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649화 (649/925)

649회

75. 공작님과 백부님 (17)

"잘못한 거 알면 됐습니다. 다음부터는 남의 물건에 손대지 마세요."

"···용서해 주는 건가?"

세르펜스가 다소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마치 이렇게 쉽게 넘어가 주는 거냐고 묻는 듯한 얼굴이다.

"뭐, 어차피 제가 직접 받았어도 폐기하는 건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응?"

나는 말하는 도중,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작년 초. 세르펜스는 밀려드는 청혼서에 일일이 거절하는 내용의 답장을 써 보냈다.

그러면서 골머리를 앓던 녀석의 모습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런데요, 세르펜스. 청혼서에 답장을 써도 성의가 없으면 트집 잡히기 일쑤라고,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래놓고 제 앞으로 온 청혼서는 그냥 버렸어요?"

"나는 대외적인 이미지가 있잖은가."

"제 이미지는요?"

"선우는 괜찮다."

자신은 대외펜스 이미지를 지켜야 하니까 정중하게 거절 의사를 밝혀야 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아도 괜찮다니.

이게 대체 무슨 개똥 같은 소리인지 모르겠다.

기가 차서 헛웃음을 흘리자, 세르펜스는 다급히 변명을 시도했다.

"먼저 예의를 지키지 않은 건, 청혼서를 보내온 쪽이다."

대체 뭔 소린가 싶지만, 일단 도입부는 내 흥미를 끌 만했다.

나는 계속 얘기해 보라는 뜻으로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처음 선우 앞으로 청혼서가 도착했을 때, 그것을 읽어 봤다."

"와아, 읽기까지 하셨구나?"

"혹시 수상한 내용이 적혀있지 않을까 해서···."

한스에게 청혼서를 보낸 가문의 정보까지 받았다면서 퍽이나 그러했겠다.

세르펜스 본인도 제 변명이 터무니없는 소리라는 걸 알았는지, 우물쭈물 자신 없는 모습을 보였다.

"아무튼 읽었는데, 그 내용이 어땠길래요?"

"선우는 내 보좌관이지만, '시온 리벨론'은 한미한 시골 귀족 가문의 차남이잖은가? 게다가 수도에 올라온 뒤에는 번번이 취업에 실패했으며, 프라시더스 가에 취직한 뒤로도 사교계 활동은 거의 하지 않았지."

"느닷없이 시온은 왜 까는 겁니까? 그리고 제 사교 활동이 황궁 연회에서 보좌관들과 잠깐 대화하고 마는 것에 그친 건, 세르펜스가 사교 활동을 안 해서 그런 거잖아요?"

"수도의 귀족들이 보기에 '시온 리벨론'이란 사람은 '사회 경험 하나 없는 순진한 애송이'에 불과했다는 얘기를 하려던 거다."

쉽게 말해 '시온 리벨론'은 프라시더스 가문에 고용되었어도, 여전히 이용해 먹기 좋고 만만한 이미지였다는 뜻이다.

그 '사회 경험 하나 없는 순진한 애송이'를 일부러 고용한 사람이 이런 얘기를 하니, 참으로 설득력 있게 들렸다.

"어쨌든 그 탓에 청혼서의 내용은 굉장히 고압적이었다. 하찮은 시골 가문의 차남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존귀한 가문에서 먼저 결혼을 제안해 주었으니, 영광으로 알라는 내용 일색이었다."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이 청혼서를 그따위로 쓰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완전히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재작년 7월이면 내가 보좌관이 되고 2개월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다.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초년생.

그것도 정치질과 거리가 먼, 시골 영지 출신의 순진한 귀족 자제가 그런 얘기를 들으면 헷갈릴 만도 하다. '정말 그런 건가?' 하고.

'프라시더스 가문의 보좌관이라는 그럴싸한 직책이 있기는 하나, 그렇다고 본인이 프라시더스가 되는 건 아니니까.'

애초에 프라시더스 공작가는 시온의 스펙으로는 붙을 수 없는 직장이었다.

공작가의 업무는 상당히 버거웠고, 보좌관으로서 받은 작위는 세르펜스의 해고 통보 한마디면 없던 게 되어버린다.

'나야 무능하다는 이유로 뽑혔다는 사실을 알기에, 설렁설렁 일하며 시간을 때웠지만···.'

이러다 잘리는 게 아닐까 하며 불안해하는 게 보통이다.

