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1회
75. 공작님과 백부님 (19)
"집사님은 저녁 드셨어요?"
"아직입니다."
"그럼 우선 식사부터 하시고, 부탁 드린 일이 끝나면 제 방으로 와 주세요."
5층에 있는 내 방으로 오라는 말에도, 제온은 부담을 느끼는 기색 없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르펜스도 별다른 불만을 내비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현재 세르펜스의 방과 개인 서재. 그리고 내 방 청소는 제온이 하고 있다는 모양이니까.
제온이 집사 일로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청소를 하는 건, 순전히 전임자인 한스 때문이다.
한스는 혼자서 5층 청소를 도맡아 했다.
'집사는 주인을 가까이에서 모셔야 하며, 기타 보안상의 이유 때문이라나 뭐라나?'
그러나 제온은 한스에 비해 체력이 월등히 떨어졌다.
정보원으로서 여러 전문적인 훈련을 받아온 한스와 달리, 제온은 평범한 일반인이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최근에는 5층에서 거주하는 사람까지 늘어났으니.
그 탓에 앞서 언급한 3개의 방을 제외한, 나머지 구역은 베테랑 시녀 둘이 청소를 담당하게 되었다.
아무튼 제온이 내 방 청소를 맡아 준다니 다행이다.
방을 오래 비울 일이 잦아진 반면에 비싼 가구가 많아져서 주기적인 관리가 필요해 졌다.
그렇기에 누군가는 내 방을 청소해 줘야 하고, 기왕이면 내 정체를 알고 있는 제온이 담당해 주는 게 여러모로 마음이 놓인다.
'그러고 보니, 오늘도 청소를 했으려나···?'
나는 오늘 거의 온종일 방에서 지내다시피 했다.
방을 오래 비웠던 건, 식사 시간과 응접실에서 컵케이크를 먹었을 때 정도다.
문득 방에 놓인 세르펜스의 침대가 떠올랐다.
'아무리 5층이 자기 영역이어도 그렇지, 눈치를 너무 안 보는 거 아니야···?'
제온은 세르펜스가 (2)6살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그런데 혼자서는 무섭고 외로워서 못 잔다는 걸 들켜도 괜찮은 걸까 싶다.
내가 자신의 사회적 체면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세르펜스는 어른스러운 척, 기품 있는 미소를 지으며 제온에게 작은 쪽지 하나를 건넸다.
"여기에 적힌 물건들을 최대한 빨리 준비해 주셨으면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제온은 쪽지 내용을 확인하지도 않고, 내가 준 편지 초본과 함께 웃옷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는 옆으로 비켜서며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쪽지에 적힌 게 무엇이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구해 오겠다는 바람직한 집사의 자세다.
나도 세르냥이의 집사지만, 인간의 집사와 고양이의 집사는 맡은 바 임무와 책임이 다른 법이다.
녀석이 무엇을 구해 오라고 시켰는지 알아야겠다.
제온을 지나쳐 식사실로 향하며, 나는 세르펜스에게 질문했다.
"집사님한테 건넨 쪽지, 그거 뭐예요?"
"시온 경께서 제게 부탁하신 물건에 관한 겁니다. 이제껏 경께서 저를 도와주신 것을 생각하면 직접 구해드리고 싶었으나, 내일부터는 수련에 매진할 예정인지라···."
세르펜스가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복도를 지나는 사용인과 아직 근처에 있는 제온을 의식한 행동이다. 만약 그들이 없었더라면, 울상을 지으며 시무룩한 목소리로 사과했으리라.
그 모습으로 보아, 아직 체면을 완전히 내다 버린 건 아닌가 보다.
'내가 부탁한 물건이라면 카네이션을 말하는 거겠지?'
부탁이 아니라 갖고 싶은 거였지만. 이 또한 남의 눈치를 보느라 표현을 달리 한 걸 테다.
그나저나 지금 계절이 계절이니만큼 나중에나 받게 될 줄 알았는데.
빠른 시일이 어쩌고 하더니. 내가 편지를 쓰느라 집중하는 사이, 카네이션을 어떻게든 구해 보라는 쪽지를 준비해 놓았나 보다.
"누가 사 오면 어때요? 그건 중요하지 않으니까, 공작님도 개의치 마세요."
