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6회
75. 공작님과 백부님 (24)
한 번 쓴 편지를 다시 모국어로 옮겨적는 건 금방이었다.
마지막 '추신' 부분을 쓸 때 잠시 멈칫하긴 했지만, 못 적을 만큼 감정이 휘몰아치지는 않았다.
눈물에 담아 마음속에 가득 차 있던 감정들을 흘려보낸 덕분일까?
그런다고 그리움이 희석되거나 사라진 건 아니지만.
고여서 썩기 직전의 물을 쏟아내고 깨끗한 물로 다시 채운 것처럼, 마음이 맑아진 느낌이다.
울기 전에는 그리움 속에 서러움과 외로움이 섞여서 괴로웠었는데.
지금은 온전히 가족들이 그립기만 하다.
'그리고 내가 울고 있으면 지탱해 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했으니까···.'
덕분에 무사히 편지를 끝까지 옮겨 적을 수 있었다.
나는 맞은편에 앉은 세르펜스를 힐끔 쳐다보며, 펜 뚜껑을 닫고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탁, 금속 재질의 만년필이 나무 테이블에 부딪히며 작은 소음이 발생했다. 그 소리를 들은 세르펜스가 번개같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멀뚱멀뚱.
세르펜스가 눈을 깜박거리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안 우는 건가?"
"제가 울었으면 좋겠어요?"
내 물음에 세르펜스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순간 어처구니가 없어서 '얼씨구?'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제야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본 세르펜스가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선우가 슬퍼했으면 좋겠다는 게 아니라···."
"알아요, 알아. 슬프거나 힘들 땐 참지 말고, 울면서 자신에게 기대어 달라는 거잖아요."
그 말대로라는 듯. 세르펜스가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 녀석의 행동에 실없는 미소가 흘러나왔다.
'나도 세르펜스가 울어 줬으면 하고 바랐던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너무 잘 울어서 탈이지만.
나는 울 땐 울더라도, 세르펜스처럼 울보가 되지는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세르펜스, 편지는 다 쓰셨어요?"
"···아직 열두 시 전이다."
세르펜스가 내게서 훔친 회중시계를 슬쩍 확인하며 답했다.
다 못 썼다는 소리다.
회중시계는 다시 세르펜스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편지를 다 쓰고 돌려줄 생각인가 보다.
세르펜스는 정말로 내가 괜찮은 게 맞는지 확인하려는 듯. 나와 10초가량 눈을 마주친 후에야 안심하고 다시 편지 쓰기에 열중했다.
술술 글을 써 내려갈 정도는 아니나, 감을 잡긴 했는지 지우고 다시 쓰는 횟수가 현저히 줄었다.
"아 참. 그거 편지지에 옮겨 써야 한다는 거, 잊지 않으셨죠? 본인 입으로 열두 시까지 쓸 수 있다고 하셨으니까, 알아서 시간 분배 잘 하실 거라 믿습니다."
세르펜스는 대답 대신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막히는 구간에 진입했는지, 손을 멈춘 채로 상체를 더 깊이 숙였다.
"그러다 테이블에 이마 박겠습니다."
허리 펴고 똑바로 앉으라는 뜻이었는데.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세르펜스가 정말로 테이블에 이마를 댄 채로 고민에 빠졌다.
어차피 박을 거, 미리 박겠다. 뭐 그런 건가 보다.
불현듯 세르펜스의 허리 건강이 걱정되었으나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녀석의 성격상, 저 자세가 버릇으로 굳어질 일은 없으니까.
하루 이틀 구부정하게 앉는다고 해서 휘어질 만큼 녀석의 척추는 나약하지 않다.
나는 세르펜스에게서 시선을 떼고 방금 막 옮겨 적은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분명 내가 적은 글인데도 감회가 새로웠다.
세르펜스와 필담을 하다가 <유선우>, 그 이름 석 자를 적었을 때도 이상한 기분이 들었는데.
이렇게 문장을 적어놓고 보니 쓸 때도. 그리고 다시 읽을 때도 묘한 감상이 일었다.
한 글자, 한 글자.
편지를 읽어 내려가다 보니 어느새 마지막 문장에 다다랐다.
무심코 손가락으로 그 글자들을 스윽 훑어보았다. 고급 종이답게 손끝에서 부드러운 질감이 느껴졌다.
나는 편지지를 뒤집어 놓았다.
이대로라면 세르펜스가 편지를 다 쓸 때까지 멍하니 편지지만 들여다볼 것 같아서.
그러고 나서야 뒤늦게 피로감이 밀려들었다.
낮에는 리벨론 가로 보낼 짐들을 분류하겠다며 뻘짓하고, 조금 전에는 한바탕 울기까지 했으니.
몸은 몸대로 힘들고 눈꺼풀도 한껏 무거워진 상태였다.
이제까지 버틴 것도 용하다.
