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654화 (654/925)

654회

75. 공작님과 백부님 (22)

"그런데 자애도 아니고, 굳이 '자비'를 쓴 이유가 있어요?"

"백부님께서는 나를 최우선으로 생각하여 교단을 박차고 나오셨다. 그리고 지금도 나에게 많은 애정과 관심을 쏟고 계시지."

불현듯 떠오른 궁금증을 던지자, 세르펜스가 진중한 태도로 답했다.

아직까지는 '자비'보다는 '자애'에 가까운 설명이다.

뒷얘기가 남아있는 듯해서, 나는 녀석의 말을 끊지 않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듣고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런데도 그분께서는 내게 그 무엇도 요구하지 않으시잖은가. 내가 자신을 최우선으로 여기지 못하며, 받은 만큼의 애정과 관심을 돌려주지 못하더라도···. 항상 괜찮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시고, 종종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시니까. 그래서 자비로운 분이시라고 생각했다."

받은 만큼 돌려주지 못해도 이해해 주시니까.

매번 용서받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서, 자비롭다는 단어를 선택했다는 뜻이다.

그렇다는 건 세르펜스가 에일리히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있다는 얘긴데, 이 부분은 한 번 짚어주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세르펜스도 에일리히 님께 마음을 열려고 노력하잖아요."

"그래도···."

"물론 서로 똑같은 양을 주고받을 수만 있다면, 그만큼 좋은 것도 없겠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정확하게 계량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렇긴 하다만, 대략적으로나마 느낄 수는 있지 않은가?"

자신은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듯 작은 친절조차 의심하기 바빴던.

그런 녀석이 지금은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사랑을 느끼며, 그 양을 가늠할 수 있다고 얘기하고 있었다.

참으로 긍정적인 변화다.

하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다.

무조건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한다는 건 너무 위험한 생각이다.

'타인에게 줄 수 있는 애정과 관심에도 한계가 있으니까.'

지금은 갚아줄 수 없는 사랑에 그저 미안해할 뿐이지만.

그것이 쌓이다 보면 점차 부담스러워질 거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버거워질 날도 올 테고.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다.

이제까지는 남들이 세르펜스에게 먼저 호감을 보이고, 세르펜스가 그들에게 마음을 열어 그 마음에 보답하는 식이었다.

'그런데 만약 그 상황이 뒤집혀 버린다면 어떨까?'

세르펜스는 고작 (스물)일곱 살이다.

살아온 날의 몇 배나 되는 세월을 더 살아가야 한다.

그 기나긴 세월 동안. 녀석이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그 관계에서 항상 우위를 점할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다.

'사랑을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한다는 강박은 그 반대의 상황에도 반영되겠지.'

나는 네게 이만큼 해 주는데, 너는 왜 나한테 그만큼 돌려주지 않는 거냐.

이런 생각은 관계를 파멸로 이끈다.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받거나 베풀기만 하라는 건 아니지만.

"타인에게 줄 수 있는 애정과 관심의 총량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리고 그것을 배분하는 비율 또한 다르고요. 세르펜스는 에일리히 님께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잖아요? 에일리히 님께서 세르펜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중요한 건 '똑같이'가 아니라,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는 거니까."

"그런···가?"

"네. 천칭을 가져다 놓고 마음의 무게를 비교하는 행위는 서로에게 상처만 남길 뿐입니다. 나의 최선이 언제나 남의 최선과 같을 수 없다는 걸 기억해 주세요."

"으음···, 알겠다."

세르펜스는 곰곰이 고민하는 표정으로 자신이 쓴 글씨를 내려다보았다.

펜을 쥔 녀석의 손이 천천히 움직여 '자비'의 '비'를 지우고 '애'라는 글자를 적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올려 나를 마주 보고, '이렇게 하면 되는 건가?'라고 묻는 표정을 지었다.

"아유~, 우리 공작님! 응용력도 뛰어나셔라! 그런데 시계는 보셨어요?"

"헛···!"

내 물음에 세르펜스가 헛바람을 들이켜더니, 홱 소리가 들릴 속도로 고개를 돌려 시계를 쳐다봤다.

시곗바늘은 정확히 9시 정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세르펜스가 천천히 고개를 되돌리며 울상을 지었다.

"제가 말 시키는 바람에 늦어진 거니까, 한 줄은 깎아줄게요."

"그래 봤자 아닌가? 나는 아직 한 줄도 채 쓰지 못하였으니···."

시들펜스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힘없이 말했다.

건 크랜베리와 마카다미아 넛이 들어간 쿠키를 많이 기대했나 보다.

나는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검지를 세워 '자애로우신 백부님께'라는 문장을 가리켰다.

"여기, 한 줄 제대로 채워져 있는데요?"