그런 불안감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수도의 명망 높은 귀족 가문 중 하나가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겠다며, 손을 내밀어 온다면 그 누가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귀도 얇고 소심한 시온이 그런 제의를 받았다면, 냉큼 수락했을 게 뻔하다.

"상대를 보통 무시하지 않고서야, 그런 내용의 청혼서를 보낼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기에 정중하게 답신을 보내 거절하더라도, 그 의사를 무시한 채 다시 청혼서를 보내올 게 뻔하다."

"그랬겠죠. 그것도 제가 얼마나 부족하고 별 볼 일 없는 사람인지 깎아내리는 내용을 담아서."

"선우, 당신이 아니라 '시온 리벨론'이다."

내가 무슨 뜻으로 말한 건지 뻔히 알면서, 세르펜스는 얼굴을 굳히고 정색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방금 했던 말을 정정했다.

"네, 네. 제가 아니라 시온이죠. 그래도 편지를 받는 사람은 저니까, 저라고 표현한 겁니다."

이제서야 만족했는지, 세르펜스가 굳혔던 얼굴 근육을 풀고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반대로 내 기분은 찝찝해졌다.

어쩐지 시온 뒷담화에 가담한 것 같아서.

'그보다 이 녀석 말이 사실···이겠지?'

세르펜스가 워낙 이간질을 자주 하다 보니, 괜히 의심스럽다. 이래서 평소의 행실이 중요한가 보다.

하지만 유일한 증거인, 재작년 7월에 도착한 청혼서는 이미 폐기된 지 오래였다.

그러니 지금으로서는 그냥 믿는 수밖에 없다.

"그건 그렇고, 청혼서를 받았다 해도 그냥 폐기했을 거라는 말은 무슨 뜻이지?"

해명을 끝낸 세르펜스가 내게 당당히 질문했다.

아까부터 묻고 싶었는데, 혼나기 싫어서 말 돌린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계속 묵혀두고 있었나 보다.

"말 그대로의 얘긴데요?"

"선우는 정략결혼보다 연애 결혼 쪽이 취향인가? 아니면 귀족 영애가 싫은 건가?"

"그냥 결혼을 안 하려는 건데요?"

"뭐···?"

내 말이 믿기지 않는 건지, 세르펜스가 입을 살짝 벌린 채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는 내가 녀석의 입을 닫아 줄 차례인가 보다.

곧바로 실천에 옮기기 위해 팔을 뻗는 그 순간. 세르펜스가 입을 움직였다.

"선우는 아이를 좋아하잖는가?"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결혼이 아이를 낳기 위한 수단도 아니고···. 아! 귀족들한테는 그렇겠구나? 대를 이어야 하니까."

"으음···."

뒷말은 괜히 했나 보다.

세르펜스가 부담스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침음을 흘렸다.

"아무튼 이곳에서는 결혼할 생각 없어요."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면 그리워질까 봐 그러나?"

"뭐···, 그런 이유도 조금은 있죠. 무언가를 남겨놓고 온다는 것 자체가 그리움을 만들어 낼 테니까요. 그런데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전부가 아니라면?"

"이 몸은 진짜 제 몸이 아니잖아요."

"아···."

세르펜스가 안타까움 가득한 탄성을 흘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불쌍한 걸까? 아니면 내게 미안해져서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지 못하는 걸까?

"그래도 사람 일은 어찌 될지 아무도 모르는 법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제게 운명적인 사랑이 나타나서 결혼이 하고 싶어질지 모르니까, 마음의 준비는 계속하고 계세요."

"······."

"왜요? 불만 있어요?"

"없다."

그렇게 답하는 세르펜스의 표정은 그다지 개운해 보이지 않았다.

불만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머릿속이 복잡한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근데 세르펜스는 가족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할 줄 알았는데. 이런 얘기를 하는 걸 보면, 그렇지만도 않은가 보네요?"

"모든 가족이 같은 형태를 이루지 않는다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선우라면 분명 좋은 가정을 이룰 수 있을 거다."

가족 자체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니 다행이라 안도하는 한편.

녀석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박탈감과 작은 선망에 안쓰러움이 밀려들었다.

"왜 해보지도 않고, 자신은 안 된다고 생각합니까? 세르펜스도 좋은 가정을 이룰 수 있을 겁니다. 틀림없이요."

좀처럼 내 말을 받아들일 수 없는 건지, 세르펜스는 불만스레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남의 결혼에만 마음의 준비 하지 말고, 본인 결혼도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남인가···?"

"제 결혼만 신경 쓰지 말고, 본인 결혼이나 생각하세요."

