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0회
75. 공작님과 백부님 (18)
몹시 찝찝한 대답이기는 하나, 그 말을 한 사람은 세르펜스였다.
서류 조작쯤이야 새로울 것도 없다.
'더군다나 세르펜스는 자신의 이득을 위해 서류를 조작하는 그런 애가 아니잖아?'
굳이 그런 짓을 하지 않아도 프라시더스 공작가는 부와 권력이 넘친다.
세르펜스가 욕심을 내는 건 오직 친한 사람들과의 관계. 그리고 달콤한 디저트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그럼 세르펜스가 저 대신 편지 좀 써 줄래요? 저는 결혼 생각이 없고 세르펜스 뒤치다꺼리로 바쁘니까, 제온 먼저 결혼시키라고."
"그건 곤란하다."
"왜요?"
"나는 '시온 리벨론'이 가족에게 편지를 쓸 때, 어떤 문체를 쓰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리고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는 어떠한 구성으로 써야 할지도···."
세르펜스가 자신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가족에게 편지를 쓰는데 무슨 구성을 따지냐 싶겠지만.
녀석이 내 생일 때 써 준 롤링 페이퍼 내용을 떠올리면 그런 고민을 할 만도 했다.
'안 친한 귀족들끼리 최소한의 인맥 관리용으로 주고받는 편지처럼, 허례허식이 가득했지···?'
인사말이 너무 길고 과할 정도로 공손하여 무슨 가정통신문이라도 읽는 줄 알았다.
과연 이것을 롤링 페이퍼라 지칭해도 되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으니, 말해 무엇하랴.
그동안 세르펜스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쓴 글이라고는 지령문이나 보고서. 혹은 의례적으로 보내는 편지가 전부였다.
녀석이 휴마누스에게 보낸 편지들도 마찬가지다.
'그런 마당에 나에게 쓴 롤링 페이퍼라고 어디 다르겠어?'
하지만 그런 정형화된 문맥 속에서도 세르펜스의 진심은 고스란히 드러났다.
나를 얼마나 아끼는지, 내게 어찌나 고마워하는지. 나와 함께한 이후로 얼마큼 즐겁고, 행복해졌는지.
그 마음을 전하기 위해 고민한 흔적이 잔뜩 묻어났다.
하지만 세르펜스가 시온인 척 편지를 쓸 때도 그런 마음을 담을 수 있을까?
그것을 읽은 리벨론 백작 부부가 시온을 떠올릴 수 있을까?
절대로 불가능하다.
리벨론 백작 부부는 지나칠 정도로 정중한 문장에서 거리감과 낯섦을 느끼게 될 거다.
"그럼 리벨론 가로 보낼 편지 내용은 제가 적을 테니까, 세르펜스는 시온의 글씨체로 옮겨 적기만 해 주세요."
나는 그리 말하며 펜을 쥐었고 세르펜스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호기롭게 말해 놓긴 했지만, 편지를 쓰려 하니 막막하기 짝이 없다.
'그러고 보니 리벨론 가에서 날아온 편지들에 답장하지 않은 건, 시온이 어떤 식으로 편지를 썼는지 몰라서였지···?'
완전히 잊고 있다가, 세르펜스에게 문체 얘기를 듣고 나서야 그 사실이 떠올랐다.
시온의 기억을 안 뒤져본 건 아니다.
하지만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건 편지에 적은 대략적인 이야기뿐. 편지 전문이나 구체적인 문장은 떠올릴 수 없었다.
'아예 제온에게 초고를 맡겨버려?'
잠깐 그런 생각이 떠올랐으나, 이내 포기했다.
리벨론 백작 부부가 아는 시온은 몹시 소심한 아이다. 그런 시온이 쓴 편지에서 제온의 느낌이 난다?
제온이 불러준 대로 시온이 받아 적었다고 생각할 게 뻔하다. 그럼 제온의 결혼도 물 건너갈 테고.
차라리 내가 쓰고 나서 제온에게 검토 받는 게 낫겠다는 결론을 내린 그때.
세르펜스가 나를 불렀다.
"선우."
"왜요? 무슨 할 말 있어요?"
"생각이 옆으로 샌 것 같은 표정이라 불러 봤다."
한마디로 딴생각 그만하고 편지나 쓰라는 뜻이다.
이제 막 마음을 다잡고 글을 쓰려던 찰나였는데, 이렇게 지적을 당하니 억울함이 치솟았다.