카네이션 선물의 핵심은 누가 그것을 가슴에 달아주느냐다. 누가 사 오느냐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리고 세르펜스가 이 계절에 피지도 않는 꽃을 구하러 다니는 건, 나도 내키지 않는다.
녀석 같은 고급 인력을 그런 식으로 뺑뺑이 돌릴 수는 없다. 차라리 그 시간에 낮잠을 자는 게 더 생산적이다.
'아마 제온도 직접 움직이는 대신 아랫사람을 시키겠지.'
식사실에 도착하니 다들 먼저 와 앉아있었다.
우리는 식사를 하는 내내 소소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형성했다.
간혹 세르펜스가 에일리히를 관찰하듯 쳐다본 탓에, 에일리히가 난감해했다는 것만 빼면.
"혹시 내게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거니?"
"할 말이라···, 으으음···."
세르펜스가 고민 가득한 얼굴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추측하건대 '할 말이 있으면 편지에 쓸 텐데. 편지에 무슨 말을 적어야 하지?' 따위의 고민을 하는 게 아닐까 한다.
그렇게 녀석은 생각의 바다에 퐁당 뛰어들었고, 에일리히는 안절부절못하며 괜한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저러다 밤에 잠도 못 자고 설치시는 거 아냐?'
에일리히가 하늘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구원의 손길을 바라는 그 시선을 마주하니, 책임이 무겁다.
그가 불면증에 시달리지 않도록. 오늘 내로 꼭 편지를 완성해서 건네줄 수 있게, 세르펜스를 잘 지도해야겠다.
식사를 끝내고, 나는 세르펜스와 함께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곧장 세르펜스에게 침대를 치우라고 지시했다.
"제온 오기 전에 저거 빨리 치워요."
"그러지 않아도 괜찮다."
세르펜스가 자신의 침대를 힐끔 보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며 테이블 앞에 앉았다.
침대를 치우지 않아도 된다니, 그 말의 뜻은.
"혹시 제온에게 말한 겁니까? 저랑 한 방에서 같이 잔다고."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는가?"
순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꼴을 보아하니, 말한 게 분명하다.
성검 일행 앞에서 '백부님의 조카' 발언을 할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이 녀석은 수치심도 못 느끼나 보다.
"그자는 나와 선우가 친구라는 사실을 알고 있잖은가. 그리고 잠들 때까지 친구와 노는 게 재밌어서, 친구네 집에서 자고 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선우가 말했었지."
"확실히 그런 말을 했던 것도 같고···?"
"더구나 그자는 선우가 신의 사자라는 것 또한 알고 있다. 그런 이유들을 잘 설명해 놓았으니, 선우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신의 사자인 나를 호위할 겸. 잠들기 전까지 친구와 놀기 위해 침대를 옮겨 놨다고 설명했다는 얘기다.
그런 말을 하며 의기양양 뿌듯해하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친구'라는 단어를 너무 만능 키워드로 쓴 건 아닐까. 후회가 막심하다.
'제온은 이런 세르펜스의 말에 어떻게 반응했으려나?'
오늘 아침에 만났을 때 제온은 이와 관련된 얘기는 일언반구조차 하지 않았다.
그것으로 미루어 보아, 의외로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르펜스가 반 토막 난 듯한 말을 하며,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가늘고 긴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내 침대가 보였다.
"제 침대가 왜요? 깔끔하기만 한데 무슨 문제가···, 아···."
아침에 일어나 아무렇게나 내버려 두었던 이불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미 제온이 와서 청소하고 갔다는 뜻이다.
나는 세르펜스의 침대를 치워야겠다는 생각을 말끔하게 갖다 버렸다.
"그런데 세르펜스, 그건 왜 치우는 겁니까?"
침대는 치우라고 해도 안 치우더니.
세르펜스는 '백부님께'라고 적힌 종이를 접어서 주머니 속에 숨기고 있었다.
"곧 집사가 올 예정이잖은가. 가족에게 편지를 쓰는 게 어려워, 헤매고 있다는 것을 보이는 건 아무래도···. 꺼려진다고 해야 할지, 민망하다고 해야 할지···."
그렇게 말하며, 세르펜스는 겸연쩍게 웃었다.
뻔뻔하려면 시종일관 뻔뻔하고, 수줍음을 많이 타려면 일관성이 있을 것이지.
도통 세르펜스의 기준을 모르겠다.
"가족에게 편지를 쓰는 건 처음이잖아요. 원래 처음은 다 어색한 겁니다."