세르펜스에게 시계를 뺏겨서 현재 시각은 알 수 없지만, 미리 계획했던 대로 반신욕이나 하고 와야겠다.
나는 세르펜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세르펜스는 편지 쓰기에 집중하는 와중에도 내 기척을 놓치지 않고, 고개를 들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어딜 가느냐는 눈빛이다.
"씻으러 갑니다."
"정말 씻기만 하는 건가?"
"왜요? 제가 혼자 욕실에서 울기라도 할까 봐요?"
"음···."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모습으로 보아 내 추측이 맞는가 보다.
어차피 우는 소리가 나면 바로 알아챌 수 있지 않으냐고 따지려다가, 여기가 방음이 잘 되는 5층이란 사실을 떠올렸다.
"문 살짝 열어둘게요. 그럼 됐죠?"
그제야 세르펜스가 만족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혼자 아기를 돌볼 땐 볼일 보면서도 화장실 문을 맘대로 못 닫는다더니.
'그게 내 얘기가 될 줄은 몰랐는데···.'
물론 내 상황은 조금 다르긴 하다.
문을 닫았을 때, 울까 봐 걱정되는 대상이 아기가 아니라 보호자인 나라는 부분이.
나는 내 팔자를 되돌아보며 욕실로 들어가, 손가락이 겨우 통과할 정도로 문을 살짝만 열어두었다.
그리고 욕조에 물이 받아지는 동안 양치도 하고 머리도 감았다.
그러고도 물이 덜 차올라 가볍게 몸을 씻어낸 뒤 욕조에 몸을 담갔다.
벌써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다.
몸에 힘을 빼고 욕조에 등을 기대며, 본격적으로 반신욕을 만끽하려는 그 순간.
문틈으로 세르펜스의 목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선우, 아직도 씻는 건가?"
"이제 막 욕조에 들어갔거든요?!"
"으음···, 그런가?"
"네, 그렇습니다."
우는 걸 달래줄 땐 좀 자랐나 싶었는데. 아직 어리긴 어리구나 싶다.
나는 다시 따뜻한 물에 몸을 맡겼다.
그리고 잠시 뒤.
"선우가 쓴 편지, 읽어봐도 되는가?"
"세르펜스는 편지 다 썼어요?"
"······."
"쓰던 거나 빨리 쓰세요."
"···알겠다."
그리고 또다시 잠시 후.
"선우."
"왜요, 뭐요! 이번엔 무슨 얘길 하려고요?"
"그냥 한번 불러 봤다."
"별 용건 없으면 말 시키지 마세요. 한 번만 더 그러면 문 닫아버릴 거니까."
"······."
결국 내 입에서 협박이 나오고 나서야 세르펜스는 조용해졌다.
녀석이 무슨 생각으로 자꾸 말을 걸어오는지 알고 있다.
아무것도 안 하고 멍하니 있다 보면 온갖 상념이 떠오르기 마련이니까. 내가 우울한 생각에 빠질까 봐 그러는 걸 테다.
'걱정해 주는 건 기특한데, 이번에는 조금. 아니, 매우 귀찮았어.'
어지러운 상념은 아까 울면서 다 털어 보냈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새로운 상념이 생겨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다.
나는 몸을 감싸는 따뜻한 물의 감촉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우, 선우! 이런 곳에서 자면 안 된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세르펜스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어쩐지 정신이 몽롱해서 손바닥으로 물을 떠올려 내 얼굴에 끼얹었다.
딱 좋게 뜨끈했던 물은 어느새 미지근해져 있었다.
"헐, 미친···. 저 설마 욕조에서 잠든 겁니까?!"
"미치지는 않았고, 잠든 건 맞다."
세르펜스가 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타박하는 듯한 시선이 따끔따끔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계속 말 걸게 내버려 둘 걸 그랬나.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반신욕으로 피로를 푸는 것도 정도껏 피곤할 때나 도움이 되지, 그 이상일 땐 대충 씻고 자는 게 답이구나···.'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욕조에서 자다가 익사하여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가는 건 사양한다.
오늘의 배움을 결코 잊지 말아야겠다.
나는 일단 세르펜스를 욕실에서 내보냈다.
그러고 나서 젖은 몸을 수건으로 대충 닦아내고, 잠옷을 걸쳐 입은 후 방으로 나왔다.
세르펜스는 여전히 뚱한 표정이다.
"편지를 다 썼다고 말했는데, 대답도 없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는가?"
"죄송합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나는 두 손을 포개고 비굴하다 싶을 정도로 허리를 깊이 숙여 사과했다.
세르펜스는 입을 삐죽 내밀긴 했으나 그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가족들이 그립다며 울고 난 후였기에, 일부러 죽으려고 그런 거 아니냐고 따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도 세르펜스는 홧김에 선 넘는 말을 내뱉을 만큼 생각 없지 않았다.
"편지 다 썼다고 했죠?"
"바로 자러 가지 않아도 괜찮겠는가?"
