해질까 봐 계속 처분해왔다."
결국 나를 위해서였다는 얘기다.
무턱대고 기특펜스를 혼내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
비록 녀석이 혼자 오해해서 무릎을 꿇긴 했지만.
'나를 위해서 그랬던 거라면 좀 더 당당하게 굴어도 되었을 텐데. 아까는 왜 그렇게 저자세로 나왔던 거지?'
굉장히 미심쩍다.
혼날 짓을 했으니까, 내가 화났다고 판단하여 그 난리를 피운 걸 텐데.
나는 녀석에게 숨기는 게 있다면 빨리 이실직고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세르펜스가 양손을 무릎 위에 다소곳이 올려놓고 고개를 숙이며, 자신의 잘못을 낱낱이 실토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현 집사가 당신의 정체를 알게 되고 모진 말들을 쏟아내기에···. 선우가 일부러 '시온 리벨론'의 몸을 빼앗은 게 아니며, 그자의 인생을 빼앗은 것을 괴로워하고 있다고 넌지시 얘기하며 청혼서 폐기 업무를 넘기게 되었다."
제온에게 미안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그래도 나를 위해서였다.
그러니 이 정도면 어느 정도 정상 참작이 가능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라는 게 문제다.
"그리고 리벨론 가의 막내가 '시온 리벨론'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선우가 죄책감을 덜어낸 후에는···. 결혼해서 진짜 아이가 생기게 되면, 나는 뒷전으로 밀려날 것 같아서···. 그래서 명을 철회하지 않고, 계속 모르는 체했다. 미안하다."
"······."
"나는 선우의 결혼을 무조건 막는 게 아니다. 선우가 이곳에서 가정을 이루고 정을 붙일 수만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진심이다. 하지만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서···."
내 혼사에 관해 논할 거면 내 마음에게 준비가 되었느냐고 묻는 게 우선 아닌가?
그런데 얘는 왜 자신의 마음을 준비시키고 있는 걸까?
정말 의문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