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2회
75. 공작님과 백부님 (30)
시간은 흘러 어느덧 간식 시간 15분 전이 되었다.
세르펜스는 한참 전부터 눈을 떴다 감았다 하며 틈틈이 시계를 확인하다가, 이제는 하염없이 시계만 쳐다보았다.
'그럴수록 1분 1초가 더 길게 느껴지는 법인데···.'
녀석은 급기야 집무실 시계가 고장 난 것 같다며, 개인용 회중시계를 꺼내서 시간을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그러고도 못 믿겠다는 듯 내 회중시계까지 가져갔다.
그런 조카의 행동이 신경 쓰였던 걸까?
에일리히도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힐끔거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크흠! 슬슬 시간이 된 것 같은데···."
"우리만 먹는 거면 진작 자리를 옮겼겠죠.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불렀잖아요? 조카를 위하는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안 됩니다. 시간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겁니다."
간식 시간까지 이제 15분. 아니, 14분 남았다.
이 정도면 사람들에게 당장 오라고 부르든, 그냥 기다리든. 모이는 시간은 엇비슷할 테다.
그렇다고 우리끼리 먼저 간식을 먹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세르펜스의 교육을 위해서라도 절대로 간식 시간을 앞당길 수 없다.
에일리히도 이런 내 의사를 존중해 주었다.
딱하다는 눈으로 세르펜스를 힐끔거리긴 했지만, 더는 나를 설득하려 들지 않았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을 만들어 먹기로 했길래, 세르펜스가 저렇게나 기대하는 겁니까?"
에일리히가 펜을 내려놓고 질문을 던졌다.
아무래도 세르펜스가 신경 쓰여서 일이 손에 안 잡히나 보다.
"제가 살던 세상에서 먹었던 간식이요."
"아, 그래서···!"
에일리히가 비로소 조카의 행동이 이해된다는 듯, 탄성을 내뱉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세르펜스가 간식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고작 십여 분을 못 기다려서 안절부절못할 정도는 아니다.
겉으로 티만 내지 않았지, 녀석이 왜 저러나 의아했을 테다.
"네, 그래서입니다. 직접 간식을 만드는 것도 처음이라 설레는데, 그게 제가 살던 세상의 음식이라니까 더 기대된 거겠죠."
"다른 세상의 음식이라니, 그 얘기를 듣고 나니 저도 궁금해졌습니다."
달고나는 주로 어린애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를 갖춘 군것질거리다.
그런데 과연 50 넘은 에일리히가 추억 보정조차 없이, 달고나 만들기를 즐길 수 있을까?
"사실 음식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수준이니까, 너무 기대하지는 마세요. 그냥 제가 어렸을 때 먹던 추억의 군것질거리니까."
"당신이 어렸을 때 먹었던 추억이 담긴 간식이라 하니, 한층 더 기대되는군."
에일리히의 관심이 부담스러워 뱉은 말이 도리어 세르펜스의 기대감을 높여 버렸다.
그러잖아도 반짝거리던 세르펜스의 눈이 한층 더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나는 저 눈빛을 무시하며 일을 계속해 나갈 자신이 없다.
"다들 모일 때까지 뭘 만들지는 않겠지만, 응접실에 가서 앉아있을까요? 어차피 저도 에일리히 님도 일하긴 그른 것 같은데."
이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세르펜스가 그리하는 게 좋겠다고 답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응접실과 연결된 문 쪽으로 향했다.
"아! 잠깐만요. 문 열지 말고 있어 봐요."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는 세르펜스에게 기다리라는 손짓을 해 보인 뒤.
그런 녀석을 귀여워 죽겠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에일리히에게 다가갔다.
갑자기 내가 자신 쪽으로 다가오자, 에일리히가 세르펜스에게서 시선을 떼고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연스레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지는 모습이 세르펜스와 매우 닮아있었다.
"제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에일리히 님께도 제 본명을 알려드리고 싶어서요."
내 말에 에일리히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는 놀란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아직 굳게 닫혀있는 응접실 문을 쳐다봤다.
"아! 교단에는 비밀입니다. 저 녀석이 제 본명을 아는 사람이 늘어나면, 제게 부담이 가중된다는 거짓말을 해 놨거든요."
"어째서 그런 거짓말을···."
"그냥 자기 혼자만 알고 싶어서 그런 거겠죠."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당당하게 내 이름의 소유권을 주장할 때는 언제고.
삼촌에게 욕심쟁이로 낙인찍히는 건 부끄러웠는지, 세르펜스가 고개를 푹 숙이며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 그렇게 중요한 걸 내가 알아도 괜찮겠니···?"