공부하려고 컴퓨터를 끄는 순간.
이제 게임 그만하고 공부하라는 말을 들은 기분이다.
"세르펜스는 할 일도 없나 봐요? 남의 표정이나 분석하고 있게?"
"···집무실에서 서류를 가져오겠다."
"됐어요. 그건 에일리히 님이 알아서 하시겠죠."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 밖으로 나가려는 세르펜스를 말렸다.
세르펜스가 자리에 앉으며 자신이 뭘 어쩌길 바라느냐고 묻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내가 그 시선을 똑바로 마주 보며 씩 웃자, 세르펜스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불길하군···. 내게 뭘 시킬 속셈이지?"
"아까 가족에게 보낼 편지는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셨잖아요. 지금 그걸 시도해 봅시다."
그렇게 말하며, 나는 세르펜스 앞으로 빈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그냥 평범한 종이일 뿐이건만. 세르펜스는 강한 적이라도 마주한 것처럼, 바짝 긴장하며 그것을 노려보았다.
"일단 연습한다 생각하고, 여기다 자유롭게 써 보세요."
"으음···."
"어려울 거 없습니다. 저랑 필담해 봤잖아요. 그런 느낌으로 쓰면 됩니다. 에일리히 님이랑은 이따 저녁도 같이 먹을 거고 내일도 볼 예정이니까, 굳이 안부를 물으며 장황한 인사말을 늘어놓을 필요도 없습니다."
나는 가까운 사람에게 편지 쓰는 요령을 설명하며, 아공간 주머니에서 펜을 하나 더 꺼내어 세르펜스의 손에 강제로 쥐여주었다.
세르펜스가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면서 펜을 고쳐 쥐었다.
한 번 시도해 보겠다는 뜻이다.
'어째 어버이날에 아이들한테 편지 쓰기를 시키는 선생님이 된 기분이네···.'
편지를 다 쓰면, 색종이로 카네이션 접는 법도 알려 줘야 하나 고민된다.
하지만 나도 아직 세르펜스에게 카네이션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 에일리히의 가슴에 먼저 카네이션이 달린다고 생각하니 용납할 수 없다.
"세르펜스, 뜬금없는 소리 하나 해도 됩니까?"
"얼마든지."
내가 혼자 편지와 씨름할 땐 집중하라면서 뭐라고 하더니.
막상 자신이 나와 비슷한 처지가 되자, 세르펜스는 기다렸다는 듯 적극적으로 딴짓에 임했다.
"제가 살던 세상에서는 감사의 의미를 담아, 부모님과 스승님의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주는 풍습이 있습니다."
"···지금, 선우가 내게 갖고 싶은 것이 있다고 말한 건가?"
세르펜스가 눈을 크게 뜨며 경탄했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기쁨을 숨기지 못하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괜히 멋쩍은 기분이 든다.
이렇게나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에 뭐라도 사 달라고 부탁해 볼 걸 그랬다.
"그래서 줄 겁니까?"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준비해 보겠다."
겨우 꽃 한 송이일 뿐이거늘.
세르펜스가 몹시 비장하게 말했다.
'카네이션 개화 시기가 언제더라···?'
정확한 시기는 모르나 겨울에 피는 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확실하게 안다.
공작저에 유리 온실이 있긴 하지만, 그곳에 심어진 꽃 중 카네이션은 없다는 것도 알고 있고.
'구하려면 한참 걸리겠네.'
어차피 갑자기 떠올라서 얘기해 봤을 뿐이다.
나는 카네이션에 관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다시 '부모님께'라는 네 글자가 적힌 종이로 시선을 옮겼다.
'시온이 부모님께 보낼 편지 첫마디에 쓸만한 말이 뭐가 있으려나?'
다짜고짜 제온의 결혼 얘기를 꺼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랜만에 보내는 편지니만큼, 그동안의 안부를···.
'잠깐, 오랜만?'
좋은 생각이 났다.
일단 무조건 비는 거다. 연락을 자주 못 해서 미안하다고.
그동안 바빠서 정신이 없었다든가, 어차피 제온을 통해 내 안부를 듣지 않았냐든가.
사과와 함께 불효자스러운 변명을 늘어놓다 보니 무려 다섯 줄이나 채워졌다.
처음이 어렵지, 한 번 탄력을 받으니 그다음부터는 속도가 붙었다.