"본문이 아니어도 한 줄로 취급해 주는 건가?!"

"당연하죠. '받는 사람'도 엄연히 편지의 구성이니까."

내 대답에 세르펜스의 표정이 화악 밝아졌다.

그 변화가 너무 극적이라 시들어가는 새싹에 물을 준 뒤, 생기를 되찾아가는 과정을 빨리 감기로 지켜본 듯한 느낌이다.

"그럼 저는 쿠키를 먹으며 함께 마실 따뜻한 우유를 준비할 테니까, 세르펜스는 계속 편지를 쓰고 계세요."

"열심히 쓰고 있겠다."

세르펜스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대답하고는 드디어 본문 쓰기에 돌입했다.

물론 돌입만 하고 손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머리는 열심히 굴러가고 있을 테다.

나는 그런 녀석의 모습을 곁눈질로 살피며 우유를 데웠다.

오늘 우유는 분유를 탄 물이 아니라 진짜 우유다. 세르펜스에게 쿠키를 우유에 찍어 먹는 맛을 알려줄 생각이다.

우유가 데워지는 동안, 나는 접시에 쿠키를 담았다.

그리고 세르펜스는 갑자기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몇 글자 적었다가, 그것과 눈싸움을 한 뒤 일부분 수정했다가, 아예 지우고 다시 쓰길 반복했다.

종이를 바꾸기 전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으나 분명한 성과가 있었다.

"선우, 이것 봐라!"

테이블 위에 우유가 담긴 잔을 내려놓는 나를 향해, 세르펜스가 자신이 끼적거리던 종이를 보란 듯이 들어 올렸다.

[ 백부님께서 가문으로 돌아오신 지도 거의 1년이 다 되어 갑니다. ]

모르는 사람이 보면 고작 이런 문장을 쓰느라 그렇게 망설였느냐고 물을 만한. 정말 별거 아닌 내용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첫 줄부터 너무 거창한 얘기를 써 놓으면 그 뒤를 이어 쓰는 것도 힘들고, 읽는 사람도 부담스러울 테니까.

"어? 이러면 쿠키를 먹기 전에 두 줄 쓰기를 달성한 셈이네요?! 이야~, 대단해요! 그 여세를 몰아, 계속 팍팍 써 나갑시다!"

나는 세르펜스에게 잘했다는 칭찬과 함께 머리를 쓰다듬어 준 후, 제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세르펜스는 뿌듯한 표정으로 나와 마주 보며, 의기양양하게 쿠키 하나를 집어서 베어 물었다.

열심히 노력해서 쿠키를 쟁취해냈다는 성취감이라도 느끼고 있는가 보다.

나 또한 웃는 낯으로 쿠키를 하나 입에 물고 펜을 잡았다.

세르펜스도 다시 고개를 내리고 편지 쓰기에 집중했다.

[ 그동안 나는 정말 즐겁게 지냈어. 힘든 날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지만, 대체로 즐거운 날이 더 많았어. 진짜로!

힘들었던 건 악숭이들 때문인데···. 아, 악숭이는 악마 숭배자의 줄임말이야. 너무 길어서 내가 줄여버렸지. 다른 세상에 떨어졌다고 별다줄 민족의 혼이 어디 가겠어? ㅋㅋㅋ ]

너무 장난스러운 느낌이 없잖아 있지만 아무렴 어떠한가.

아무리 가족들이 읽을 일 없는 편지라고 해도, 우울한 내용이나 하소연만으로 채우고 싶지는 않다.

정말 가족들에게 보낸다고 생각하며 쓰는 거니까.

그래야 마음속 응어리를 풀어낼 수 있을 것 같으니까.

[ 악숭이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오늘은 내가 이곳에서 사귄 친구들을 소개해 줄게. 솔직히 말해서 악숭이 따위보다 그게 더 궁금하잖아. 그렇지? ]

이것이 편지가 아니라 필담이나 메신저였다면 'ㅇㅇ'이라는 답이라도 돌아왔을 텐데.

어쩌면 왜 마음대로 생각하냐면서 반박할지도 모르겠다.

부모님은 '누가 우리 귀한 아들을 괴롭혔어?!'라며 노발대발하실 테고.

누나는 '내 동생은 나만 괴롭힐 수 있는데!'라며 분통을 터트렸으려나?

'진짜로 누나가 나를 괴롭힌 적은 없지만, 가끔 놀리긴 했으니까.'

내가 삐진 표정을 지으면 깔깔거리며 재밌어하던 누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놓고는 미안했는지 나중에 슬그머니 용돈을 찔러준다거나, 배달 음식을 시켜주곤 했다.

그래서 삐지지 않았는데도 일부러 삐진 척을 한 적도 많다.

'그것도 다 추억이지.'