누가 뭐래도 내 이름은 분명 내 것이거늘.
어째서인지 에일리히는 세르펜스에게 허락을 구했다.
에일리히에게 우선순위 1위가 세르펜스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 이 상황은 지나치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백부님이라면···, 괜찮습니다."
세르펜스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세례명이나 알려 줄 것이지. 대체 왜 남의 이름 가지고 생색을 내는 건지 모르겠다.
이해가 안 되는 건, 감격에 겨워 어쩔 줄 몰라 하는 에일리히도 마찬가지다.
'이름을 아침 식사 시간에 알려주지 않아서 다행이네.'
그 당시의 에일리히는 세르펜스의 편지를 받고 감동의 도가니에 푹 빠진 상태였다.
그런데 이 대화가 그때 오갔다면 어땠을까?
겨우겨우 그친 눈물을 다시 흩뿌리며, 식사를 제대로 마치지 못했을 게 뻔하다.
'어지간하면 두 프라시더스 사이에 다정한 기류가 흐를 땐 초를 치고 싶지 않았는데···.'
나는 혀를 쯧쯧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이번만큼은 할 말을 해야겠다.
"현재 제 본명을 아는 사람은 일루미나티 일동과 성검 일행. 그리고 제온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 본명을 알려 주고 말고를 정하는 건, 세르펜스가 아닌 접니다. 감사를 하려거든, 저에게 하세요."
"죄, 죄송합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에일리히가 내게 사과했다.
순간 심술이 나서 알려주지 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줬다 뺏는 것만큼 치사한 것도 없었기에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아무튼 제 이름은 유선우입니다. 덧붙여 '유'가 성이고 '선우'가 이름이니까, 선우라고 불러주세요."
"유, 서언···, 우···? 발음이 좀 어렵군요."
에일리히가 한 글자, 한 글자. 느릿느릿 입에 담았다.
그 덕분일까? 어렵다고 말한 것치고는 상당히 비슷하게 잘 발음해 냈다.
"연습은 나중에 하시고, 지금은 응접실로 넘어가죠."
"아!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에일리히가 나를 붙잡으며 시계를 확인했다.
현재 시각은 2시 55분. 조금 일찍 일어난 덕분에 아직 간식 시간까지 5분의 여유가 남았다.
지금 이 타이밍에 나를 잡을 만한 이유는 하나뿐이다.
'아무래도 세례명을 알려주려는 것 같은데···?'
내가 에일리히의 세례명을 세르펜스보다 먼저 알아도 괜찮은 건가 싶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세르펜스의 눈치를 살피게 되었다.
에일리히도 나보다는 조카에게 먼저 세례명을 알려주고 싶었는지, 내게 양해를 구한 뒤 세르펜스에게로 다가갔다.
"만약 내게 세례명을 알려주고 싶지 않다면, 그리해도 된단다. 하지만 나는 네가 내 세례명을 들어 주었으면 좋겠구나. 혹시 부담스럽니?"
"아닙니다. 저도···, 백부님과 세례명을 교환하고 싶습니다."
두 사람이 용기를 내 말했다.
참 보기 좋은 장면이다. 둘이 내 이름을 가지고 헛소리한 것을 용서해주고 싶을 만큼.
에일리히가 세르펜스에게 귓속말로 자신의 세례명을 전달했다.
순서를 정확하게 지키고 싶었나 보다.
"백부님과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 세례명은···, '아도르'입니다."
"너도 참 잘 어울리는구나···. 정말로, 잘 어울려···."
"우시는 겁니까?"
"아니···, 그럴 수야 없지."
간식 시간을 늦출 수 없다는 일념 하나로.
에일리히는 고개를 치켜들고 눈물을 삼켰다. 그 노력은 빛을 발하여 그는 무사히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마무리로 긴 호흡을 내쉰 뒤. 에일리히가 나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제 세례명은 템페라투스(Temperatus)입니다."
"세르펜스의 말대로, 진짜 잘 어울리시네요."
온후한 성정의 에일리히에게 완전 찰떡같은 세례명이다.
물론 그에게 고문당했던 악숭이들은 동감할 수 없겠지만. 그건 내 알 바가 아니다.
- 똑똑똑.
노크 소리가 울린 곳은 응접실과 연결된 문 쪽이다.
다시 시계를 확인하니 시곗바늘은 3시 정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에일리히가 서둘러 소매로 눈가를 톡톡 두드려 찔끔 흘러나온 눈물을 닦아냈다. 그런 그의 얼굴 가득 행복이 넘쳐났다.