리벨론 백작 부부의 안부를 묻고, 비비는 얼마나 자랐는지 궁금하다는 관심을 보인 뒤. 형인 카론에 대해서는 알아서 잘하고 있을 것 같다며 믿음을 내비쳤다.
그러고 나서 본론으로 들어갔다.
나는 결혼 생각이 없으며, 일에 집중하고 싶다. 그러니 제온이 먼저 결혼할 수 있게 허락해 줘라.
그런 얘기까지 쭉 써 내려가다 보니, 어느덧 한 면이 거의 채워졌다.
'생각보다 별거 아니네?'
리벨론 백작 부부와 직접 얼굴 보며 아들 행세도 해 봤는데, 고작 편지 하나 때문에 낑낑댔다니.
실소가 흘러나왔다.
"선우···?"
갑자기 웃는 내 모습이 의아했던 걸까?
몇 번이고 글을 썼다가 줄을 긋고 다시 쓰길 반복하며, 까만색으로 종이를 물들이던 세르펜스가 고개를 들어 내 안색을 살폈다.
"쓰려고 마음먹었을 땐 막막했는데, 쓰고 나니 괜히 쫄았나 싶어서요."
"······그렇군. 다 쓴 건가?"
세르펜스는 꽤 오래 침묵을 유지하다가, 내가 쓴 편지를 힐긋 보고는 질문을 던졌다.
나는 아직 마무리 단계라고 대답해 준 뒤 다시 펜을 놀렸다.
끝인사로 나는 공작님이 철저하게 지켜주시는 덕분에 안전히 잘 지내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글을 적었다.
그 아랫줄에 '시온 올림'이라고 쓴 뒤.
추신도 잊지 않고 덧붙였다. 공작님께 선물을 많이 받아서 둘 곳이 없으니, 필요 없어진 물건들은 본가로 보내겠다고.
'본론에 써도 상관없는 내용이지만, 편지에 추신이 빠지면 섭하지!'
나는 저녁 시간 전에 초고를 완성했다는 것에 뿌듯해하며, 펜을 내려놓았다.
이제 남은 건 제온에게 초고를 넘겨 교정을 받고, 그 수정본을 세르펜스가 시온의 글씨체로 편지지에 옮겨 쓰는 것뿐이다.
내 역할은 끝났다. 제온이 퇴짜를 놓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말이다.
그런 불안을 애써 외면한 채 기지개를 켜고 있자니, 세르펜스가 부럽다는 시선을 보내왔다.
녀석의 앞에 놓인 종이에 쓰인 글자 중. 취소 선이 그어지지 않은 건, '백부님께'라는 네 글자뿐이다.
"뭘 이런 것까지 닮고 있어요?"
"내가 선우와 닮았나?!"
세르펜스는 얼굴을 활짝 펴고 좋아라 했다.
그냥 어처구니가 없어서 툭 던진 말이었는데, 더 어이가 없어졌다.
"슬슬 저녁 시간이니까, 나머지는 밥 먹고 쓰는 거로 하죠."
"으음···, 그래."
세르펜스는 방금까지 끼적거리던 종이를 탁자에 그대로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완성된 초고 뒷면에 교정을 부탁한다고 적은 뒤, 곱게 접어 안주머니에 넣고 따라 일어났다.
"집사에게 확인받을 생각인가?"
"최악의 경우, 처음부터 다시 쓸 각오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일은 없었으면 좋겠군."
"그러게나 말입니다."
부디 한 번에 통과되기를 바라며.
나와 세르펜스는 식사실로 향하기 전에 편지 초고를 맡기기 위해 제온을 찾아갔다.
참고로 제온의 위치는 세르펜스가 기척으로 알아냈다.
"집사님, 용무가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그냥 부르셔도 됐을 텐데···."
말을 붙인 건 나인데, 제온은 세르펜스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세르펜스가 직접 자신을 찾아왔다는 게 부담스러운가 보다.
그런 제온의 심기를 알아챘는지 세르펜스가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어차피 식사실로 향하던 도중이었습니다. 가는 길에 들른 것뿐이니,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정하고 배려심 넘치는 이 모습을 보고, 누가 정신연령 (2)6세의 어린아이를 떠올릴 수 있을까.
언제 보아도 대단한 연기다.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제온에게 편지 초고를 넘겼다.
"교정···?"
교정을 부탁한다는 글을 본 제온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종이를 펼쳤다가 서둘러 접었다.
상황 파악을 한 것 같으니, 자세한 설명은 생략해도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