즐거웠던 기억을 떠올리자 입가에 절로 미소가 걸렸다.

그 덕분에 정말 기분 좋게 편지를 이어 쓸 수 있었다.

[ 제일 먼저 사귄 친구는 세르펜스라는 애야. 첫 만남 때는 조금 쫄아버렸지만, 그 이후로 잘 풀려서 지금은 가장 친한 친구가 됐어.

처음에는 무서운 녀석인 줄 알았는데, 알면 알수록 아기 고양이 같은 거 있지? 이렇게 써 놓으면 사람이 어떻게 고양이 같을 수 있냐고 어처구니없어 하려나?

하지만···, 아니다. 세르펜스가 얼마나 고양이 같은지 설명하려면 편지 한 장으로는 부족해.

그러니까 이 얘기는 나중에 할 말 떨어지면 할게. 그런 날이 올까 모르겠지만. ]

의식의 흐름대로 편지를 쓰다가, 하마터면 세르펜스 얘기로 편지지를 꽉 채워버릴 뻔했다.

나는 잠시 펜을 내려놓고 쿠키를 우유에 퐁당 적셔 먹으며 숨을 돌렸다.

바삭 하고 단단한 것이 부서지는 소리가 아닌. 그것보다 조금 무른 소리가 나자, 세르펜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나는 보란 듯이 쿠키를 다시 우유에 찍어서 입으로 가져갔다.

세르펜스가 머뭇거리다가 내 행동을 따라 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편지는 얼마큼 썼으려나?'

첫 문장을 쓰고 나자 감이 잡혔는지, 녀석의 앞에 놓인 종이에는 그새 또 한 줄이 추가되어 있었다.

몸을 살짝만 앞으로 내밀면 그 내용을 읽을 수 있겠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다 쓰고 나면 어련히 보여줄 테니까.

안 그래도 세르펜스는 편지 쓰기를 어려워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고작 궁금하다는 이유로 한 문장 늘어날 때마다 머리를 들이밀면, 세르펜스가 어떻게 느끼겠는가?

괜히 검사를 받는 것 같아서 한 자 한 자 적는 게 더 조심스러워질 테다.

나는 잘하고 있다는 뜻으로 미소를 지어 보이고, 우유를 한 모금 마신 뒤 다시 펜을 들었다.

유지스와 윈스톤과 에드나를 순서대로 소개하고 나자 편지지가 1/3밖에 남지 않았다.

[ 여기까지 해서, 나를 포함한 다섯이 '일루미나티' 단원이야. 갑자기 일루미나티가 왜 나오냐면···. 아, 이것도 설명하자면 기니까 나중에 할게.

진작에 편지를 쓸 걸 그랬다. 할 얘기가 너무 많아. 아직 소개하고 싶은 친구들도 더 있는데···.]

최대한 간추려 썼는데도 남은 공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어쩔 수 없이 성검 일행 소개도 나중으로 미루고, 내 얘기를 더 적어보기로 했다.

[ 아무튼 나는 이 낯선 세상에서도 친구를 잔뜩 사귀며 잘 지내고 있어. 다들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야.

그러니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

나는 잠깐 손을 멈췄다.

그리고 고민하다가 펜촉을 다음 줄로 옮겼다.

[ 근데 진짜로 걱정을 하나도 안 하면 역시 서운할 것 같다. 그러니까 조금쯤은 걱정해 줘.

이런 얘기를 쓰면 뭐 어쩌란 거냐며 어이없어하려나? ]

나는 눈을 감고, 어이없어하는 가족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다행히도 그들의 모습이 아직 선명하게 그려졌다.

잊어버릴 수 없고, 잊어버렸다 하더라도 다시 보면 알아볼 수 있는. 그립고도 반가운 얼굴들.

[ 사실 이따금 외로운 날도 있어. 그래도 항상 주변에 누군가가 있으니까, 그런대로 견딜 만해.

주로 같이 있는 건 세르펜스인데 얘가 분리 불안이 있어서 잘 때도 같이 자거든?

그런데 가끔은 내가 같이 자 주는 게 아니라, 녀석이 같이 자 주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해.

아무도 없는 어두운 방에 혼자 덩그러니 누워있으면 괜히 감상적이게 되고 그렇잖아?

어, 자리 없다. 이만 줄일게. 앞으로는 편지 자주 쓸 테니까 아쉬워하진 말고.

- 유씨 가문의 귀엽고 멋있고 혼자 다 해 먹는 막내 선우가 - ]

마지막 '보내는 이'를 적으며, 모든 줄이 다 채워졌다.

그래도 아직 편지지 마지막 줄과 종이의 외곽 사이. 아주 좁은 틈이 남아 있다.

[ p.s. 엄마, 아빠. 그리고 누나. 내가 많이 사랑하는 거 알지? 보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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