"음···."

내가 말을 정정하고 나서야 세르펜스는 진지하게 고민에 돌입했다.

문장 중 한 단어에만 꽂혀서 뒷말은 대충 흘려듣는 게, 딱 어린애다.

불현듯 이런 어린애한테 무슨 얘기를 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정신 나이가 아니라 육체 나이만 따져도, 세르펜스는 고작 스물여섯밖에 안 된다.

아직 젊으니까 결혼은 천천히 생각해 봐도 된다.

어차피 당장은 마왕과 악숭이들 때문에 어디 한군데에 오래 붙어 있을 수도 없고.

"사람은 말이죠, 전부 달라요. 그게 부모 자식이든, 형제든. 완전히 다른 객체입니다. 에일리히 님만 봐도 알잖아요. 그분과 전대 공작이 똑같아 보여요?"

"그렇지 않다. 얼굴은 닮았지만···. '그 사람'과 달리, 백부님께서는 따뜻하고 다정한 분이시다."

"같은 부모 밑에서 자란 형제가 다른 성격을 갖는다는 건, 아이는 부모의 분신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세르펜스도 전대 공작이랑 달라요. 다른 누군가에게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사람입니다. 지금은 그것만 기억해 두세요."

"···아까 생각하라는 건?"

"그건 나중에 세르펜스에게 좀 더 여유가 생기면 그때 생각하기로 합시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세르펜스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제야 세르펜스가 인상을 풀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고맙다."

"알아요."

나는 씩 웃으며 세르펜스의 감사 인사에 짧게 대답해 준 뒤. 녀석이 가져온 서류들을 내 앞으로 끌어다 놓았다.

이제 슬슬 편지를 써야 할 때다.

편지 초고를 쓰는 김에 글씨체 연습도 같이 해 봐야겠다.

"그런데 갑자기 왜 리벨론 가에 편지를 쓰는 건가?"

"제온이 결혼하려는데, 리벨론 백작 부부가 시온이 결혼하기 전까지는 안 된다고 했다나 봐요. 그래서 설득하려고요."

"음···. 결국 로베르토 가문으로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나?"

세르펜스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탓에 이제 본격적으로 편지를 써 보자고 마음먹은 것이 무색하게도, 나는 점 하나 찍어 보지 못한 채 고개를 들어 올리고 말았다.

"방금 뭐라고 하신 겁니까? 세르펜스는 제온이 이올렌 씨랑 사귀는 거 알고 계셨어요?!"

"사귀는 건 몰랐지만, 정략적으로 그리되지 않을까 짐작은 했다."

정략적이라고 말하는 거로 보아, 둘 사이에 흐르는 사랑의 기류를 읽었다거나 애정 행각을 목격한 건 아닌가 보다.

'세르펜스는 정략혼 같은 거 하지 말고, 꼭 사랑하는 사람과 연애 결혼을 하면 좋겠는데···.'

머릿속에 떠오른 이 말을 당장 세르펜스에게 전하고 싶다.

하지만 결혼에 관한 건 여유가 생기면 고민하라고 말한 직후다.

빨리 결혼하라고 닦달하는 부모님처럼 굴지 말고, 이 얘기는 나중에. 세르펜스가 정략혼을 염두에 두는 것 같은 낌새가 보이면 그때 하자.

나는 결혼이란 단어를 내 머릿속에서 지우고, 예전에 작성했던 서류를 꼼꼼히 살펴보며 글씨체를 분석했다.

내가 어떻게 이런 반듯한 글씨를 쓸 수 있었나 싶을 정도로 현재의 글씨체와 딴판이다.

몇 글자 옮겨 써 보면 감이 잡힐까 싶어 실행에 옮겨 보았다.

똑같이 써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인지 획이 가늘게 떨렸다. 글씨를 쓰고 있는 게 아니라, 어설프게 그림을 베껴 그리는 듯한 느낌이다.

그렇게 내가 헤매고 있자, 세르펜스가 동아줄 하나를 내려보냈다.

"새로운 필체를 창작해 내지는 못해도, 다른 사람의 필체를 따라 하는 건 가능하다."

우리 재주 만점 재간둥이 만능펜스는 필체 조작에도 재능이 있었나 보다.

얘는 대체 못 하는 게 뭘까 싶다가도, 그런 건 대체 왜 배운 걸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그래서 바로 물어보았고.

"서류를 조작할 때 매우 유용하다."

괜히 물어봤다는 후회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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