세르펜스가 문을 열자 유지스의 모습이 보였다. 방금 노크한 게 유지스였나 보다.
응접실 안으로 들어서니, 에드나와 윈스톤의 모습도 보였다.
테이블 위에는 내가 미리 부탁했던 재료와 도구도 준비되어 있었다.
"평소에는 3시가 되기 전에 미리 와서 앉아 계시더니 오늘은 늦으셨네요."
"백부님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세례명도 교환하고···."
"정말요?! 진짜 잘됐네요!"
세르펜스의 말에 유지스가 제 일처럼 기뻐하며 축하해주었다.
그러고는 슬쩍 나를 곁눈질하며 어찌 된 상황인지 알 것 같다는 미소를 지었다.
내가 본명을 알린 것이 계기가 되어, 두 사람이 세례명을 교환하게 되었다는 걸 눈치챈 게 틀림없다.
그런 유지스와는 반대로, 알타르는 떨떠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세례명을 교환하는데 그 사이에 왜 껴있었냐고 묻고 싶어 하는 듯한 표정이다.
나는 그를 못 본 척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이것들은 다 뭔가요?"
에드나가 쿠키 틀과 국자를 양손에 들고 살펴보며 질문했다.
정말로 그것의 명칭을 모르는 건 아닐 테니, 이런 걸 왜 준비했냐는 뜻이겠지.
"오늘은 제가 살던 세상의 간식을 직접 만들어 먹을 생각입니다."
"이런 간단한 재료로 만들 수 있는 간식이 있어요?! 아···, 그래도 설탕과 식소다는 질량 대비 가격이 비싸니까···."
간식을 직접 만든다는 얘기에 보육원 아이들이 떠오른 걸까?
에드나가 반색하며 좋아했다가, 이 재료로는 아이들을 배불리 먹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시무룩해졌다.
'아아, 이것은 달고나라는 거다.'라고 말할 타이밍인 줄 알았는데.
설탕 덩어리에 가까운 달고나는 군것질거리로는 괜찮아도, 자라나는 아이들의 영양소를 충당시켜 줄 간식으로는 부적합했다.
"에드나 씨, 월급 많이 받잖아요. 그 정도면 애들 간식 정도는 충분히 사줄 수 있지 않아요?"
"그렇긴 하지만, 아직 실감이 잘 안 나서···."
깜박 잊고 있었는지 에드나가 국자와 쿠키틀을 내려놓으며 멋쩍게 웃었다.
아까 본 서류에 의하면 월급의 90%가 에드나의 손을 거치지 않고, 바로 보육원으로 보내지는 것 같던데.
확실히 그런 식이라면 실감이 안 날 만도 했다.
"그래서 이것들로 어떻게 간식을 만드는 겁니까?"
옆자리에 앉은 세르펜스가 내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기며 물었다.
자신에게도 관심을 달라는 뜻이자, 빨리 달고나라는 간식을 먹어보고 싶다는 의지 표명이다.
이렇게나 기대하는데 더 기다리게 할 수는 없다.
나는 위풍당당하게 소매를 걷어붙였다.
"제가 우선 시범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신의 사자께서 만드신 천계의 간식이라니, 무척이나 기대됩니다!"
알타르의 그 한마디에, 나는 설탕이 들어있는 통의 뚜껑을 열다 말고 순간 멈칫했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교단이 나를 천사로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미리 알렸어야 했는데···.'
이제 어쩔 수 없다.
지금 상황에서는 다들 눈치껏 상황을 알아채 주길 바라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어가는 것이 최선이다.
다행히 이곳에는 눈새눈새도 없다.
나는 표정 근육을 굳히고 알타르를 노려보며, 짐짓 싸늘하게 말했다.
"제가 만든 걸 왜 알타르 님께 드립니까?"
"맞습니다. 시온이 만든 간식은 저만 먹을 수 있습니다."
세르펜스가 빠르게 상황극을 이어받았다.
여기까지는 좋다.
하지만 그 대사가 너무 어이없는 나머지, 나도 모르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시온은 제가 만든 걸 드셔 주셨으면 합니다."
"처음 만든 건 서로 교환해서 먹고, 그 이후부터는 각자 만들어 먹는 거로 합시다."
"으음···."
"합시다, 다음엔?"
"···그럽시다."
"옳지, 옳지!"
나는 세르펜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알타르의 눈치를 살폈다.
딱히 나를 의심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에일리히를 힐끔거리고 있었는데, 아마도 세르펜스가 만든 간식을 나에게 준다는 말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