"그래도···. 선우에게 줄 롤링 페이퍼를 썼을 땐 이러지 않았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헤매긴 했지만, 쓰고 싶은 말 자체는 많았다. 그런데 백부님께 드릴 편지는···."
세르펜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일이 좀처럼 풀리지 않으니 답답한가 보다.
팔을 앞으로 내뻗자, 세르펜스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 내 손바닥에 자신의 머리를 가져다 댔다.
나는 녀석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며 말문을 열었다.
"그것도 자연스러운 겁니다. 저랑 세르펜스는 오랜 시간 함께 지내며 많은 것을 공유해 왔잖아요. 그만큼 추억도 쌓였으니까, 편지에 쓸 얘기가 많을 수밖에요."
"···그런가?"
"네. 원래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이랑 대화하다 보면, 얘깃거리가 별로 없어서 종종 맥이 끊기곤 하잖아요. 그러다 보면 괜히 데면데면 어색한 느낌이 들고. 머릿속에는 '무슨 말을 해야 하지?'라는 생각만 가득 차고."
"지금 내가 딱 그런 느낌이다."
그저 일반론을 말했을 뿐이건만.
처음 점집에 방문하여 두루뭉술한 점쟁이의 말에 넘어간 사람처럼, 세르펜스가 홀린 듯한 표정으로 눈을 빛냈다.
너무 내 말을 철석같이 믿는 것 같아서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할 말은 계속해야 하기에, 나는 잠시 멈칫했던 입을 다시 움직였다.
"그건 상대방에 대해 잘 몰라서 그래요.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모르니. 가볍게 꺼낸 말에 상대가 기분 나빠하거나 지루해할까 봐, 말 한마디 꺼내기가 조심스러워지고. 그렇게 이 얘기 저 얘기 가지를 쳐내다 보니 할 말이 없어지는 거죠."
"그럼 백부님에 대해 더 알고 나서 편지를 써야겠군."
세르펜스가 터무니없는 결론을 내렸다.
아직 인간관계에 미숙하다는 티가 났다.
"앞으로 서로 알아가자는 의미를 담아 편지를 쓸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서 세르펜스가 먼저, 에일리히 님께서 알아줬으면 하는 자신의 얘기를 전하는 겁니다."
"아···."
"할 수 있겠어요?"
"으음···, 노력해 보겠다."
힌트를 받았는데도 영 자신이 없는지 목소리에 힘이 없다.
나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거두었고, 세르펜스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눈이 마주쳤다.
"세르펜스가 에일리히 님께 편지를 쓰는 동안. 저도 제 가족에게 편지를 쓸 테니까, 같이 힘내봐요."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라니···? 하지만, 그대의 가족은···."
"보낸다고는 안 했습니다. 그냥 쓰기만 할 겁니다."
"······."
세르펜스가 복잡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타이밍 좋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제온이 온 거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말투를 비롯한 몇몇 부분만 손봤습니다. 크게 고칠 부분은 없더군요."
제온이 교정 작업을 끝낸 편지를 내밀며 말했다.
존댓말을 쓰는 거로 보아 세르펜스가 방에 있다는 걸 아나 보다.
'하기야. 같이 놀다가 자려고 침대까지 옮겼다는 말을 들었는데,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겠지.'
나는 고개를 돌려 세르펜스를 째려봤다.
세르펜스가 멀뚱멀뚱 눈을 깜박거리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자신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왜 노려보는지 모르겠다는 뜻이다.
'그래. 내 이미지가 이상해지는 것도 아니고, 자기 이미지를 자기 손으로 망치겠다는데 뭘 어쩌겠어?'
혼낼 일도 아닌데 괜히 눈치를 줘 봤자, 애가 소심해지기만 할 뿐이다.
나는 눈가에 힘을 풀고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 세르펜스도 방긋 웃었다.
"그럼 용건도 끝났으니,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편지는 내일 아침에···."
"그러지 말고 지금 바쁜 거 아니면 들어와서 편지 쓰는 거 기다렸다 가죠? 할 얘기도 있고, 옮겨 적는 건 금방이니까."
내 말에 돌아가려던 제온이 잠시 갈등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안주머니에서 작은 수첩 하나를 꺼냈는데, 아무래도 일정을 확인하는 듯했다.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제온이 수첩을 안주머니에 되돌려 놓으며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