"네, 잠 다 깼어요."
그렇게 대답하며 나는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뒤집어 놓은 두 장의 편지가 있던 자리에는 한 장의 편지가 앞면이 보이게 놓여 있었다.
내가 썼던 편지지는 두 장 모두 세르펜스의 손에 들려 있었다.
"이게 내 이름인 건가?"
세르펜스가 편지에서 자신의 이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여기까지는 특별한 일도 아니다. 하지만 그 편지가 내 고향의 언어로 쓰인 거라는 게 조금 특별하다면 특별했다.
어차피 같은 내용인 데다가 한쪽은 읽지도 못하는 언어로 쓰여있는데, 왜 두 장 다 가져갔나 했더니.
나란히 놓고 대조해 보느라 그랬나 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이 세상에 막 왔을 때. [성검의 주인] 내용을 내가 살던 세상의 언어로 적어둘까 하다가, 세르펜스가 어떻게든 해석해 낼 것 같아서 그만 뒀었는데···.'
이러다 진짜로 녀석 혼자서 한글을 깨치는 게 아닐까 싶다.
"네, 맞아요. 제가 살던 세계의 언어는 표음문자라서요, 적는 김에 일행들 이름도 다 제 모국어로 써 봤어요."
"흐음, 그렇군. 그런데 이 '별다줄'이라는 건 뭐지?"
"별걸 다 줄인다는 뜻입니다."
"정말 별걸 다 줄이는···, 음? 잠깐, 그게 민족성이라고? 별걸 다 줄이는 게?"
믿을 수 없다는 듯. 세르펜스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부정해 봤자 진실은 변하지 않는 법이다.
나는 포기하라는 표정으로 녀석을 마주 보며 말했다.
"대체 몇 번을 말합니까? 제가 그 세상 평균이라고."
"······."
나는 동상처럼 굳어버린 세르펜스를 내버려 두고, 내 앞에 놓인 편지지를 집어 들었다.
세르펜스의 깔끔하고 세련된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
검은 줄이 죽죽 그어진 연습용 종이를 보았던 터라, 나도 모르게 '오!' 하는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받는 이와 첫 문장은 아까 봤던 그대로였기에 내 시선은 바로 두 번째 문장으로 향했다.
[ 그런데도 제가 백부님에 관해 아는 거라고는, 교단의 이단 심문관이셨다는 것. 그리고 다정한 분이시라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
서로에 관해 알아가자는 얘기를 하기 전에 밑밥을 까는 내용이다.
내가 던져준 조언을 그대로 반영한 걸 테지.
문득 받는 사람 앞에 붙는 수식어로 '다정하신'을 쓰면 되었던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애써 모르는 척하며 다음 줄을 읽었다.
[ 시온이 말하길, 대화가 어색한 건 서로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모르니, 상대방의 기분을 해할까 저어되어 조심스러워져서 그렇다고 말입니다. ]
조언을 반영했다는 말은 취소한다.
이건 반영 수준이 아니라 인용이다.
대화할 때 어색하다는 이유로 나를 끌어들이는 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편지에서까지 이럴 필요가 있어? 어째서 일대일로 주고받는 편지 속에 내가 끼어있는 기분이 드는 거지?'
왜 이러는지 정말 알 수가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대충 샤워만 하고 나올 것을. 편지지에 옮겨 적기 전에 확인했으면, 이런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나는 편지지를 살짝 내려, 그 너머로 눈만 빼꼼 내밀어 세르펜스를 쳐다보았다.
'별다줄 민족'이라는 표현에 넋이 나갔던 세르펜스가 제정신을 차리고, '어때? 나 잘했지? 칭찬해 줘!'라고 말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단 끝까지 읽어볼게요."
나는 다시 편지지로 시선을 옮겼다.
[ 눈치채셨겠지만, 저는 백부님을 대하는 것이 아직도 어렵습니다. 그래도 백부님께서 실은 다정한 분이시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편해졌습니다.
적어도 이전처럼 백부님의 얼굴에서 다른 누군가의 모습을 떠올리고, 두려움을 느끼는 일은 사라졌습니다. ]
에일리히의 얼굴을 보면 떠오르는 다른 누군가.
그게 누구냐고 세르펜스에게 물어볼 것도 없이, 전대 프라시더스 공작을 지칭하는 표현이 분명했다.
'에둘러 써 놓긴 했지만,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었을 텐데···.'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이렇게 빙빙 돌려서 써 놓았기에, 녀석이 얼마나 솔직하게 이 편지를 적었는지 알 수 있었다.
아직도 그자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것조차 두렵노라고 자신의 상태를 알린 거다.
이래서야 앞부분을 고쳐서 다시 쓰라고 말하기도 뭐하다.
나도 편지에 세르펜스를 포함한 일루미나티 단원들을 거론하지 않았던가.
대충 그것과 비슷하다고 치자. 실상은 전혀 다르지만, 아무튼 그렇다고 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